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2장 추적(1)
“문주님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오.”
“귀하 덕분에 예상보다 큰 피해 없이 놈들을 막아낼 수 있었소이다.”
“본문을 대신해 도제라 불리시는 문주님의 자긍심을 지켜주시어 감사하외다.”
일월성 놈들이 패퇴한 이후, 진천문의 장로들은 가장 먼저 나에게 다가와 한마디씩을 건넸다.
그들의 목소리엔 나를 향한 경외와 호감이 잔뜩 묻어나왔다. 검수인 줄 알았던 내가 도법만으로 일월성주를 꺾었기에 기꺼운 마음이 더 커 보였다.
더욱이 내가 펼쳐 보였던 도법에 대한 호기심과 찬양도 터져 나오고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귀하의 스승이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소이까? 내 평생 그런 도법은 처음인지라…….”
“맞소. 본문의 도법과 겨루어도 절대 밀리지 않을 수준이었지. 혹 귀하의 스승께선 도광(刀狂) 어르신이 아닌지?”
도광? 그런 별호는 처음 들어보는지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원로원의 적노 어르신이 과거엔 그렇게 불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정확한 건 아니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도를 가르쳐 주신 분의 정체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과거에 정파 세력에서 큰 명성을 떨치신 분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려. 그렇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소이다. 하지만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개안할 정도의 대단한 도법이었소. 물론 귀하의 무위가 그에 걸맞은 수준이기에 가능한 거였겠지. 다시 한번 본문을 대표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오. 함께해 주신 복룡추호대원분들 역시 마찬가지요.”
진천문의 장로들은 나와 설표, 그리고 나머지 복룡추호대 이조대원들에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인 뒤 물러갔다.
우리 말고도 진천문의 이름 아래 모여 함께해 준 무가와 문파들이 많았으니까.
그때, 설표가 넌지시 물어왔다.
“몸은 좀 괜찮나?”
그는 대주로서 수하의 몸 상태가 염려된다는 눈길을 보냈다. 일월성주와의 싸움이 격렬했던 만큼 나 역시 몰골이 영 말이 아니었다.
나는 씩 웃으며 걸레짝이 된 무복을 대충이나마 갈무리한 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멀쩡합니다.”
“지금도 피가 새어 나오는데 멀쩡하기는?”
“이 정도는 대충 지혈만 해도…….”
내가 손가락을 놀리며 몸 곳곳의 혈을 짚었다.
설표는 그런 나를 마뜩잖은 얼굴로 쳐다보았고 어느새 다가온 소이겸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천 대주님의 유지를 이었다더니 그 성정까지 빼다 박았구나.”
이리저리 내 몸을 살피던 소이겸은 마치 전생의 나를 떠올리듯 아련한 눈빛을 띠었다.
“외상뿐만 아니라 내상도 입은 것 같은데, 진천문에 신세를 지게 되더라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해.”
“아닙니다. 내상 역시 딱히 심하진 않아서…….”
“잔말 말고 일단 이거나 챙겨 발라라.”
소이겸은 짐짓 엄중한 눈빛으로 내게 금창약을 건네주었다. 그 눈빛은 역시나 전생의 나를 향해 매번 잔소리해 오던 그때의 녀석과 똑같았다.
‘그러게 왜 맨날 혼자서 모든 걸 떠안으려 하시는 겁니까? 대주님이면 대주님답게 밑에 애들 좀 부려 먹으십쇼. 괜히 앞서 나가셔서 이렇게 다치지 좀 마시고요.’
‘멀쩡하다니까.’
‘이게 멀쩡합니까? 예?’
‘아악! 상처 벌어져!’
자연스럽게 떠오른 과거의 기억과 함께 나는 금창약을 건네받으며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
하남, 정천맹.
맹주 독고태문과 총군사 묵가후를 필두로 정천맹의 모든 장로가 한자리에 모였다.
