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5장 성명(4)
태산파가 섬서로 들어섰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장문인인 동악검선이 직접 나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선우약가와 같은 천하오주이자 동악검선은 천하십대고수의 일인.
선우약가를 공격하기 위해 경양현에 집결하고 있던 섬서 무림 연합회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악검선이 직접 나섰다는 건 태산파가 선우약가를 돕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거나 다름없는 바였다.
마공. 그것도 천마의 무공에 손을 댄 선우약가라는 소문이 만연한데도 그들을 돕겠다는 건.
‘같은 천하오주라는 유대감 때문이든가. 혹은 어느 정도 소문의 진의를 파악하고 있든가. 둘 중 하나다.’
연합회주 막능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뒷목을 쓸어내렸다.
백의문에 이어 태산파라니.
애초에 이번 계획은 속전속결로 마무리를 지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한데 백의문 놈들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겨 주춤했고 다시 화월각주가 직접 백의문주를 처리해 주겠다는 말에 어찌어찌 경양현으로 집결했다.
와중에 집결령은 백의문의 수작으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선우약가를 향한 공격을 감행하려 하는 순간에 태산파가 나타났으니, 일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꼴이었다.
“회주님.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부회주 서량이 착잡한 얼굴로 물었다.
막능제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태산파와 동악검선의 무위를 고려하면 물러서는 게 올바른 판단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게 된다면 왠지 영영 선우약가를 밀어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쩐다.
고민에 빠져 있던 막능제는 화월각주와 월영련의 이름을 떠올렸다.
케케묵은 강호의 기득권 세력을 무너트리기 위해 천하오주를 노리고 있다며 협력을 요구한 그들이었다.
장담까지 했으니 지금쯤 백의문주를 처리했을 테고, 태산파가 섬서에 들어섰다는 행보 역시 주시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선우약가를 몰아내자는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대응책 역시 함께 강구하는 게 옳았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
“알겠습니다.”
막능제와 서량은 옅은 한숨과 함께 선우약가의 장원이 있는 방향을 주시했다.
***
“아니, 장문인!”
선우약가주 선우청이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오랜만이오, 천의.”
“예. 강녕하셨습니까?”
선우약가의 장원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다름 아닌 동악검선과 태산파의 제자들.
그중에는 태산삼검의 첫째인 담자명과 둘째인 담해상도 함께였다.
선우청의 뒤편에서 두 사람을 알아본 선우유란 역시 환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반겼다.
일전에 금월보의 계략을 저지하고 동악검선의 병세를 치료하면서 좋은 인연을 맺었던 관계인 만큼 서로 반가움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선우약가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소식은 일찍이 전해 들었지만, 여러 사정 덕에 이제야 찾아올 수 있었소. 미안하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문인께서 이리 방문해주신 것만으로도 큰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니오. 진작에 찾아와 본문과 본인이 입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게 도리였소만.”
말을 하던 동악검선은 인자한 표정과 함께 선우유란을 바라봤다.
금월보의 계략 속에서 태산파와 자신을 구해낸 건 유진휘와 선우유란. 두 사람이었다.
유진휘가 아니었다면 금월보의 정체와 음모를 파헤칠 수 없었을 테고 선우유란이 아니었다면 마기에 침식됐었던 자신은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 일에 자신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선우약가를 도와주는 건 물론 월영련이라는 세력에 함께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선우약가에 대한 소문이 헛되다는 점 역시 짐작하고 있던 바요. 월영련. 놈들의 계략에 빠진 게 아니오?”
“…맞습니다.”
“본문 역시 마찬가지였지. 그런 본문과 본인을 구해준 게 저 아이와 유씨세가의 소가주. 그 두 사람이고.”
“저 역시 두 아이에게 자세한 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선우청은 잠시 대화를 중단한 뒤 태산파의 제자들을 객청으로 안내한 후 동악검선과 따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청은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은 백의문주로서 움직이고 있는 유진휘가 섬서에 도착한 시점부터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었고 동악검선은 묵묵히 설명을 들으며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설명이 끝났을 때, 동악검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휘. 그 아이가 나섰으니 화선촌 사람들과 묵룡일원공의 비급은 무사히 회수해 오겠구려.”
“하지만 조금 걱정도 됩니다. 월영련 놈들이 대놓고 그 아이를 죽이고자 유인한 만큼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큰 위험?”
순간 동악검선이 껄껄, 하는 대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 안에는 유진휘를 향한 확고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섬서로 향하기 전에 맹주와 총군사. 두 사람과 전갈을 주고받았었소. 섬서의 일과 관련된 소식을 비롯해 진휘.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였지.”
“맹주님과 말입니까?”
“그렇소. 두 사람은 비선당과 천영검대로 하여금 이번 일에 월영련이 개입되어 있다는 증거를 조사하는 중이라고 하더이다. 진휘와 백의문이 나선 건 조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했고. 한데 놀라운 건 진휘가 원로원의 노고수들 밑에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수련과 가르침을 받았다는 거였소. 그 결과가…….”
