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1장 대산(1)
“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꿈은 아니겠지?”
황아산 서쪽 진영의 책임자인 서문기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비화문주 빈미려 역시 떨리는 눈빛으로 먼 거리의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똑같이 한 사람을 향해 꽂혀있는 상태였다.
일월성의 진격이 대라황산진에 가로막혀 적잖은 숫자가 죽어 나가는 와중, 심상치 않은 폭발이 피어올랐다.
그 거대하고도 연쇄적인 폭발은 대라황산진을 무너트릴 기세여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복룡추호대원 하나가 느닷없이 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복룡추호대의 위세가 높다고는 하나 일개 대원의 돌발적인 행동은 분명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서문기우와 빈미려는 그 사내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복룡추호대 일조대의 조장이라던 여인 역시 기겁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던가.
한데 사내가 모습을 감추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신 들려오던 폭발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폭발이 멈추지 않고 계속 피어올랐다면 머지않아 대라황산진은 분명 무너졌을 터였다.
한데 복룡추호대원 단 한 명이 그 위기를 저지한 것이다.
감탄과 함께 안도하는 것도 잠시. 폭발이 멎자 일월성 진영 쪽에서 범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는 고수 여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은 분명 인극고수, 어쩌면 지극의 경지까지 다다른 고수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놈들의 첫 의도가 벽력탄으로 의심되는 폭발로 대라황산진을 파괴하려 하는 거였다면, 그 의도를 저지한 사내를 처리하고자 나선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서문기우와 빈미려는 즉시 휘하의 무인들을 대동해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려던 순간 사내가 대라황산진 속에서 빠져나와 하늘 높이 치솟는 게 보였다.
사내는 진법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거목 위에 자리를 잡았고 이내 일월성의 여섯 고수와 격돌을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게 그 사내의 마지막일 거라 여겼다.
여섯 명의 고수들은 분명 하나하나가 엄청난 무위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한데 사내는 거목 위에 선 채로, 유유히 놈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여섯 놈 중 하나의 목을 베더니 뒤따라 경악할 만한 위력의 초식을 펼쳐냈다.
멀리서 보기엔 마치 하늘 위에서 태풍이 휘몰아쳐 적들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초식 하나로 사내는 남은 적들을 몰살시켰다.
“저, 저 사내는 대체 누구요?”
“맞아요. 복룡추호대에 저 정도로 엄청난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서문기우와 빈미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손유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저희 일조대의 막내대원입니다.”
***
“진휘야!”
흑웅대주까지 확실하게 처리한 내가 진영으로 돌아오자 손유수와 대원들이 황급히 달라붙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어 손유수는 짐짓 노기 섞인 얼굴로 나를 다그쳤다.
“갑자기 그렇게 막무가내로 뛰쳐나가면…….”
“책망은 나중에요.”
나는 그런 그녀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일단 이거 먼저 챙겨두세요.”
내가 시체 하나의 무복을 벗겨내 대충 만든 보자기를 손유수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적들에게서 회수한 벽력탄이 들어있었다.
이십여 개에 달하는 숫자라 인원들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그, 그게 전부 벽력탄이란 말이야?”
“예. 아마 이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작정하고 나선만큼 놈들에겐 아직 벽력탄이 더 남아있을 수도 있지만, 이 뒤는 조장과 선배님들께 맡기겠습니다.”
“너는?”
뒤를 맡기겠다는 말에 손유수가 내 두 눈을 응시했다. 나 역시 그녀를 마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월성주를 쫓아 동쪽 진영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서쪽 지역의 진격을 지휘하던 이는 흑웅대주. 그런 수장을 잃었으니 적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을 게 틀림없었다.
남아있는 적들은 손유수를 비롯해 서문기우와 빈미려 그리고 그들 휘하의 무인들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듯 보였다.
대라황산진도 아직 나름 건재한 상황이고.
“알겠어. 이곳은 걱정하지 마라.”
“그래. 네 덕분에 위기를 넘겼으니 이후는 우리가 알아서 하마.”
손유수와 고주양이 각자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중 고주양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손길에서 내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조심해라.”
“예. 부조장도요.”
***
황아산 동쪽.
콰콰쾅!
산을 뒤흔드는 폭발과 굉음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그로 인해 동쪽 지역의 진법들은 대다수가 파괴된 상황.
물론 그만큼 일월성 무인들 역시 수많은 피해를 봤다.
“벽력탄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수를…….”
설표는 초토화가 된 산 아래의 구역을 내려다보며 신음을 흘렸다. 복룡추호대주인 그는 이조대를 이끌고 이곳 동쪽 진영에 배치된 상황.
그의 옆으론 소이겸과 함께 여러 문파와 무가의 주인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다시 그 중앙엔 진천문주인 도제 오종락이 자리 잡은 채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는 상태였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섭혼술로 세뇌한 무인들의 희생을 앞세워 진법 내부에서 벽력탄을 터뜨리다니.”
마교의 마인들조차 이런 식으로 공격해온 적은 없었다.
그만큼 월영련이라는 세력의 사상은 위험해 보였다. 수하들을 한낱 소모품 취급하다니.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선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놈들이란 판단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진법이 파괴된 이상, 놈들은 지금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취해올 터.
각 세력의 주인들은 각자 결의를 다잡으며 혈전을 대비했다.
그들을 뒤따르는 무인들 역시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음?”
순간 인원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초토화된 구역을 가로질러 산을 오르기 시작한 인물 때문이었다.
적들이 대거 밀려올 거란 예상과 달리 그 인물은 유유히 혼자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로운 발걸음에 인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것도 잠시.
“저자가…….”