맹주전 중앙에 자리 잡은 원탁. 그곳에 둘러앉은 그들은 같은 날에 날아든 두 가지 소식으로 인해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는 청해 진천문에서 올라온 보고였다.
도제의 부상과 함께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지만 정천맹이 파견한 복룡추호대의 활약에 힘입어 일월성의 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는 소식.
그 소식은 곧 월영련과의 공식적인 첫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뜻이니만큼 인원들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지극 고수라 여겨지는 일월성주를 단신으로 꺾은, 복룡추호대 막내 대원을 향한 탄사가 맹 곳곳에 퍼져나갔다.
그에 따라 유씨세가의 소가주인 유진휘에 대한 명성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하남 무림에서는 유진휘를 잠룡(潛龍)이라 부르며 찬양하고 나섰다.
천하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가장 명성이 높다는 사룡일화. 그 선두에 잠룡을 두어 이제는 오룡일화(五龍一華)라 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무위만 따지면 후기지수의 범주를 뛰어넘은 건 사실이나 아직 나이가 어린 걸 고려한 공론이었다.
그런 유진휘 덕에 집형당주의 자리를 맡은 태산검존 곽명 또한 맹 내에서 입지가 높아졌다.
원래에도 높았던 명성이 복룡추호대가 소속된 집형당을 휘하에 두며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를 쉬이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독고태문과 묵가후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다.
맹 내부에 천하오주를 경계하는 파벌이 존재하고 있는 와중 태산파의 인물인 곽명이 입지를 다져나가게 됐으니까.
그로 인해 월영련이라는 적의 등장으로 정천맹의 모두가 합심해야 하는 이때 파벌 간의 충돌을 자연스레 억제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독고태문과 묵가후는 이 모든 게 유진휘, 단 한 사람 덕분이란 걸 깨닫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난세의 영웅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 같네.”
독고태문은 묵가후만이 들을 수 있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묵가후 역시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이미 저희에겐 영웅이나 다름없는 이가 아닙니까?”
“하하, 그렇지. 그렇고말고.”
고작 약관을 갓 넘은 후기지수에게 이토록 의지하며 신뢰를 보내게 될 줄 몰랐기에 두 사람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결국 두 번째 소식을 전하게 되면서 무너져 내렸다.
“전대 맹주님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요동의 천산으로 파견됐던 천군지사대와 천영검대.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월영련주와 전대맹주님께선 반나절이 넘어가는 혈전을 벌이다가 양패구상하여…….”
월영련주는 자신들의 손으로 확실히 목숨을 거두었지만 검신 역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상태가 심각하다고 전해왔으며 현재 빠르게 맹으로 복귀하고 있다고 했다.
“전대 맹주님의 소식은 안타깝지만, 어쨌든 월영련 놈들의 수장을 확실히 제거했다는 말이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물음에 묵가후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고 해야 하는가?’
그런 의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본좌의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라 여긴다면… 잠시나마 그렇게 안도하며 지내고 있거라.]
천영검대주 심성결의 보고에 따르면 월영련주는 죽기 직전 뜻 모를 말을 내뱉었다고 했었다.
더군다나 유진휘에게서 월영련주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해 들었었다.
때문에 묵가후는 월영련주의 마지막 한마디를 간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밝혀진 사실은 아니니만큼 지금은 그에 대해선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당장은 보고에 따른 결과와 그에 대한 후속 조치가 우선이었다.
“의당주께선 전대 맹주님이 도착하시면 곧장 치료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예.”
“나머지분들께선 지금처럼 계속 긴장을 늦추지 마시길 바랍니다. 월영련과의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월영련주가 죽었다고 해도 놈들의 전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을 거고 저희는 그에 대항할 수 있도록…….”
묵가후의 주도하에, 맹주전에서 벌어진 회의는 밤늦도록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
황아산에서의 전투 이후 다시 며칠이 지났다.
