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6장 전조(2)
진천문.
천하오주의 세력 중 하나로 청해 땅에서 오랜 세월 청해제일문으로 자리매김한 문파였다.
마교의 본거지가 있던 신강과 근접해 있어 정마대전 당시 최전선에서 혈전을 벌인 문파이기도 했다.
그만큼 피해가 막심했지만, 그런데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진천문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묵가후는 정보 세력인 비선당을 통해 한 세력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일월성.
“화월각주, 수월림주. 두 사람 모두 일월성주는 월영련주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녔다고 확신하더군.”
련주와 비슷한 실력이면 일월성주 역시 지극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인물이 지금껏 숨어 있다가 월영련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자마자 이빨을 드러냈다. 게다가 진천문으로 향하는 움직임마저 들켜도 상관없다는 듯 당당했다.
어떤 대비를 하든 승리를 자신한다는 듯.
“진천문주가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라고는 하지만 만약 일월성주라는 인물이 정말 그 정도로 강하다면 진천문만으로는 놈들을 막아낼 수 없을 걸세.”
묵가후는 일월성의 움직임을 파악하자마자 진천문 쪽에도 정보를 전해주었다고 했다. 그런 만큼 일월성의 습격에 대해 대비하고 있을 테지만 묵가후는 그것만으로는 불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제가 청해로 가는 겁니까?”
내가 묻자 묵가후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게 고민이었네. 자네를 청해로 보내야 하는지. 요동으로 보내야 하는지.”
검신 영감을 노리는 월영련주가 요동. 진천문을 노리는 일월성주가 청해.
청해성과 요동성은 중원의 끝과 끝인 정반대의 지역으로 거리가 멀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월영련주와 일월성주의 움직임이 겹쳐 아무리 나라도 두 지역을 왕래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때, 독고태문이 결단을 내렸다.
“검신.”
전대맹주인 백도천의 별호를 입에 담는 그의 목소리엔 일전의 동악검선처럼 신뢰가 가득했다.
“검신이란 별호에 담긴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월영련주가 아무리 강해도 전대맹주님을 당해낼 순 없을 것이야. 거기다 천영검대와 천군지사대까지. 그들을 믿게.”
***
“복귀했구나!”
맹주전을 벗어나 복룡각으로 돌아오자 일조대 부조장인 고주양이 나를 반겼다.
내가 돌아왔다는 말에 조장인 손유수와 조원들까지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내가 맹주의 특명으로 섬서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복룡추호대주인 설표를 제외하면 내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그저 선우약가를 돕는 역할 정도였겠거니 여기는 듯싶었다.
동시에 특명인 만큼 그들은 내 임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캐묻지 않았다.
대신.
“혹시 섬서에서 백의문주라는 인물을 만나봤어?”
고주양의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인원을 둘러보자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백의문주는 왜요?”
“왜라니. 최근 엄청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수잖아. 월영련의 무인들과 홀로 맞서 싸워 간부급에 해당하는 고수를 둘이나 생포했다며?”
내가 맹으로 복귀하는 사이 백의문주가 화선촌에서 벌인 일까지 소문으로 퍼져나가며 명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듯 보였다.
하긴 그간의 행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면…….
“만나봤어요. 엄청난 고수던데요.”
내가 피식 웃자 고주양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얼마나 강한데? 너보다 강하냐? 얘기는 나눠봤고? 왜 가면으로 정체를 숨기고 다닌대?”
정파 세력에 등장한 신진 고수.
산서와 섬서에서 명성을 떨친 데다가 가면으로 정체를 숨긴 신비로움에 강호의 젊은 고수들이 백의문주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그 젊은 고수들에 복룡추호대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는지 그들은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글쎄요. 저보다 강한지는 겨뤄봐야 알 것 같은데.”
“헉. 그 정도라고?”
내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몸소 체감했던 그들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런 그들과 잠시 담소를 나누는 와중이었다.
“오랜만이로군.”
익숙한 목소리가 복룡각의 입구에서부터 들려왔다.
***
“집형당주님을 뵙습니다!”
손유수와 고주양을 비롯한 조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덤덤히 조원들이 인사를 올리고 있는 인물을 바라봤다.
태산검존 곽명.
일전에 독고태문과 묵가후에게 공석인 집형당주의 자리를 곽명에게 맡기면 어떻겠냐며 추천했었는데, 내가 섬서에 다녀오는 사이에 그 일이 추진된 것 같았다.
섬서에서 함께했던 동악검선이 별다른 얘기를 해주지 않아서 지금껏 모르고 있었는데.
정천맹에서 그를 다시 보게 되니 적잖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검을 수련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태산검귀라고도 불리던 그가 입맹을 결심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놀랐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한데 그 순간, 나를 응시하던 곽명의 시선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어.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검날이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빠르다 못해 섬전 같은 기습이었지만 나는 덤덤히 한 발 물러나 회피했다. 뒤따라 애꿎은 허공만 가른 검을 쥐고 있는 곽명이 입맛을 다시는 게 보였다.
“못 본 사이에 실력이 크게 늘었군?”
“곽 대협, 아니, 집형당주님 역시도 깨달음이 있으셨나 봅니다.”
검밖에 모르는 인물이니 반가움을 표출하는 방식도 특별하구나 싶어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반대로 조원들은 갑작스러운 칼부림에 깜짝 놀라며 곽명이 왜 태산검귀라 불리는지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됐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릉.
