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5장 성명(6)
“이 여인이 전대맹주님의 행적을?”
임시로 선우약가의 장원 지하에 가둬둔 여인의 정체가 수월림주였다.
나와 동악검선. 선우청과 심성결까지. 우리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수월림주를 바라봤다.
월영련주가 전대맹주인 검신 백도천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니, 수월림주가 확실히 검신 행적을 찾아냈다면 꽤 급박한 상황.
그리고 내가 심문을 통해 정보를 캐낸 결과는 그 급박한 상황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거였다.
“금월보주, 화월각주, 수월림주. 놈들은 저마다의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의 임무는 전대맹주님의 행적을 좇는 것이었고 그 임무를 완료해 화월각주가 있는 섬서로 지원을 나왔다더군요.”
“그 말은 지금 전대맹주님이 위험하다는 말이 아니더냐?”
“…어쩌면 지금쯤 월영련주와 전대맹주께서 마주쳤을지도 모르죠.”
맹주직에서 물러난 뒤 은퇴를 결심했다고 하지만 정파 무인들은 여전히 검신 백도천을 지주로 여기고 있었다.
천하제일검. 어쩌면 천하제일인.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정파 세력은 든든한 후광을 지닌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언제고 정마대전과 같은 강호의 운명이 달린 일이 벌어졌을 때 최후엔 검신이 있다는 든든한 신뢰와 의지로 맞설 수 있을 터.
그걸 알기에 월영련주는 먼저 그 버팀목을 깨부수려고 하는 것이다.
선우약가의 오명을 완전히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월영련에 대한 성명을 발표해야 할 텐데.
“만약 그 시기에 맞춰 전대맹주님께서 월영련주에게 당하기라도 한…….”
“그럴 리 없다!”
순간 동악검선이 진중한 음성으로 내 말을 끊었다. 그의 표정은 검신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경외심으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나 역시 검신 영감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는 없겠죠.”
“그래. 그럴 리 없지. 감히 어느 누가 그분을 해할 수 있단 말이냐.”
동악검선의 말대로 지금의 나조차 검신 영감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전생의 무공을 회복했고, 다시 그다음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검신 영감 역시 과거보다 더 강해져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건 월영련주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일전에 그와 마주쳤을 때 느낀 바로 그의 무위는 지금의 나와 거의 호각.
누가 더 앞서는지는 겨뤄봐야 알겠으나 객관적인 평가로는 그 정도였다.
그런 만큼 월영련주 역시 쉽사리 검신 영감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혼자서 나서지 않을 때였다.
“월영련주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입니다. 또 월영련엔 저희가 모르는 고수들도 있을 테고, 그런 놈들과 함께 나선다면 확실히 위험한 상황임은 분명합니다.”
내가 직접 상대해 봤던 금월보주, 화월각주, 수월림주. 그들은 분명 범상치 않은 고수들이었다.
특히나 화월각주와 수월림주의 합공엔 잠시나마 애를 먹기도 했다. 월영련주 곁에 그만한 고수가 함께 붙어 있다면 검신 영감 역시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전대맹주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모두의 의문을 대표해 동악검선이 물었다. 나는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수월림주를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요녕. 요녕입니다.”
***
요동제일산(遼東 第一山), 천산.
수월림주에게 검신 영감의 정확한 위치를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글을 썼다.
“지독하군.”
선우청은 붓을 쥐고 있는 수월림주의 입가를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복면을 벗은 그녀는 혀가 반쯤 잘려 나가 말을 할 수 없었고 입꼬리 위로 길쭉한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나 붙잡혔을 때를 대비한 건가 싶었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순순히 질문에 답을 해주는 상황이었다.
“반항도 없이 정보를 털어놓는 이유는? 살고자 하기 위함인가?”
의아함에 묻자 수월림주의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이어 그녀의 붓이 다시 움직였다.
‘내가 죽든 살든, 정보를 털어놓든 말든 대계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선우약가를 몰아내려고 했던 네놈들의 계략은 실패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 성공했다면 일이 수월해졌을 테고, 실패했다고 해도 큰 영향은 없어.’
