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7장 양방(1)
“이번에도 역시나 비어 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일월성주가 가소롭다는 웃음을 흘렸다. 천하오주의 하나인 진천문을 처리하겠다는 의지로 청해에 진입한 지 열흘.
진천문이 있는 황아산으로 향하며 그 경로에 있는 정파 세력의 문파나 무가 역시 차례차례 쓸어버리는 와중이었다.
꽤 오랜 시간 숨죽이고만 있어야 했던 지루함을 달래줄 여흥이었다.
한데 그 여흥이 달랑 두 개의 문파와 하나의 무가를 멸문시키는 걸로 끝나고 말았다.
네 번째 먹잇감을 찾았을 때, 그 문파의 장원은 인기척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이후도 역시나 마찬가지.
아직 자신에게 제대로 대항이나 한번 할 수 있는 무인조차 만나지 못했는데 들르는 곳마다 놈들은 야반도주라도 한 듯 몸을 내뺀 상태였다.
“청해엔 진천문 말고는 죄다 나약한 놈들뿐이로군.”
일월성주는 텅 비어 있는 장원의 건물을 주시하다가 아쉬움을 토로하듯 슬쩍 검을 털어냈다.
그 궤적을 따라 터져 나온 한줄기 섬광이 건물을 가르고 지나갔다.
동시에.
쾅! 콰과광!
장원의 건물들이 전부 반듯하게 쪼개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쯤, 척후병으로 보내놓았던 수하가 하나둘씩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조사한 바로, 저희 경로에 놓여 있는 문파와 무가는 전부 황아산 쪽으로 후퇴한 듯 보입니다.”
“진천문이 불러들인 건가?”
“예. 진천문의 영향력이 청해에서 상당하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청해 무림을 장악해 두어 유사시엔 재빠른 대응이 가능하도록 구심점이 되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청해의 방식인가 보군.”
먼 과거부터 정마대전에 이르기까지.
청해는 수도 없이 마교의 침공을 막아낸 전적이 있는 지역이었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이 진천문과 진천문을 중심으로 한 결집력.
“또한 황하산 일대에 진천문을 중심으로 수비진이 겹겹이 펼쳐져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후퇴가 아니라 싸우고자 하는 후퇴였나.”
텅 빈 장원으로 인해 실망했던 일월성주가 눈을 빛내며 황아산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
“진법이요?”
고주양이 놀랐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부조장인 그를 비롯해 복룡추호대 일조대는 현재 황아산 서쪽 기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이끄는 조장 손유수가 앞장선 채 이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아산 전체를 아우르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는 모양이야. 진천문의 오랜 역사와 함께 황아산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준 진법이라던데.”
산 전체를 아우른다는 말에 어느새 모두가 고주양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로서는 이 정도의 대규모 기문진을 처음 겪어보는 걸 테니 당연했다.
정천맹 본단에도 수비를 위한 기문진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를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과 인력이 소모됐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데 산 전체를 아우를 정도면.
“진천문에 돈이 많나 봅니다.”
고주양의 말에 모두가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나 역시 고주양의 단순 무식한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전생에 한 번 이 진법을 겪어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천영검대주로서 진천문과 함께 마교를 상대했을 당시 황아산의 진법은 적잖은 마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단순히 적들을 함정에 빠트리는 진법부터,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거나 여러 환상이 실체가 되어 피해를 주는 진법 등.
진천문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 오만 가지의 진법이 설치되어 적의 진격을 방해했다.
가까스로 진법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그 뒤엔 아군의 기습이 기다리고 있다.
그 기습을 위해 현재 황아산 사방에 무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소속된 복룡추호대 일조대가 향하는 곳은 서쪽 지역.
그곳엔 청해에서 제법 명성을 떨치고 있는 비화문(飛花門)과 서문세가의(西門世家)의 무인들이 미리 자리 잡고 있었다.
“서문기우(西門奇遇)요.”
“비화문주 빈미려(彬美麗)입니다.”
“복룡추호대 일조대를 이끄는 손유수라고 합니다.”
황아산 서쪽 지역의 책임자는 서문세가주인 서문기우. 나와 조원들, 그리고 비화문은 그를 도와 이곳의 수비를 돕는 역할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복룡추호대원 분들과 함께하게 되어 마음이 든든하오. 진천문이 있는 정상으로 향하는 가장 수월한 길이 이곳 서쪽과 반대편 동쪽 기슭이오. 아마 놈들은 둘 중 하나, 혹은 두 곳으로 나뉘어 진격해 올 게 틀림없으니 긴장을 늦추지 마시오.”
“예.”
“알겠습니다.”
각 전력을 이끄는 세 사람은 서로의 소개와 함께 이후 작전 등을 논의하며 시간을 보냈다.
조원들 역시 비화문과 서문세가의 무인들과 적당히 교류하며 단합심을 끌어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덤덤히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상념에 잠기자 자연스레 도제 오종락과 따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느끼기에 자네는 지극의 경지에 올라 있는 듯 보이는데. 맞나?’
‘예.’
‘허. 동악검선에게 자네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땐 분명 인극 고수라 들었거늘. 그것만으로도 경악했는데 그 짧은 사이에 어느새…….’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아 가능한 거면 세상천지의 무인들은 불운에 휩싸인 이들이란 말인가?’
‘…….’
‘아무튼. 조금 전에 총군사가 서찰 하나를 보내왔네.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군.’
‘저에게 따로 말입니까?’
‘그렇네. 서찰을 먼저…….’