그때까지도 나와 복룡추호대는 진천문에 머물렀다. 우리를 향한 대우가 마치 귀빈을 대접하듯 공손해서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으나 진천문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아낌없이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수준 높은 의원들은 물론 식사와 거처까지.
덕분에 나도 온전히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사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도제 오종락도 병상에서 깨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기도 했다.
적어도 문주인 그가 정신을 차려야 마음 놓고 일월성 놈들을 뒤쫓을 수 있었으니까.
때마침 오종락이 나를 찾는다는 말에 나는 홀로 문주전으로 들어섰다.
침실로 들어가자 침상 위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오종락이 보였다.
그는 나를 제외한 사람들을 전부 내보냈고 둘만 남게 됐을 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본문의 은인일세. 나아가 내 목숨까지 구해 주었지.”
“정천맹의 무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아니. 나는 지금 복룡추호대원인 자네가 아니라 유씨세가의 소가주인 자네에게 감사를 전하는 중이네.”
“…….”
“그리고 나는 은혜를 말로만 갚는 사람이 아니지. 해서…….”
오종락이 말을 하다 말고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침실 벽 한편에 매달려 있던 도 한 자루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도는 이내 오종락의 손아귀에 안착했고 그는 그걸 그대로 나에게 건넸다.
“장로들에게 전해 들었네만 자네는 도법에도 조예가 무척 깊다지?”
“그 정도는 아니고…….”
“하하. 겸손할 필요 없네. 장로들이 이미 자네의 도법을 인정했으니까. 전대 고수셨던 도광 어르신을 떠올리게 할 정도라고 말일세.”
도제마저 존경하는 기색을 보이는 인물이라니. 확실히 도광이란 자는 전대에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었나 보다 싶었다.
“혹시 그 도광이란 분이 지금 정천맹의 원로원에 계십니까?”
“자네가 그걸 어찌 아나?”
“…그렇군요.”
“설마. 정말로 자네가 도광 어르신의 도법을…….”
예상했던 대로 내게 능참인세도법을 전수해 준 적노 어르신이 도광이었던 것 같았다.
“기회가 되어 작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렇구나. 역시.”
미소와 함께 오종락은 짧게나마 도광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가문의 마지막 후예였던 그는 도법에 관해선 대종사라 불릴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검황과 도광. 두 분은 일찍이 검수와 도수를 대표해 어떤 무기가 더 뛰어난지를 겨루며 지내오셨네.”
“그렇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비무만 해도 수백 번이 넘을 걸세.”
“누가 이겼죠?”
“…결과까진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네.”
“…….”
슬쩍 눈을 피하는 걸 보면 정확하게 전해진 것 같은데. 나는 굳이 캐묻는 대신 원로원주와 적노 어르신의 몰랐던 과거를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해했다.
뭐가 됐든 내게는 두 사람 모두 짧게나마 스승이었던 인물이었는지라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직접 물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흠흠. 아무튼 그런 도광 어르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니 더욱 잘됐구나. 이 도는 네가 사용하거라.”
오종락이 내게 건넨 도는 일전에 내가 일월성주를 상대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 보도였다.
즉, 진천문주인 오종락이 직접 사용하던 도로써 진천문의 신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런 신물을 막 주셔도 되는 겁니까?”
내가 묻자 오종락은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는 문파와 문파 혹은 문파와 무가 사이에서 신물을 건네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예.”
신물을 건네주는 건 그만큼의 신뢰를 표명하는 것으로 세력끼리의 동맹이나 인연을 맺겠다는 증명인 셈이었다.
즉 오종락은 진천문주로서 유씨세가의 소가주인 내게 동맹을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네. 동맹이라기보다는 그저 은인의 가문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자 함이니. 총관에게도 일러 유씨세가에도 따로 서찰을 보내두었네.”
“그렇다면 굳이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나는 오종락에게 건네받은 도를 허리춤에 둘러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떠나서 가문을 생각하면 실이 될 건 없는 인연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