“월영련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가 보군.”
내가 조소를 짓자, 그녀 역시 찢어진 입꼬리를 더욱 말아 올렸다.
‘월영련이 아니다. 월영련주. 그분을 향한 믿음이다. 그분 자체가 바로 월영련이니까.’
“월영련주? 강하다는 건 알지. 짧게나마 검을 부딪쳐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놈이 월영련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백의문주라고 했지?’
“맞다. 그런데?”
‘네놈은 강하다. 어쩌면 련주님만큼이나 강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놈은 련주님을 죽일 수 없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지?”
‘네놈뿐만 아니라 검신 백도천. 아니, 누구도 그분을 죽일 수 없다. 애초에 그분은… 죽지 않는다.’
나와 함께 수월림주의 글을 읽어 내려가던 동악검선이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향한 신뢰. 수월림주가 내보인 그 신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동악검선은 눈빛에 노기를 띠었다.
선우청과 심성결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동시에 그저 월영련주가 그 정도의 신뢰를 받을 만큼 범상치 않은 인물이겠구나, 라고 판단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나는 수월림주가 말하는 의미를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죽지 않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무한한 삶을 뜻하는 건가?”
내가 덤덤히 말하자 순간 수월림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걸 긍정의 침묵으로 받아들인 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기는 했다. 다만 수월림주의 말대로라면 단순히 오래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삶 자체가 무한히 지속된다는 뜻이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
“소인은 곧장 맹으로 복귀하겠소. 맹주님과 총군사께 보고를 올려야 하는 만큼 이 여인도 함께 데려가겠소이다.”
천영검대주 심성결은 사지가 속박된 수월림주의 수혈을 짚어 잠재운 뒤 옆구리에 둘러멨다.
월영련주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 더 파악할 수 있었던 만큼 하루라도 빨리 이 사실을 맹주에게 알리고 놈을 추격하기 위해서였다.
“저도 며칠 내로 복귀하겠습니다.”
나는 자리를 떠나는 심성결을 짧게 배웅한 후 선우약가에서 제공해준 거처에서 쉬고 있을 백의문의 인원들을 찾았다.
내가 화선촌에 가 있는 사이, 그들은 공손량의 책략을 통해 섬서 무림 연합회의 진격을 늦추었다고 들었다.
그에 맞춰 동악검선과 태산파의 제자들이 등장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회담을 열었으며 나와 심성결이 확보한 증거와 증인으로 놈들을 완벽히 저지할 수 있었다.
“다들 고생했다.”
“고생이라니요.”
모든 인원이 모인 자리에서 노고를 치하하자 공송량은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뒤편에 서 있던 홍야와 이자청, 그리고 백의검대원들 역시 공손량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한 게 뭐가 있나? 듣자 하니 문주께선 화선촌을 장악했던 월영련의 두 고수와 이백에 달하는 무인들을 상대했다고 하던데. 그에 비하면…….”
홍야는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검을 쓰다듬었다. 정파 세력을 상대한다고 손속에 제한을 둬야 했던 만큼 그로서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홍야의 말에 이자청과 백의검대원들이 깜짝 놀랐다.
“정말입니까? 이백 명이요? 이십 명 아니고?”
“에이. 그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는 거겠죠. 어떻게 사람이 혼자서 이백 명의 무인을 상대합니까?”
“그렇긴 해.”
녀석들은 저마다 손을 내저으며 소문은 원래 부풀려지기 마련이라는 듯 웃어댔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웃다가 슬쩍 검을 뽑았다.
“못 믿겠으면 오랜만에 비무나 한번 해볼까?”
내가 천천히 기세를 피워 올리자 순간 이자청이 백의검대원 하나의 머리를 퍽 하고 후려갈겼다.
“이 새끼야. 문주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어디서 의심이야, 의심은?”
“아니, 의심은 방금 대주님이 먼저…….”
