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1장 대산(3)
쐐엑!
강기를 머금은 검이 쏜살같이 짓쳐들어왔다. 나는 몸을 틀어 일월성주의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검을 들어 올렸다.
반격을 위한 게 아니었다.
쩡!
내 사각을 노리는 검기 세례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검.
일월성주의 검법은 환(幻)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니, 기반이 아니라 환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환검의 극의(極意).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일월성주에게 집중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내게 사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소리 없이 피어오른 검의 환영들이 여지없이 사각을 파고들어 왔다.
더군다나 그 환영 속에는 분명한 실체가 존재해서 자칫 방심하다간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도제 오종락은 이러한 환검에 의해 연신 수세에 몰렸을 것 같았다.
오종락의 도는 중(重). 거스를 수 없는 힘과 무게로 상대를 압도해 짓누르는 도법이 그의 성명절기였다.
애석하게도 같은 경지 내에서라면 중과 환은 상성이 좋지 않았다.
일월성주의 환검만 아니었더라도 도제가 무참히 패배하지는 않았을 터.
“도제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놈이로고.”
한참을 밀어붙이다가 잠시 거리를 벌린 일월성주도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입을 놀렸다.
“그자는 이 정도로 충분했는데 말이다. 하긴, 도(刀)라는 단순 무식한 무기를 쓰는 걸 보면…….”
도를 무시하는 발언에 후방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진천문의 제자들이 발끈하는 게 느껴졌다.
도제가 이끄는 진천문은 도의 명가.
그런 그들의 본산인 황아산에서 도를 무시하는 발언을 입에 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발언을 한 이가 일월성주였기에 진천문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분노와 울분을 토해내는 것뿐이었다.
해서 나는 그들의 분노와 울분을 대신 표출해주었다.
“도를 무시하는 건가?”
“당연하지 않나? 네놈조차 검을 쓰고 있지 않으냐. 백일도(百日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백일도, 천일창, 만일검.
각 무기를 제대로 다루는 데 필요한 수련의 시간을 뜻하는 말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베기 위주의 도는 백 일만 수련해도 평범한 무인들이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병장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이들을 위한 통상적인 기준일 뿐.
도제의 도법이자 진천문의 도법은 피나는 단련과 수련으로도 익히기 까다로운 무공이었다. 당연히 수준 또한 천하에서 손꼽히고 있었고.
전생에 도제와 함께 마교의 마인들을 막아내면서 나는 그 위력을 절실히 체감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그들의 도법은 분명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다고.
도제와 도라는 병장기를 무시하는 건 그러한 내 인정까지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조소를 지었다.
***
탁.
내가 검을 집어넣자 일월성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짓이냐?”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하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일월성주는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어 손을 내뻗어 허공섭물의 수를 펼치자, 도 한 자루가 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도제. 그의 허리춤에 달린 도였다.
손에 쥐고 보니 묵직하고도 예리한 기세가 도에서 느껴졌다.
도의 명가인 진천문의 문주가 사용하는 도이니만큼 명도를 넘어선 보도(寶刀)라고 봐도 무방했다.
“잠시 빌리겠습니다.”
나는 도제와 진천문의 제자들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 나자 모두가 내 의중을 알아차리곤 깜짝 놀랐다. 또 누군가는 당황스러워했고 누군가는 의문을 표했으며, 마지막으로 일월성주는 혀를 차고 나섰다.
“같잖은 짓을 벌이는군. 네놈이 도를 사용하겠다고? 감히 본좌를 상대로?”
“불만이라도?”
“이 애송이 새끼가…….”
일월성주는 마치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시뻘게졌다.
싸움 자체에 굶주려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나 내가 도를 사용하여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진 않을까 불만스러워하는 모양새였다.
“걱정하지 마. 도(刀)로도 충분하니까.”
충분하지.
비록 검수라고는 하지만 나는 도법에도 나름 조예가 깊었다. 검신 영감을 통해 천영검대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입맹한 이후 여러 가지 무공을 익혀봤었으니까.