나직이 흘러나온 누군가의 중얼거림은 모든 이들에게 한 명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일월성주.
천하십대고수의 상위권에 속한 이들과 같은 지극 고수라 판단되는 존재.
그 존재감이 단신으로 산을 오르는 일월성주의 무모함을 무마시켰다.
덕분에 일월성주가 그의 용모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인원들은 주춤하며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일월성주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인원들을 마주했다.
“네놈들이 전부 청해를 대표하는 정파의 무인들인가?”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덤덤한 목소리에 실린 내공과 기세는 이미 대다수 인원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 놈씩 덤비든, 한꺼번에 덤비든 상관없으니 얼른 시작하면 좋겠군. 이곳까지 오면서 만난 무인들은 영 변변찮은 놈들 뿐이었기에 실망이 커. 네놈들은 부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자만을 넘어 오만에 가까운 도발에 순간 여기저기서 분노 섞인 살기가 터져 나왔다.
당장 이곳엔 도제 오종락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절대 고수들이 함께하는 상태가 아니던가.
현 강호에서 그들은 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까지 싸잡아 무시하는 일월성주의 발언에 대다수 무인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중에서도 역시나 진천문의 제자들이 가장 분노하고 있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따위 망발을 내뱉느냐!”
일월성주를 향한 일갈과 함께 진천문의 제자 한 명이 자리를 박찼다. 그는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 그대로 일월성주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촤라라락!
동시에 그의 검이 섬광을 흩뿌렸다.
진천문을 대표하는 검법인 진일격천검법(鎭日格天劍法). 그 검법의 진수가 가득 담긴 초식이었다.
“제법이긴 하다만.”
그러나 일월성주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실망한 기색을 표했다.
그런 그의 일검이 사방을 수놓은 섬광을 가로질렀다.
촤악!
동시에 쇄도해 들어갔던 제자는 검을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몸이 양분되어 일월성주를 지나쳤다.
반듯하게 잘려 나간 시체는 자세를 바로잡는 일월성주의 뒤편 바닥을 구르며 선혈을 토해냈다.
“으아아악!”
그 가공할 광경에 진천문의 제자들 여럿이 고함을 내지르며 발작하듯 몸을 날렸다.
나머지 문파와 무가들의 무인들도 일월성주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뒤따르듯 신형을 쏘았다.
순식간에 수십에 달하는 무인들이 일월성주를 중앙에 두고 합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일월성주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어 그의 검이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시뻘건 핏물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푸확!
일검에 한 명씩.
누구는 머리가, 누구는 팔다리가, 누구는 몸통 자체가 잘려 나가 바닥으로 허물어진다.
눈 깜짝할 새에 죽어 나간 무인들의 숫자가 서른을 넘었다.
그런데도 일월성주는 처음 모습 그대로 흐트러짐 없이 검을 휘둘러가고 있었다.
“죽어라-!”
“이 개 같은… 컥!”
단말마와 고성이 뒤엉킨 혈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새 분위기는 일월성주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를 상대하는 무인들의 심중엔 결국 분노 대신 공포가 자리 잡았다.
결국 상황을 지켜보던 설표는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았다.
피해가 더욱 커지기 전에 자신이 복룡추호대 이조대와 함께 놈을 막아서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때.
번쩍!
설표보다 한발 먼저 도를 뽑은 오종락이 천둥처럼 일월성주 앞으로 내려앉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일월성주가 주룩, 뒤로 두어 걸음 밀려났다.
“드디어 납시셨나? 도제여.”
“닥치거라.”
두 사람은 짧은 한마디를 주고받는 걸 시작으로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찔러넣었다.
검강과 도강.
지극 고수와 지극 고수의 충돌.
그 여파로 인해 사방으로 돌풍이 휘몰아쳤다. 벽력탄의 폭발 못지않은 굉음과 충격은 다시금 산을 뒤흔들었다. 그런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은 경악과 함께 꿀꺽,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퍼-억!
“컥!”
어깨가 깊숙이 관통되며 고통을 참아내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이는 다름 아닌 도제 오종락이었다.
어깨뿐만 아니라 전신 곳곳에 깊은 검상이 자리 잡은 상황.
맞은편에서 찔러넣었던 검을 회수하는 일월성주 역시 그 못지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마지막 한 수에서 승부가 갈렸다.
“그래. 본좌는 이런 싸움을 원했다.”
그는 시뻘건 안광과 함께 대소를 터뜨렸다.
전신을 붉게 물들인 상처로 미루어보아 분명 지칠 법도 한 상황인데, 일월성주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기세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세를 바로잡고자 안간힘을 쓰는 오종락을 응시했다.
“이대로 끝내기엔 아쉽지만, 더 싸울 여력이 없어 보이는군.”
“허, 헛소리. 나는 아직…….”
씹어뱉듯 말한 오종락은 끝끝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바로잡긴 했지만 누가 봐도 그의 몸 상태는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 모습이 일월성주를 더욱 달아오르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의 검 위로 검강이 더욱 웅혼하게 뻗어 나왔다.
도제라는 존재에게 걸맞은 마지막 한 수를 내보이기 위해 그의 검은 하늘로 치솟았다가 그대로 오종락을 향해 내리꽂혔다.
“아, 안돼!”
“문주님-!”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몸을 날려 그 한 수를 막아내려 했지만 역부족.
마침내 일월성주의 검이 오종락의 가슴을 가로질렀다.
슁-!
하지만 어느샌가 검이 휘둘러진 자리엔 오종락의 신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월성주는 눈동자를 굴려 더욱 앞을 바라봤고, 그곳엔 오종락을 낚아채 훌쩍 뒤로 물러나 있는 사내 하나가 오롯이 서서 일월성주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