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5장 성명(5)
“이번 일의 배후에 월영련이라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네. 이 이름을 들어본 이가 분명 이곳에 한 명쯤은 있을 터인데.”
동악검선이 월영련을 언급하자 막능제는 속으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니까.
월영련의 이름이 새어 나온 이상 동악검선은 이번 계략의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도 무방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막능제는 일단 모르는 척하며 반문했다.
“월영련?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허무맹랑하다?”
“그렇습니다. 배후라뇨? 장문인께선 지금 그 배후의 세력이 무려 정천맹의 관리하에 놓여 있는 마공의 비급을 빼내 갔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막능제의 말에 연합회 쪽 인물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정파 세력의 연합체가 바로 정천맹이다.
정마대전을 승리함으로써 이제는 천하 무림의 연합체로 발돋움하기까지 한 강호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곳.
그런 정천맹에서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이 비급을 빼내 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동악검선의 말에 연합회 쪽 인물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맹주님께서 직접 인정하신 일이네. 천상비고에서 비급을 빼내 간 건 외부인의 소행이 분명하네. 방금 거론했던 월영련. 그놈들일세.”
다른 누구도 아닌 정천맹주가 직접 시인했다는 말에 막능제조차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동악검선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마 며칠 내로 정천맹에서 성명을 발표할 걸세. 천하오주와 정천맹. 나아가 강호를 노리고 있는 월영련이라는 세력에 대해서.”
정천맹주 독고태문과 총군사 묵가후.
두 사람은 이번 선우약가의 일을 겪으며 결단을 내렸다.
선우약가의 오명을 벗겨내려면 어찌 됐든 이번 일이 월영련의 계략이란 걸 밝혀내야 했기에 더 이상 놈들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군다나 놈들은 계속해서 천하오주와 나머지 정파 세력들 사이를 음해하고자 계략을 꾸며낼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엔 공식적으로 놈들의 존재를 알리고 다시금 정파 세력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야 했다.
정마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 강호에 큰 파란을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합회 쪽 인물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동악검선의 말이 사실이라면 섬서 무림 연합회의 존재 의의가 사라지게 되는 게 아닌가.
마공에 손을 댄 선우약가를 몰아내려고 연합회를 구성했는데, 그게 월영련의 계략이었다고 하니.
그때. 막능제가 탁자를 쾅, 내려쳤다.
“장문인께선 그 말을 증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증명이라.”
“그렇습니다. 단순히 선우약가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 아닌가 여쭙는 겁니다.”
“월영련의 존재를 부정하는 겐가?”
“느닷없이 강호를 노리는 세력이라니. 저로선 믿기 힘든 얘깁니다. 정천맹에서 비급을 빼내 갈 능력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놈들이라는 뜻인데, 그걸 이제야 밝히는 이유 또한 이해되지 않으며…….”
막능제가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순간 동악검선에게서 무거운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공기마저 짓누르는 압박감과 그 안에 은은히 퍼져있는 살기가 장내의 모든 인물을 오싹하게 할 정도였다.
그 기세는 천천히 한 사람을 향해 집중됐다.
“공동파의 장문인이자 섬서 무림 연합회를 이끄는 칠성검 막능제.”
“…….”
“네놈은 지금 본인과 태산파. 나아가 정천맹주까지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게 무슨…….”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주마. 네놈은 정녕 월영련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나?”
동악검선이 차갑게 가라앉을 얼굴로 물었고, 막능제는 기세에 짓눌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끝끝내 부정했다.
“어, 없습니다.”
***
번쩍!
한줄기 섬광이 장내를 반으로 갈랐다.
어느새 뽑았는지도 모를 검 한 자루가 동악검선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동시에 섬광의 궤적에 걸린 탁자 역시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그 궤적은 정확히 막능제의 발끝에서 멈추어 섰다. 조금 더 길었다면 막능제의 전신 또한 반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막능제는 입술이 바싹 마른 채 동악검선을 쳐다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장문인.”
“참으로 후안무치한 놈이로고. 이런 놈이 섬서 무림을 이끌고 있다니…….”
“회담 자리에서 계속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희 역시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월영련의 존재가 밝혀진 이상 회담의 의미는 사라졌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동악검선을 처리하고 그대로 선우약가까지 진격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막능제가 막 검을 뽑으며 연합회의 모든 무인들을 불러들이려고 할 때였다.
콰앙!
건물 일층의 입구.
회담이 열리고 있는 만큼 굳게 닫혀 있는 정문이 대번에 박살 났다.
이어 모든 이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홀연히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고.
“백, 백의문주?”
막능제는 백색 가면을 쓰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내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막능제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조소와 함께 놈을 응시하다가 먼저 선우약가 쪽 인물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중에는 역시나 동악검선을 향한 반가움이 우선이었다.
“직접 섬서까지 나서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르신.”
“당연히 와야지. 본문을 돌본다고 그 시기가 늦어져 아쉬울 따름이야. 그 때문에 네가 고생하지 않았느냐.”
“고생은요.”
동악검선과 회포를 푼 뒤엔 선우청과 선우약가의 인물들을 바라봤다.
내가 돌아왔다는 건 화선촌의 일이 잘 해결됐다는 뜻이나 다름없다는 듯 그들은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그중 선우청이 내 앞으로 다가섰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본가를 대표해 네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마.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게야?”
선우청은 내 두 손을 맞잡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동시에 눈짓으로 이리저리 내 몸을 살폈다.
천의라는 명성답게 그는 내 등짝의 상처를 한눈에 알아봤다.
나는 덤덤히 별거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따위 상처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나는 선우약가 쪽 인물들을 뒤로한 채 막능제를 비롯한 연합회의 인물들을 바라봤다.
