#92. 5장 성명(3)
“죽어라!”
기세등등한 외침과 함께 뒤쪽에서 검날이 날아들었다.
나는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다음 검을 쥔 놈의 손목을 잡아채 반대로 꺾었다. 놈이 쥐고 있던 검 또한 반대로 향했다.
푸확!
제 검에 심장이 꿰뚫린 채 절명한 놈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다시 공격이 쏟아졌다.
화선촌을 벗어나 동쪽의 산등성이로 이동하면서 오십. 이곳에 도착해 다시 오십에 가까운 숫자를 줄였다.
그런데도 아직 백 명에 달하는 월영련의 무인들이 기세등등하여 몰아붙여 오는 상황이었다.
지금껏 내공 소모가 적은 사신무를 사용했기에 단전엔 대략 이갑자가 넘어가는 내공이 남아있었다.
슬슬 기세를 가져올 때가 됐다 싶어 나는 눈을 돌렸다.
오십 구에 달하는 시체가 바닥 여기저기에 쌓여 있는 만큼 주인을 잃은 검 또한 그 숫자만큼이나 널려 있었다.
쉭! 쉬쉭!
나는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공격을 마저 피해낸 뒤 단숨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환생한 이후 처음 펼쳐보는 천일백야검법의 후반부 초식.
전반부 초식이 검기를 다루고 중반부 초식이 검강을 다룬다면 후반부부터는 초식 하나하나가 지고한 경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중 후반부의 첫 번째 초식인 검령백분(劍靈百分).
우웅!
순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주인 잃은 검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어 미세하게 진동하던 검들은 하나둘씩 허공으로 떠올랐고 동시에 나를 중심으로 포진하듯 늘어섰다.
“저게 무슨!”
“설마!”
그러자 계속해서 나를 향해 공격해오려던 월영련 놈들이 움찔 놀라 주춤하는 게 보였다.
그중에는 검령백분의 초식이 어떠한 경지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놈들도 있었다.
“이, 이기어검(以氣馭劍)?”
이기어검이라는 말에 놈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인극을 넘어 지극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펼쳐보고자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게 이기어검이었다.
손이 아닌 진기를 이용해 검을 다뤄야 하기에 극도의 집중력과 내공을 운용하는 섬세함 등이 필요했다. 더불어 내공 소모 역시 컸다.
대신 펼칠 수만 있다면 혼자서 둘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는 게 이기어검이었다.
검 한 자루를 허공에서 제어해 손에 쥐고 휘두르는 것과 같은 위력의 초식을 구사할 수 있으니 당하는 처지에선 둘로 늘어난 적을 상대하는 느낌일 테니까.
한데 내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검의 숫자는 하나가 아닌 수십.
단전에 남아 있던 이 갑자의 내공 중 반 이상을 사용해야 했지만 백에 달하는 절정 고수들을 상대로 검령백분만 한 초식도 없었다.
“화월각주님! 어찌해야…….”
당황한 놈들이 자신들을 이끄는 화월각주를 돌아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 나는 놈들을 향해 팔을 뻗었다.
내 팔짓 하나에 수십에 달하는 검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 놈들을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푹! 푸푸푸푸푹!
“끅!”
“끄아악!”
검에 꿰뚫린 놈들은 비명을 지르고,
“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해라!”
간신히 피해내거나 막아낸 놈들은 정신을 부여잡고자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내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던 검들은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자아를 가진 듯 저마다 초식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운류검법. 승천대명검법. 천일백야검법. 그 외에도 내가 익히고 있는 검법들의 초식이 수십 자루의 검들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어떤 검은 빨랐고 어떤 검은 변칙적이었으며 어떤 검은 무거웠고 어떤 검은 부드러웠다.
다시 어떤 검은 검기를 뿜어냈고 어떤 검은 검강을 머금은 채 적들을 뒤쫓았으며 어떤 검은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적들을 도륙했다.
