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1장 대산(2)
절체절명의 순간에 간신히 오종락을 빼낼 수 있었던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일월성주의 검에 도제라는 존재가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자네가 왜 이곳에…….”
내 품에 안겨 있던 오종락은 흐릿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출혈도 심했고 창백한 안색으로 볼 때 극심한 내상까지 입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어깨를 관통당한 상처가 치명적이라 일단 급하게 혈을 짚어 지혈해 두었다.
지금도 겨우겨우 흐려져 가는 의식을 붙들고 있는 거겠지.
“행여 문주님의 손에 일월성주가 죽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달려왔습니다.”
월영련. 혹은 최소 일월성의 본진이 십만대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총군사 묵가후는 일월성주를 되도록 죽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해왔었다.
혹시나 제압까지 할 수 있다면 여럿 중요한 정보를 캐낼 수도 있을 테고.
그 부탁을 빌려 오종락의 패배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도제를 향한 작은 배려였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오종락은 픽, 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예.”
그 짧은 대답을 끝으로 오종락은 안도하는 표정과 함께 눈을 감았다.
나는 혼절한 오종락을 내 곁으로 날 듯이 달려온 진천문의 제자들에게 넘겼다.
이어 그들을 후방으로 물러나게 한 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월성주를 향해 시선을 건넸다.
놈은 더 이상 오종락에겐 관심이 없다는 듯 오로지 나를 주시한 채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유진휘라고 했던가. 네놈이 이곳에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흑웅대주처럼 역시나 놈도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월영련 놈들에겐 내가 척살 대상 일 순위라고 했으니.
나는 조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 있을 줄 예상했다면 이리 당당하게 쳐들어오진 못했겠지.”
“하하. 듣던 대로 건방진 놈이로고.”
“꽤 여유롭네?”
“당연한 소릴. 네놈의 등장이 예상 밖이긴 했지만, 그뿐. 딱히 곤란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하. 생긴 대로 건방진 놈이네.”
놈이 내뱉은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자 놈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동시에. 놈과 나는 이런 소모적인 대화 속에서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중이었다.
마주한 순간 이미 어느 정도 기세를 파악한 만큼 서로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월영련주에게 밀리지 않는 실력자였다.
도제와의 혈전으로 놈 역시 적잖은 상처를 입었는데, 그 정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놈이 도제 이전에 나를 먼저 마주쳤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릉!
내가 검을 뽑자 일월성주 또한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그러는 와중 놈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지 한마디를 던져왔다.
“련주님께서 아쉬워하시겠군.”
“무슨 소리지?”
“우린 네놈이 요동으로 향할 줄 알았으니까 말이야. 련주님께선 그곳에서 검신은 물론 네놈까지 한꺼번에 처리하고자 하셨지.”
검신과 나를 동시에?
아무리 월영련주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목숨을 내걸 각오를 먹더라도 마찬가지. 한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주인을 향한 신뢰가 지나치게 높아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하나? 네놈. 아니, 네놈들이야말로 검신을 향한 믿음이 너무 높아 보이는구나. 이제는 다 늙어빠져 죽음을 앞둔 노인네가 아니던가? 세월이라도 비껴가지 않는 이상 검신이란 별호는 그에겐 너무 과분….”
쐐-엑!
주둥이를 다물게 할 심산으로 날려 보낸 검기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일월성주가 그 검기를 가볍게 막아내는 사이 나는 말을 가로챘다.
“인간이란 자고로 세월에 따라 약해지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야. 그게 당연한 이치다. 그 이치에 순응해야 강해질 수 있는 거고. 한데 네놈들의 주인은 그 당연한 이치조차 받아들이기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니던가?”
“이치를 두려워한다?”
“그걸 두려워하니 인간이길 포기하며 쫓아오는 세월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는 거겠지.”
“…련주님에 대해 무언가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마주친 적이 있으니 알아차릴 수밖에. 인간이길 포기한 거면 개새끼라 칭해야 하나? 아니 그것도 과분하지. 그 꼴이라면 쥐새끼라…….”
번쩍!
이번에는 일월성주의 검에서 한줄기 섬광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비틀자 섬찟한 기운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여유와 미소가 가득했던 일월성주의 표정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주인을 향한 신뢰가 높은 만큼 주인을 향한 모욕 역시나 신랄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좋다. 네놈은 련주님 대신 내가 목을 잘라주마.”
“혼자서 가능하겠어? 산 밑에 대기하고 있는 수하들이라도 불러오는 게 좋아 보이는데.”
“그 충고는 고려해보마.”
파-앙!
순간 일월성주는 지면을 박차고 한줄기 빛살이 되어 쇄도해 들어왔다.
***
요동성, 천산.
천영검대주 심성결이 수하들과 함께 빠르게 산길을 가로질렀다.
검신 백도천을 노리는 월영련주를 뒤쫓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온 참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정천맹 최고의 무력 집단인 천군지사대 역시 다른 방향에서 산을 오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디냐?’
심성결은 오감을 최대로 끌어올린 채 천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전대 맹주인 검신을 향한 염려보다는 월영련주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하에서.