“닥쳐. 좀.”
그렇게 녀석들과 한바탕 웃으며 떠들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있는 건물의 내원 안으로 선우청과 선우유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크고 작은 목함을 품속에 가득 담고 있었다. 공손량과 이자청은 앞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이하며 목함을 건네받았다.
차곡차곡 바닥에 쌓이는 목함의 숫자는 정확히 마흔세 개. 백의문원들의 숫자와 일치했다.
“이게 뭡니까, 가주님?”
내가 묻자 선우청은 미소와 함께 우리를 한차례 둘러봤다.
“본가의 은인들에게 건네는 보답이라네.”
“이러지 않으셔도…….”
“이래야 하네. 자네와 백의문이 아니었다면 본가가 어찌 무사했겠는가? 또 고작 이깟 걸로 어찌 그 은혜를 갚을 수 있겠나? 하지만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게 이것들뿐이라 어쩔 수 없었네.”
진심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선우청의 음성에 백의문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감격했다.
천하오주인 선우약가. 그런 가문의 주인인 천의 선우청. 그가 친히 허리까지 숙여가며 감사를 표하고 있었으니까.
“아이고.”
이자청은 아예 바닥에 절까지 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 장내에 한바탕 대소가 터져 나왔다.
이어 선우유란은 목함 하나를 열었고 동시에 인원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자랑은 아니지만, 본가는 의가인 만큼 보유하고 있는 영약의 종류도 다양하고 양도 많아요. 이것들은 그중에서도 엄벌하여 가져온…….”
“여, 영약!”
“헉!”
“저게 다 영약이라고?”
선우유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자청과 백의검대원들이 주둥이를 부여잡고 경악했다.
그녀 말대로 숫자도 숫자이거니와 영약의 품질이 매우 뛰어나 보였다.
“이, 이걸 정말 저희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이자청은 눈을 반짝이면서 목함을 한 번. 나를 한 번. 마지막으로 선우청을 한 번 쳐다봤고.
“물론이네. 또한.”
선우청은 대답과 함께 품속에서 선학이 음각된 명패 하나를 꺼내 보였다.
천학패(天鶴牌).
천학패만 있으면 신분과 지위 등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고 가주를 비롯한 선우약가가 제공하는 최상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오랜 과거부터 존재하던 선우약가의 맹세이자 규율 중 하나였다.
선우청은 그 천학패를 공손량에게 건넸다.
단순히 백의문의 인원들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치료해 주겠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천학패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인계할 수 있었으니까.
즉, 선우청은 지금 백의문을 선우약가의 맹우로서 대우하고 신뢰하겠다는 뜻을 표출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뒷골목 사파인들의 집합소였던 백의문이 천하오주 중 하나의 세력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공손량과 문도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
이후 며칠간 나와 백의문은 선우약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영약들을 복용했다.
“이, 이게 영약의 효과구나!”
“내공이 넘치다 못해 흐릅니다, 흘러!”
생전 처음으로 영약을 복용하게 된 백의검대원들은 이리저리 날뛰었다. 저들끼리 눈만 마주치면 비무를 벌이며 늘어난 내공을 과시했다.
공손량과 홍야는 내 옆에서 녀석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내공이기도 했지요.”
공손량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홍야의 가르침을 통해 녀석들은 실력이 크게 늘었다.
이자청은 어엿한 절정고수,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했고 백의검대원들도 하나둘 일류의 경지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다만 발목을 잡고 있던 게 부족한 내공이었다.
뒷골목 출신으로 익힌 심법이 조악해 내공의 양이 다른 일류 무인들보다 뒤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그게 채워졌으니 녀석들은 보다 더욱 날아오를 게 분명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일도 마무리됐고 고생에 대한 보답도 충분히 받았다. 내일쯤 정천맹에서 월영련에 대한 성명을 내걸 거라고도 하는 만큼 나와 백의문 역시 다음을 준비해야 할 시기였다.
그렇게 다음 날에 백의문은 산서로. 나는 정천맹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