그렇게 수십 자루의 검이 한바탕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을 때 적들의 숫자는 어느새 이십여 명까지 줄어들었다.
포위망 역시 산산이 부서져 나갔고 그 덕에 운신이 자유로워진 나는 덤덤하게 시체의 잔해들과 핏물 위를 거닐며 천천히 놈들에게 다가섰다.
내가 다가설 때마다 살아남은 놈들 역시 그만큼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 초라한 광경에 화월각주는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뭣들 하느냐! 대월영련의 무인이라는 놈들이 고작 한 놈을 상대로…….”
하지만 화월각주 역시 나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나와, 여전히 내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수십 자루의 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서자 화월각주의 시선은 다시 나를 향했다.
그는 순간적이나마 겁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까지 분노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피식하는 조소와 함께 물었다.
“비급은 어디에 있지?”
“비급?”
“묵룡일원공의 비급 말이야. 찾고자 한다면 직접 나서라고 했다면서?”
선우영민을 통해 백의문주와 유진휘. 둘 중 누구든 유인하여 천라지망이 펼쳐지는 이곳에서 처리하려던 게 놈의 계획이었다.
천라지망뿐만 아니라 화선촌 사람들까지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써먹으려던 심산이었겠지.
하지만 인질은 무사하고, 천라지망마저 무너졌으니 화월각주에겐 남아있는 패가 없었다.
“…”
화월각주 역시 패배를 실감하는 표정이었다. 다만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런 화월각주를 응시한 채 슬쩍 손짓했다.
쉭!
허공에 떠올라 있는 검 중 한 자루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화월각주를 스쳐 지나간 검은 그 후방에 서 있던 무인 하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어 또 한 자루의 검이 뒤따라 허공을 가로질렀다.
“컥!”
그렇게 차례차례 남아있는 잔당들까지 모조리 처리하자 화월각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제 허공에 떠올라 있는 수십 자루의 검 끝이 모조리 화월각주를 향해 뻗어있었으니까.
“다시 묻지. 비급은 어디에 있어?”
“…”
내 물음에 화월각주는 계속 침묵했다. 순순히 대답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입을 열 기회는 앞으로도 있을 테니까.”
일전에 월영련주가 화월각주를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선 적도 있는 걸로 미루어 볼 때 화월각주의 지위가 월영련에서 제법 높고 중요한 위치라는 판단이 섰다.
해서 마지막까지 놈을 살려둔 것이다.
놈에게서 적잖이 정보를 캐낼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화월각주의 존재만으로도 선우약가의 오명을 벗겨낼 수 있을 터였다.
한데 그런 내 심중을 알아차렸는지 화월각주가 조금씩 미소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당장 죽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좀 놓이나?”
내가 말하자 화월각주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한 자루도 아닌 수십 자루의 검을 가지고 이기어검을 펼쳐냈으니 지금쯤 지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틀린 말은 아니어서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이라도 쳐보려고?”
“하하. 도망? 아니지. 이때를 위해 이백에 달하는 수하들을 희생시켰는데, 도망이라니.”
이때?
무슨 말을 지껄이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즘이었다.
쐐에에엑!
섬찟할 정도의 기세와 함께 거대한 기운이 내 미간을 노리고 쇄도해 들어왔다.
카가가강!
이기어검으로 제어하고 있던 검 중 열 자루를 박살 내고도 기세를 잃지 않은 그 기운의 정체는 하나의 화살이었다.
*
쾅!
손에 쥐고 있던 검으로 화살을 쳐낸 내가 빠르게 오감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화월각주에게 집중하고 있던 상황이라도 누군가가 내게 화살을 쏘아 보낼 때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니.
하지만 이내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했다.
화살이 쏘아진 방향의 저 멀리. 내 시야에마저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거리에 한 인영이 서 있는 걸 발견했으니까.