그렇게 지칠 줄 모르는 수색이 한창이나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쾅!
별안간 터져 나온 굉음이 산을 뒤흔들었다.
심성결은 그 굉음의 근원지가 거대한 기운과 기운의 충돌임을 깨달았다.
“대주님!”
“가자!”
방향을 틀어 빠르게 내달리자 점차 천영검대주인 자신조차 거스르기 힘들어 보이는 두 존재감의 기세가 느껴졌다.
현재 이곳 천산에서 그러한 기세를 내뿜을 수 있는 존재는 검신과 월영련주 밖에 없었기에 심성결은 이를 악물고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이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어느 산봉우리의 정상.
정상 위에서 두 인영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며 혈전을 벌이고 있었고 그 여파로 인해 일진광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시 그 너머 반대편 기슭에선 천군지사대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영검대와 천군지사대. 두 집단은 산 정상을 뒤덮는 광풍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늦지 않게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이 자리에서 반드시 월영련주를 처치하겠다는 의지를 앞세워 나아가니, 점점 검신 백도천과 월영련주의 모습이 가시거리에 들어올 만큼 가까워졌다.
“검을 뽑아라! 전대 맹주님을 지키고 저 간악한 자의 목을 벤다!”
“예-!”
채채채챙!
이어진 심성결의 명령에 천영검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천군지사대와 함께 포위망을 펼쳐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구역을 에워쌌다.
이후 곧장 월영련주를 향해 짓쳐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으윽!”
수하 하나가 이를 악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심성결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하는 마치 제 손을 빠져나가려 하는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시작으로 나머지 수하들 역시 꼼짝없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서, 설마!”
심성결은 경악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수하들을 뒤따라 움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팔을 타고 흘러들어옴과 동시에 자신이 쥐고 있는 검을 대신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이기어검……!”
촤라라라락!
깨달은 순간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수십 자루의 검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월영련주가 자신을 포함한 천영검대와 천군지사대원들의 검을 일제히 빼앗아 이기어검의 수로 제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검을 빼앗기지 않은 자들도 있었기에 심성결은 다급히 고함을 내질렀다.
“일단 물러나라! 전부, 전부 물러나!”
그 외침에 반응한 인원들이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물러서야 검을 하나라도 더 빼앗기지 않을 터.
결국 천영검대와 천군지사대의 무인들은 무력감을 느끼면서 검신과 월영련주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다행스러운 건 검신 백도천 역시 허공으로 날아오른 검 중 반을 제어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이기어검과 이기어검.
어느새 검신과 월영련주의 싸움은 그 지고지순한 경지의 대결이 되었다.
카가가가강!
계속해서 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수십 자루의 검 또한 뒤엉키기 시작했다.
***
“이, 이럴 수가…….”
경천동지할만한 전투였다.
이기어검이란 경지를 두 눈으로 목도하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심성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무조차 잊을 정도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머지 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경외심을 느끼며 말없이 싸움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한 시진. 두 시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하염없이 지켜보길 한참.
“저, 전대 맹주님!”
누군가가 내지른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심성결은 입을 쩍 벌렸다.
허공을 수놓던 수십 자루의 검이 마치 소나기처럼 일제히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푸푸푸푹!
그 소나기에 몸이 꿰뚫린 신형 하나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선혈을 뿜어냈다.
“아, 안돼-!”
심성결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쓰러지는 신형의 정체가 검신 백도천이었으니까.
설마 그가 패배할 줄은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 심성결은 발작하듯 울부짖었다.
“저, 정신 차리십시오. 맹주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백도천은 몸을 축 늘어트린 채 관통당한 상처로부터 연신 피를 게워내고 있을 뿐이었다.
빠르게 혈을 짚어 상처를 지혈하고 몸을 살펴본 심성결은 아직 백도천의 숨이 붙어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에 천영검대와 천군지사대의 무인들은 백도천 만큼의 치명상을 입은 월영련주를 향해 일제히 짓쳐들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힘을 짜낸 것인지 이기어검으로 조종되고 있던 검들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인원들은 제 검을 되찾아 손에 쥔 채 월영련주를 향한 합공을 펼쳤다.
자신들이 감당할 만한 고수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백도천과의 싸움으로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상태.
적잖은 숫자의 희생 끝에 월영련주는 마침내 몸 곳곳에 검이 틀어박힌 채 무릎을 꿇었다.
“쿨럭.”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 월영련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검신.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들. 다시 그 위에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천맹의 무인들.
월영련주는 그 모두를 둘러봤다.
그리고, 웃었다.
그 섬뜩한 미소에 꽂아 넣은 검을 움켜쥐고 있던 무인들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건 심성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신 백도천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긴 했으나 그 역시 이제는 죽은 목숨이었다.
한데 저런 미소라니?
그때, 월영련주가 입을 열었다.
“검신은 죽을 것이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다.”
심성결이 이를 악물며 악을 쓰자 월영련주가 안광을 터뜨렸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본좌의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라 여긴다면… 잠시나마 그렇게 안도하며 지내고 있거라.”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을 끝으로 월영련주는 이내 목을 축 늘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