잠시 더 눈빛을 교환한 끝에 곽명은 검을 집어넣었다.
이어 헛기침과 함께 그가 말을 이었다.
“나 말고도 너를 기다리던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한 명 더?
누구지, 라는 짧은 의문과 설마, 하는 마음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런 내 시선의 끝에 곽명보다 훨씬 더 반가운 인물이 복룡각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소이겸.”
얼굴을 보자마자 이름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왔다.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는 듯한 친숙함이 담긴 목소리여서 주변의 인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소이겸 역시도 마찬가지였는지 내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아나?”
“…….”
알지. 잘 알지.
내가 천우혁이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나는 간신히 참아낸 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천영검대주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전 천영검대주라는 말에 소이겸 역시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움. 반가움. 그 외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나도 총군사께 네 얘기를 전해 들었다. 천우혁 대주님의 검을 이은 아이가 복룡추호대에 있다고. 그러니 나보고 복귀하여 한번 만나보라고 하시더군.”
손유수가 이끄는 복룡추호대의 일조. 그리고 옛 천영검대원들로 새로이 구성된 복룡추호대 이조.
묵가후는 물론 설표와 곽명까지. 그 이조를 소이겸이 이끌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설득하고자 전 천영검대주의 무공을 이은 유진휘라는 존재를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그 언급은 매우 유효했던 듯싶었다.
“잠시 둘이서 얘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소이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어 둘만 남게 되자 소이겸은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무인이라면 자고로 검으로 이야길 나눠야겠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피식하면서 그를 뒤따랐다.
그래. 오랜만에 이야기 좀 나눠보자.
***
텅 빈 연무장 중앙에서 쇳소리와 굉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카가가강!
무구일검 소이겸.
그는 예전 모습 그대로 내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과거에도 이미 인극의 경지에 도달해 있던 소이겸이다. 그런 소이겸에게 맞서 나는 가감 없이 본 실력을 발휘했다.
천일백야검법의 전반부 초식부터 중반부 초식까지 차례대로 펼쳐내자 연무장 주변이 금세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콰콰쾅!
곳곳이 터져나가면서 흙먼지와 돌무더기가 허공을 뒤덮었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소이겸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크윽!”
초장부터 최선을 다하는 만큼 그는 내 기세와 검에 압도되어 점차 밀려났다.
그런데도 소이겸의 표정에서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아직… 대주님의 검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순간 흙먼지 사이로 한줄기 섬광이 불쑥 튀어나왔다.
소이겸의 검을 대표하는 일점필살(一點必殺)의 초식 중 하나.
그 초식은 단단하기로는 비할 데 없는 만년한철. 그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성문마저 깨부술 정도였다.
이 초식 하나로 과거 마교의 장로 하나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심장을 꿰뚫렸었다.
위력도 위력인데 속도마저 빠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쩌적!
나는 검강을 덧씌운 검을 비스듬히 세워 찌르기를 흘려보낸 뒤 몸을 휘돌렸다. 회전하는 몸을 따라 내 검 역시 자연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촤악!
순간 소이겸의 가슴께가 갈라지며 핏물이 터져 나왔고 그가 비틀거리는 틈에 목에다 검날을 가져다 댔다.
“위력과 속도에 치중한 나머지 초식이 실패했을 때 뒤따르는 위험이 크니, 그 위험을 지우는 게 과제다.”
내가 나직이 읊조리자 소이겸은 눈을 치떴다.
“라고, 천우혁 대주님께서 조언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
소이겸은 잠시 침묵하다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지. 그랬는데 대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내 검 역시 멈춰 서 있었다. 그분께서 이 꼴을 보면 뒤통수를 후려치셨을 텐데.”
오.
지금 내 심정이 바로 그랬다. 내 죽음이 뭐라고 이런 꼴이라니.
나는 검을 회수하면서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은 소이겸을 바라봤다.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복룡추호대에서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가 연무장 주변으로 옛 천영검대원들, 아니, 지금은 복룡추호대의 이조 대원들이 된 녀석들이 몰려와 있는 상태였다.
내 시선을 따라 소이겸 역시 그들을 둘러봤다.
“그래야지. 다시…….”
다시금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에 나는 감회가 새로움을 느꼈다.
비록 유진휘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임에도 내 시선은 천우혁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다음 날.
집형당주인 곽명과 복룡추호대주인 설표가 상단에 선 채로 나와 복룡추호대원들을 바라봤다.
일조와 이조가 전부이나 전력 면에서는 한천자가 이끌었던 복룡추호대를 상회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옛 천영검대원들의 합류는 설표에게도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그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는지 설표는 환한 표정으로 복룡추호대에게 떨어진 임무를 설명해주었다.
“진천문이 있는 청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정천맹이 성명을 발표함에 따라 더 이상 음지에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월영련 놈들은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모양이다.”
이미 맹 내부에서는 월영련과의 전쟁을 준비하고자 전시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그 서막이 오를 장소는 청해.
“복룡추호대의 존재 의의는 내외적인 악인 척결. 그리고 지금은, 외부에서 강호를 위협하는 월영련을 처단해야 할 시기다.”
“예-!”
“우리는 청해의 진천문으로 향한다. 진천문을 도와 일월성의 습격을 막고 강호를 집어삼키려는 월영련 놈들의 의지를 깨부순다.”
맹주의 결단대로 나와 복룡추호대가 공식적인 임무와 함께 진천문이 있는 청해에 파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