“결과가……?”
동악검선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태산에서 만났던 유진휘의 무위는 실로 놀라운 수준. 그 나이대에 그러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한데 그때 이후 정천맹에 입맹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아이가 지극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거였지. 그뿐인가? 원로원주. 그 깐깐한 인물이 진휘를 인정했다고 하오. 머지않아 천하제일로 거듭날 재목이라면서.”
“……!”
순간 선우청은 눈을 치뜨고 입까지 쩍 벌리면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원로원주. 그가 누구던가. 검황이라 불리며 추앙받던 전대의 고수가 바로 그였다.
웬만한 재능으로는 자신의 무공을 이어받지 못할 거라고 제자 하나 거두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제 입으로 천하제일을 거론하며 유진휘를 인정했다니.
“허. 그 아이의 무위와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전해 들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하긴.
그 젊은 나이에 백의문을 이끄는 것만 봐도 유진휘가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총관인 공손량. 일장로라던 홍야. 그 밑에 백의검대원들.
그들 역시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었는데 짧은 만남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유진휘를 따르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 화선촌으로 향한 진휘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
“그게 무엇입니까?”
***
다음 날.
늦은 오후쯤에 회담이 열렸다.
경양현에 집결한 섬서 무림 연합회와 태산파의 장문인인 동악검선이 함께인 선우약가 사이에서 벌어진 회담이었다.
먼저 회담을 요청한 건 선우약가 쪽이었고 연합회주인 막능제는 고민 끝에 요청을 받아들였다.
막능제로서는 지금껏 별다른 연락이 없는 화월각주와 월영련으로 인해 딱히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빈 건물의 이층에 하나둘씩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약가 쪽에선 동악검선과 선우청. 그 외에 몇몇 장로급 인사들과 태산파의 일대제자들.
연합회 쪽에서는 막능제와 공동파의 고수들. 그 외에 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는 무가와 문파 중 나름 명망 높은 곳의 문주들과 가주들.
그들이 한데 모이자 묘한 기류가 장내를 뒤덮었다.
태산파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서로 혈전을 벌이고 있었을지도 모를 사이였으니까.
“흠.”
하지만 순간 동악검선에 의해 분위기가 압도되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인 동악검선을 얕볼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일단 순순히 회담 요청을 받아들여 줘서 고맙군.”
막능제를 향한 동악검선의 하대였다.
회주라는 지위에 올라 있는 만큼 불만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막능제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막능제는 동악검선의 하대가 아니라 태산파가 선우약가를 도우려고 하는 부분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일단 저 역시 태산파의 의도가 궁금하여 요청에 응했을 뿐입니다.”
“의도?”
“장문인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선우약가는 무가로 거듭나고자 하는 욕망에 눈이 멀어 마공에 손을 댔습니다. 그것도 무려 천마의 무공이자 정천맹에서 관리하고 있던 비급을 빼내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
“저와 공동파. 그리고 섬서 무림은 그런 선우약가의 죄악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나선 것입니다만. 장문인께선 어째서 선우약가를 도우려고 하시는 겁니까? 설마 오로지 같은 천하오주라는 위명 아래에 놓인 세력을 향한 유대감 때문이라고 한다면, 태산파와 장문인께서는 부디 섬서에서 물러나 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막능제는 자연스럽게 선우약가에 대한 소문을 들먹이면서 동악검선을 몰아붙였다. ‘마공’과 ‘천마’라는 이름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섬서 무림이 선우약가의 반대편에서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된 것도 마교를 향한 증오와 공포심이 기저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거였다.
아무리 태산파라도 그걸 무시하면서까지 선우약가를 도울 수 있겠냐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동악검선이 잠시 입을 다물자 장내의 분위기가 빠르게 연합회 쪽으로 기울었다.
이대로라면 다소 싱겁게 회담이 끝날 기세였다.
그때 침묵에 빠졌던 동악검선이 턱을 쓰다듬으며 좌중을 둘러봤다.
“본인 또한 그 헛된 소문에 대해선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네.”
“…헛된 소문이라뇨?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네. 그 소문이 정녕 진실이라고 밝혀진 겐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선우약가의 둘째가 마공을 익혔고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 장소에서 직접 그 마공을 펼쳐 보이기까지…….”
“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닐세. 선우약가가 제 손으로 정천맹에서 비급을 빼냈다는 게 사실로 밝혀졌냔 말일세.”
“그거야…….”
막능제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거기까진 진실로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선우약가의 둘째가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정황을 토대로 추측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쯤 되자 막능제는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악검선의 분위기로 볼 때 그는 어느 정도 진실을 파악하고 있는 듯싶었다.
어쩌면 월영련에 대해서도…….
‘엇.’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던 막능제는 순간 동악검선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악검선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 덕분이었다. 마치 어느 정도가 아니라 모든 진실을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이어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번 일의 배후에 월영련이라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네. 이 이름을 들어본 이가 분명 이곳에 한 명쯤은 있을 터인데.”
동악검선의 입에서 월영련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면서 막능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