다만 내가 자신 있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로원에서의 수련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원로원주를 비롯한 전대 무림의 노고수들에게 무공을 하사받았다. 그중에는 도제에 버금가는 인물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원로원에서는 적노(赤老)라 불리는 인물.
원로원주인 검황 철무군과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는 고수였다. 정확한 정체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과거엔 검황에 버금가는 명성을 떨쳤을 게 분명했다.
‘백일도라는 말이 도를 무시하는 말이라고? 허허, 그렇지 않다. 백 일만 익혀도 충분히 위용을 뽐내는 무기가 바로 도이긴 하지. 하지만 수련이라는 게 백 일만으로 끝나는 것이더냐? 평생을 바쳐도 모자란 게 수련이다. 그리고 도는 익히기 쉬운 만큼 더욱 빠르게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어.’
도제 오종락만큼이나 도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던 인물이 적노였다.
‘그리고 뭐? 베는 게 전부인 단순한 무기라고? 단순함이 나쁘더냐? 베는 거면 충분하다. 벨 수 있다. 그 말은 벨 수 없는 게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 사람도. 세상도. 그게 노부의 도법이다.’
능참인세도(能斬人世刀).
적노의 도법이자 지금 내가 펼치려고 하는 도법의 이름이었다.
***
번쩍!
섬광이 시야를 반으로 갈랐다.
그 궤적에 걸린 검의 환영들은 일제히 반으로 갈라지며 힘을 잃었다.
“이 무슨…….”
일월성주는 자신이 펼쳐 보인 환검의 초식들이 번번이 가로막히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나는 도 한 자루를 손에 쥔 채 갈라지는 검의 환영 속으로 몸을 날렸다.
후웅!
능참인세도법 역시 도라는 무기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중(重)의 묘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쾌를 실었다.
적노 밑에서 도법을 수련할 당시 그는 능참인세도법이 쾌와는 어울리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었다.
아니, 애초에 쾌를 더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분명 쾌를 담았고 당시 적노는 그런 나를 경악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당치도 않을 놈이 기어이 그걸 해내는구나.’
그때 나는 과거의 무공을 되찾아 지극의 경지에 오른 건 물론, 검신합일을 넘어 검에 의지를 싣는 검의합일의 경지까지 터득한 상태.
그랬기에 가능했고 그렇게 더욱 발전된 능참인세도법은 일월성주를 제대로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텅! 터터텅!
“큭!”
일격 하나하나가 무겁고도 빨라 일월성주는 내 공격을 막아내며 연신 물러나기에 바빴다.
놈은 밀려나는 와중에도 간간이 반격을 해왔다. 그러나 놈의 환검은 내 도에 의해 일일이 베여나갔다.
도라는 무기로 자신의 환검을 모조리 베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지 놈은 그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이, 이게 도법이라고? 헛소리! 네놈은 분명 도라는 무기를 들었을 뿐 검법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니더냐!”
“아니. 도법이다.”
촤악!
쉴 틈 없이 밀려나던 일월성주는 마침내 가슴께가 크게 베여 피를 뿜어냈다.
하찮다고 여기는 도에 의해 자신이 상처를 입은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지 놈은 어느새 눈이 희번덕거리게 돌아가 있었다.
“도법이라고? 오냐. 그럼 어디 이것 또한 베어보거라!”
촤라라라락!
일갈과 함께 일월성주의 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어 허공으로 떠오른 검은 순식간에 수백의 검영(劍影)을 만들어냈다.
수백의 검영은 그 하나하나가 강기를 머금고 있는 상태.
“저, 저게 인간이 펼치는 초식이라고?”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인원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비록 적이기는 하지만 일월성주의 무공은 그만큼 가공할 수준이었다.
나 역시 이번에는 나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허공을 뒤덮은 검영은 분명 환영이나, 동시에 실제이기도 했다. 그만큼 나조차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구분할 수 없다면 놈의 말대로 베어내면 될 뿐.
쐐에에엑!
수백의 검영들이 유성우처럼 일제히 쏟아져 내리는 순간.