그 엄청난 거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의 위력으로 화살을 쏘아 보낼 정도여서 사뭇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인영이 다시 활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쐐애액! 쐐액!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나는 검령백분의 초식으로 제어하고 있는 모든 검을 앞세워 방패 삼았고 두 개의 화살은 그 방패와 충돌하자마자 폭발했다.
쾅! 하는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는 사이 화월각주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습을 가했다.
촤-악!
내 왼팔 위로 옅은 검상이 새겨지면서 핏물이 튀어 올랐다.
피한다고 피했으나 화살이 폭발하는 충격이 만만치 않아 회피가 온전하지 못했다.
“네놈의 실력이 이 정도로 뛰어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예상 밖이긴 했으나 이곳이 네놈의 묫자리가 될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화월각주에게서 이 한순간을 위해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자신감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화살을 쏘아대는 인물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쉬지 않고 날아드는 화살에 집중해야 하기에 화월각주의 공격 역시 보다 날카롭고 매섭게 느껴졌다.
파파팡!
더군다나 검령백분의 초식으로 제어하고 있던 검들 또한 전부 부러져나간 상황.
이제는 순전히 손에 쥐고 있는 검 하나로 두 사람의 합공을 막아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화월각주의 두 눈에 승리를 자신하는 감정이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화선촌의 인질과 천라지망에 이어 마지막 순간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나타난 예사롭지 않은 인물까지.
허를 찔린 만큼 다소 놀라긴 했으나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전생에 겪었던, 실제로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수없는 위험한 상황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교의 마인들은 이보다 더 지독했고 두려웠으니까.
쐐에엑!
초반보다 더욱 큰 위력을 머금은 화살이 재차 쏘아지고, 적절한 순간에 검을 찔러 넣는 화월각주 사이에서 나는 과감히 괘월선보를 밟았다.
푸확!
등가죽을 깊게 훑고 지나가는 화살로 인해 고통이 상당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검을 일직선으로 내리그었다.
쩍!
화월각주의 검과 내 검이 부딪치면서 갈라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윽!”
이어지는 신음은 다름 아닌 화월각주의 것이었다.
반으로 쪼개지는 검과 함께 그의 오른팔이 반듯하게 잘려 나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복부에 왼손으로 펼친 태산항마장을 꽂아 넣었다.
“컥!”
몸이 직각으로 꺾이며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 화월각주가 한 구석으로 튕겨 나갔다.
죽진 않았을 테지만 단전이 부서지는 고통에 정신을 잃었을 게 분명했기에 나는 잠시 제쳐두었던 인물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쐐에에엑!
화월각주가 당하는 모습에 나름 당황했는지 쏘아지는 화살에서도 다급함이 느껴졌다.
쾅!
나는 화살이 날아오는 족족 검으로 쳐내고 퉁겨내면서 몸을 날렸다.
쉬지 않고 전진하자 점차 활을 쏴대는 놈과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행여 도망치지는 않을까 염려했으나 놈은 오로지 나를 죽이는 데에만 몰두하겠다는 듯 더욱 빠르고 강하게 화살을 날려댔다.
쾅! 쾅!
마침내 몇 발째인지 샐 수도 없는 화살을 쳐낸 끝에.
쾅!
나는 어느새 놈을 내 사정거리 안에 둘 수 있었다.
거리가 좁혀지니 활을 버리고 화살을 양손에 움켜쥔 채 놈이 달려들었다.
아니, 놈이 아니라.
‘여인이라고?’
전생을 통틀어 강호에서 이 정도로 활을 다루는 자를 만나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놈의 정체가 여인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실력으로 미루어 볼 때 여인 역시 화월각주 만큼이나 지위가 높아 보였기에 나는 그녀 역시 죽이지 않고 제압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활을 쓸 때는 나조차도 나름 긴장해야 했으나 활이 없을 때는 그저 화월각주의 실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퍽!
“끅!”
잠깐의 공방 끝에 정체 모를 여인마저 사로잡은 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등의 상처를 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