이곳, 서쪽 기슭으로 출발하기 직전 받은 그 서찰엔 월영련의 본단 혹은 최소 일월성의 본진이 십만대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성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일단은 살려 보내란 말씀이시네요.’
‘흠. 일월성주라는 자가 정녕 지극 고수라면 살려 보낸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군. 죽이는 쪽보단 패퇴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말일세.’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경지의 고수가 지극 고수였다. 오종락의 말대로 그런 지극 고수의 목숨을 두고 살려보낸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오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살려 보내겠습니다.’
‘…크하하. 그런가? 아무튼, 그자가 어느 지역으로 산을 오를지 모르는 만큼 나와 자네는 그자를 상대할 만한 여력을 상시 남겨놓아야 하네.’
그 말을 끝으로 오종락은 동쪽 지역을, 나는 서쪽 지역을 경계하며 일월성주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에 따라 복룡추호대 일조대가 지금 내가 있는 기슭으로 배치된 상황이었다.
상념에 잠긴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보길 한참. 어느새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손유수가 내게 한마디를 건넸다.
“좀 쉬어둬. 따로 경계를 서는 이들이 있으니까. 넌 이번 파견의 핵심이잖아?”
“예.”
그녀는 일전에 들었던 도종락의 말을 빌려 히죽거렸고 나는 그녀를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별다른 일없이 이틀 정도가 흘렀다.
하지만 한 시진 간격으로 일월성 놈들이 어디까지 진격해 왔는지 정보가 전해지고 있었기에 긴장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오를 지나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옵니다.”
놈들은 대담하게도 한낮에 황아산을 향한 진격을 시작했다.
제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흐르는지 여태까지의 월영련과는 다르게 음모나 계략 따위는 없었다.
펑! 퍼퍼펑!
오감을 끌어올려 놈들의 기세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던 나보다 한발 늦게, 황아산 위로 여러 발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적이 초입을 지나쳐 조금씩 산을 오르고 있다는 신호였다.
신호탄은 오종락이 있을 동쪽 지역에서도 울려 퍼진 만큼 놈들은 양쪽 모두를 노리고 있는 듯 보였다.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고 대비하시오! 이 밑으로 수십 개의 진법이 펼쳐져 있으니 우리는 진법이 발동되는 위치로 놈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오!”
이 지역의 경계를 책임지는 서문기우의 고함과 함께 전 인원이 각자 무기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눈을 부릅떴다.
곧이어.
꽈르르릉!
저 멀리에서 하나의 진법이 발동하며 절벽 귀퉁이가 무너져 내려 그 밑에 있는 길목을 뒤덮었다.
“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견하기에도 적잖은 인원이 하늘에서 추락한 바위에 깔려 목숨을 잃었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걸 시작으로 산 아래 사방에서 수많은 진동과 굉음이 터져 나왔다.
적들의 거리가 좁혀지면서부터는 진법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치명상을 입어 바닥을 나뒹구는 자들의 모습도 시야에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진법만으로 전황이 우세해지자 아군의 분위기가 크게 달아올랐다.
“놈들이 진법에 빠져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아예 저희가 있는 곳까진 도달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이게 진천문의 대라황산진(大羅黃山陣)!”
황아산 전체를 수호하는 진법인 대라황산진의 위엄에 인원들은 기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차분히 전황을 주시했다.
고작 이 정도일 리가 없었다. 제 발로 당당히 청해까지 진입해 온 놈들이었다. 대라황산진은 분명 대단한 규모의 진법이긴 하나 고작 진법 정도에 놈들의 진격이 막힐 리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지켜보는 와중 순간 오싹한 느낌이 뒷목을 타고 흘렀다.
공포나 불안감보다는 무언가 거북한 느낌에서부터 피어오른 전율이었다.
그런 내 시야에, 저 멀리 진법에 빠져 바닥을 나뒹굴던 적 하나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둥그런 구체에 심지가 달린 그건 한눈에 보기에도…….
“벽력탄?”
내 중얼거림에 옆에 서 있던 손유수와 고주양이 흠칫 놀랐다.
“벽력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
두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꽈-앙!
천둥이 내리꽂히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폭발이 산을 뒤흔들었다. 폭발의 진원지는 진법 내부였으나 충격은 순식간에 외부까지 퍼져나가 그 주변을 휩쓸었다.
“진법 내부에서 벽력탄을 터뜨려 진법을 아예 깨부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산을 올랐던 놈들의 목적도 단지 그게 전부로 보이고요.”
내가 놈들의 의도를 풀어내자 서문기우와 빈미려, 손유수 등이 경악하며 입을 쩍 벌렸다.
“희생도 마다하고 벽력탄을 진법 내부에서?”
“게다가 놈들은 대체 벽력탄을 어디서 구했단 말이오!”
현 강호는 정사를 막론하고 벽력탄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제조법 또한 이미 실전된 지 오래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런 벽력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더군다나 벽력탄을 터트리는 놈들은 제 목숨을 희생해 진법을 깨부수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도 웃는 낯짝으로.
그 모습은 흡사 천마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는 마인들의 그것과 유사했다.
“세뇌라도 당한 건가.”
이번에도 자연스레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모두가 흠칫 놀라며 산 아래를 주시했다. 그곳에선 계속해서 연신 폭발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대론 좀 위험할지도.’
벽력탄의 등장이 단지 진법을 깨부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나, 놈들이 그 이상의 여유분을 가지고 있다면 확실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뭐? 너 미쳤…….”
순간적으로 나를 뜯어말리기 위해 손을 뻗어오는 손유수와 조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훌쩍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