나는 도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능참인세도의 초식 중 일도양단(一刀兩斷)을 추구하는 최후초식.
스아아악!
일(一)자를 그리는 섬광이 내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반으로 베었다.
이어.
콰콰콰콰쾅!
수백의 검영은 바닥으로 추락하며 연신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충격의 여파로 사방에 흙먼지와 돌무더기가 피어올랐다.
***
퉤!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자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일월성주의 초식을 상대하며 내상을 입은 덕분이었다.
내상뿐만 아니라 몸 여기저기도 깊게 갈라져 있었다. 찢겨나간 옷깃 사이에선 핏물이 철철 흘러나왔다.
나는 개의치 않고 점차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의 끝에 서 있던 일월성주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입을 여는 게 보였다.
“…과연. 련주님께서 왜 네놈을 경계하는지 알 만하구나.”
그 말과 함께 놈은 몸 깊숙이부터 타고 오른 핏물을 토해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일월성주 역시 나보다 더한 내상과 함께 허리께부터 어깨까지 크게 갈라져 있는 도상을 입은 상태였다.
놈과 나의 상태를 놓고 비교해 보면 승기가 누구에게 기울었는지는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는 놈에게 가까이 다가선 채 대답했다.
“계속 경계하라고 해. 다음은 그놈이니까. 아, 그놈도 지금쯤 무사하진 않으려나.”
검신이 있는 요동의 천산엔 천영검대와 천군지사대가 파견된 상태였다. 놈이 아무리 강해도 그 모두를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월성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련주님은 무사하시다. 무사하실 수밖에 없지.”
“…조만간 알게 되겠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의 혈을 짚으려 손을 뻗었다. 이대로 생포하는 게 총군사 묵가후가 가장 원하던 상황이 아니던가.
그때.
“성주님을 모셔라-!”
산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월성의 무인들이 일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나와 일월성주의 사이를 떼어놓고자 빠르게 짓쳐들어왔다.
카강!
호선을 그리는 검을 튕겨내긴 했지만, 손목까지 얼얼한 충격을 미루어보아 내 앞을 가로막은 무인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게 느껴졌다.
놈과 대치하는 사이에 내 뒤쪽에서도 설표와 소이겸. 복룡추호대 이조대. 진천문의 제자들과 청해 무림의 무인들까지 각자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놈들을 막아라!”
“감히 황아산에 발을 들이민 적들에게 진천문이 왜 천하오주라 불리는지 똑똑히 알려주거라-!”
적과 아군.
대략 이백에 달하는 양측의 무인들이 기세를 피워올리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로서도 당장은 일월성주보다는 놈들을 막아서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일월성주를 생포하고자 집중한다면 아군의 피해가 더욱 커질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놈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듯, 무사히 일월성주를 빼내 후퇴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일월성주가 쓰러진 이상 진천문을 노린 이번 진격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일 테니.
“성주님을 모시고 후퇴한다! 진영을 유지해라!”
결국 나는 일단 놈들의 숫자를 하나라도 더 줄여놓기 위해 전장의 중심으로 몸을 날렸다.
여전히 도를 쥔 채 빠르게 놈들을 베어나가자 전황은 금방 기울었다.
“성주님은 무사하시다! 지금이다! 전부 물러나라!”
일월성주의 신병을 확보하자 놈들은 진격해온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어 의식을 잃은 도제 오종락을 대신해 아군 진영을 지휘하던 진천문의 장로들은 놈들을 뒤쫓지 말 것을 제안했다.
놈들의 공세를 막아낸 걸로 충분하며 더 이상의 사상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끝내자는 뜻이었다.
나 역시 순순히 그들의 제안을 따랐다. 믿는 바가 따로 있었으니까.
일월성주의 몸에 아무도 모르게 추종향을 발라두었다. 예전에 엄예령에게 받아두었던 것으로 추종향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품질을 자랑했다.
그 추혼향을 통해 황아산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놈들을 뒤쫓을 계획이었다.
총군사의 추측대로라면 놈들은 마교의 본거지였던 십만대산으로 되돌아가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