다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채였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네놈이 연합회주라지?”
막능제를 쏘아보자 곳곳에서 노기 어린 일갈이 터져 나왔다.
“감히 이 자리가 어디라고!”
“연합회주께 그 무슨 돼먹지 못한 태도냐!”
놈들로서는 연합회주인 막능제와 맞먹으려 하는 내 태도가 건방져 보일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내게는 막능제가 월영련. 정확히는 화월각주와 손잡은 잡아 족쳐야 할 개새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해서 나는 막능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표정을 보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네. 왜 그럴까?”
“그게… 무슨 소리냐?”
“발뺌하지 말고 말해봐. 버러지 같은 새끼야.”
채채챙!
거리를 좁히며 욕설까지 내뱉자 연합회 쪽 인물들의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들은 검을 뽑아들기만 할 뿐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내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동악검선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나 역시 기세를 피워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영련. 화월각주. 진짜 몰라?”
“…모른다.”
막능제가 여전히 뻔뻔함을 유지하자 나는 피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근데 화월각주. 그 새끼는 널 안다는데. 그 새끼가 나를 처리하는 사이에 네놈은 연합회를 이끌고 선우약가를 공격하려 했다고 하더군.”
“무, 무슨!”
화월각주가 진실을 털어놓았다는 말에 막능제는 눈을 치떴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었다.
“홍 영감.”
내가 부르자 쾅! 소리와 함께 건물 지붕을 부수고 들어온 홍야가 이층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자마자 막능제가 기겁한 나머지 균형을 잃고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홍야의 손에는 의식을 잃은 채 제압된 화월각주가 붙들려 있는 채였다.
***
화월각주를 시작으로 놈의 품속에서 찾아낸 묵룡일원공의 비급과 인질로 잡혔었다가 무사히 화선촌에서 벗어난 감상중 그리고 촌장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월영련의 존재는 물론 막능제가 놈들과 손을 잡았다는 걸 증명할 증거와 증인이 한자리에 모인 순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천영검대를 이끄는 심성결(沈聖潔)이라고 하오. 맹주님의 명령으로 이번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있었소.”
내가 섬서에 도착해 섬서 무림 연합회를 주춤하게 만들고 화선촌의 일을 해결하는 사이에 천영검대는 비선당의 조력과 함께 무사히 조사를 끝마쳤다.
천영검대로 인해 막능제와 화월각주가 주고받았던 서찰이 발견됐고 더불어 공동파가 월영련에게 여러 재물을 원조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재물은 섬서 무림 연합회를 구성하는 밑천으로 사용됐다.
나아가 월영련 소속으로 추정되는 한 단체가 섬서 전역에 선우약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정황까지 확보했다.
“이, 이게 대체……. 아니오! 나는 놈들이 월영련이란 사실도 몰랐고 공동파는 그저 섬서 무림의 안정을 위해…….”
모든 진실이, 모두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자 막능제는 되는 대로 지껄이며 결백을 주장했다.
그런 막능제를 노려보는 연합회 쪽 인물들은 저마다 탄식과 함께 경악하고 분노했으며 놀라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감쪽같이 막능제에게 속아 넘어가 연합회에 가입하여 죄 없는 선우약가를 향해 칼을 뽑아 든 상황이었으니까.
다행히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해결됐다고는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섬서 무림은 강호에서 입지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음모요! 본인과 공동파 역시 월영련의 음모에 빠진 것뿐이외다! 이건 정말…….”
뻐억!
나는 상황을 모면하고자 연신 입을 놀려대는 막능제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커억!”
깊게 함몰된 안면을 부여잡고 쓰러진 막능제의 양손에서 핏물과 부러진 이 몇 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심성결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 뵙겠소. 천영검대주요.”
***
영웅건 위로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 선해 보이는 인상 속에 담긴 진중한 눈빛. 대장부답게 솟아오른 태양혈.
천영검대주 심성결에 대한 첫인상은 나지막한 감탄이었다.
정천맹주인 독고태문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니만큼 일견하기에도 그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목소리에서부터 묻어나오는 정천맹을 향한 충성심과 정의감 가득한 올곧은 심성이었다.
‘천영검대주.’
옛 천영검대주의 시선으로 봤을 때 심성결은 나보다 훨씬 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임은 분명했다.
내가 죽기 직전엔 소이겸에게 천영검대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소이겸 역시 물러나게 되면서 지금껏 조금이나마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 미련과 아쉬움을 심성결 덕분에 쉬이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지금은 백의문주로서 인사드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천영검대주인 만큼 내가 유진휘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을 테지. 내민 손을 맞잡자 심성결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님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소. 맹주님과 총군사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거외다.”
“제가 아니라 대주님과 천영검대. 섬서까지 나서 주신 동악검선 어르신. 그리고 태산파의 제자들 덕분이겠지요.”
짧게나마 인사와 서로의 수고를 치하한 뒤 우리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섬서 무림 연합회주 막능제와 놈과 연관된 인물들을 정천맹 본단으로 이송키로 했고 공동파를 비롯한 연합회 소속의 무가와 문파들에 대한 처벌은 이후 맹주인 독고태문이 직접 결정하게 될 듯싶었다.
당장 중요한 건 그들보다 월영련이었으니까.
나는 화월각주와 묵룡일원공의 비급 역시 심성결에게 인계했다.
“놈에게서 월영련에 대한 정보를 제법 캐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구려. 정말 큰일을 해주셨소.”
“이놈 말고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어쩌면 그 인물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한 명 더라면……?”
화월각주와 함께 사로잡은, 자신의 정체를 수월림주라 밝힌 여인.
정천맹에서조차 아직도 알아내지 못한 검신 영감의 행방을 그녀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