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2장 추적(2)
만천도(滿天刀).
진천문의 신물 중 하나이자 도제 오종락의 애병. 일월성주를 상대할 때 내가 직접 사용해 봤던 바로, 확실히 보도에 속하는 뛰어난 무기였다.
그 만천도까지 포함해 현재 내 허리엔 두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두 자루의 검 역시 하나하나가 명검과 보검이어서 왠지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정마대전이 한창 격렬히 달아올랐던 전생엔 하루에 몇 자루씩이나 검을 부숴 먹었었다.
밀려오는 적들을 베고 또 베다가 검이 부서지면 시체 사이에 파묻힌 검을 주워 사용했다. 그마저도 불가능할 땐 외공이자 격투술인 사신무가 빛을 발했다.
그때의 내게 이런 검과 도가 있었다면 병장기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 그랬다면 사신무라는 무공은 탄생하지 않았으려나.
또 한 자루 뛰어난 무기를 얻었다는 뿌듯한 마음에 피어오른 상념에서 벗어난 나는 문주전을 빠져나왔다.
일월성의 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진천문이 유씨세가와 인연을 맺기로 했으니 복룡추호대원으로서도, 유진휘로서도 임무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추종향을 발라둔 일월성주를 뒤쫓아 추측대로 놈들의 본거지가 십만대산에 있는지 확인해보는 일뿐.
앞으로의 행보를 상기하며 밖으로 나섰을 때, 진천문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좀 전까지는 진천문의 분위기가 썩 활기찼었는데.
나는 의아함에 일단 복룡추호대원들이 묵고 있을 건물로 돌아갔다. 도착하고 보니 그들 또한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가 설표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서찰 때문이란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맹에서 보내온 서찰입니까?”
내가 묻자 설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맹주님과 월영련주에 관한 서찰이다. 요동에서의 일도 마무리됐다는군. 하지만…….”
분위기나 대원들의 표정도 그렇고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설표까지. 설마 싶은 마음과 함께 설표가 건네는 서찰을 받아 읽어 내려가던 나는 어느새 그들처럼 표정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
“전대 맹주님의 병세가 위독하기도 하고, 당장 우리가 청해에서 할 일은 크게 없으니 이만 복귀하라는 명령이다.”
검신 영감과 월영련주가 혈전을 벌여 양패구상했다는 내용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내려가고 있던 내게 설표가 말을 건넸다.
동시에 내 어깨에 얹어지는 그의 손길에서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정파 세력에 속한 강호인이라면, 특히나 정천맹에 소속된 무인들이라면 아마 모두가 같은 심정일 거라는 듯.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심정은 그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 있어 검신 백도천이란 존재는…….
‘그 영감이 없었다면 전생의 난 어릴 적 추악한 기억으로 인한 복수심에 미쳐 날뛰는 살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영청심공과 천일백야검법이라는 기연을 얻어 무위가 높아진 직후의 내 모습이 딱 그랬으니까.
복수심이 천외천의 무공을 만나 내 심중 속에서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덕분에 그때의 나는 정말 앞뒤 가릴 것 없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었다.
내 칼날은 오로지 마교의 마인들을 향했다고 하지만 그중엔 분명 마인들이 아닌 자들도 있었다. 검신 영감과 처음 만난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엇! 소협! 현재 이 너머로는 향할 수 없소. 멀지 않은 곳에서 정천맹의 무인들과 마교의 마인들이 충돌 중이니 용건이 있다고 하여도 훗날을 기약하시오.’
그날, 내 앞길을 가로막은 건 분명 정천맹의 무인이었다.
이제는 얼굴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 그는 분명 내 안위를 염려하여 충고와 함께 걸음을 붙잡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 귀엔 그 무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이 앞 너머에 마교의 마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몰두해 나는 그를 무시했고, 그는 그런 나를 계속해서 붙잡아두었다.
해서 검을 뽑았다.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그 무인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국 내 검에 쓰러졌다. 그 무인 말고도 몇몇은 더 베었을 것이다.
만약 그날, 적절한 시기에 검신 영감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보다 많은 정천맹의 무인들이 내 손에 쓰러져 나갔을 게 분명했다.
‘복수심에 휘말리지 말거라. 확실히 갈무리하여 온전히 네 검에 담아라. 무엇을 베어야 하는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구분 지어라.’
‘천마에게 복수를? 그럼 우린 공통의 적을 가진 사람이구나. 함께하자. 내가 도와주마. 너도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천영검대. 내 직속, 기밀 검대다. 천마를, 나아가 마교 전체를 무너트릴.’
‘이놈아. 공식적인 자리에서만이라도 맹주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나도 체면이란 게 있지. 영감님이 뭐냐.’
‘언젠가는 너도 천영검대주가 아닌, 천우혁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는 나도 한 명의 무인으로서 너와 제대로 실력을 겨뤄봐야겠다. 갑자기 무슨 실력을 겨루냐고? 맹주의 체면이 있지. 천영검대주가 맹주보다 강하다는 소문이 은근히 퍼져나가고 있다는데 이대로는……. 이놈이 감히 내 앞에서 한숨을? 오냐, 내 지금 당장…….’
“진휘야?”
설표의 부름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설표를 비롯한 복룡추호대의 모두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내 손에 쥐어진 서찰도 번갈아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쥔 서찰이 와락 구겨지도록 손아귀에 힘을 주어 손바닥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인원들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
“너 혼자서 일월성주를 뒤쫓겠다고?”
잠시 나와 둘이서 대화를 나누겠다며 인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 설표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남몰래 일월성주의 몸에 추종향을 묻혀두었단 사실을 밝혀 보였다.
“일월성주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총군사님의 추측대로 일월성을 비롯한 월영련이 십만대산에 자리를 잡았는지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나도 총군사님에게 그런 얘기를 듣긴 했다. 일월성 놈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게 십만대산 근처라고. 하지만 지금쯤 총군사님께서 비선당을 통해 놈들을 뒤쫓고 있을 거다. 굳이 너까지 나서지 않아도…….”
“그것 말고도 따로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설표에게서 건네받았던 서찰엔 요동 천산에서 있었던 일들까지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내용 중엔 월영련주가 죽기 직전 뜻 모를 말을 내뱉었단 사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본좌의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라 여긴다면… 잠시나마 그렇게 안도하며 지내고 있거라.]
분명 전신에 검이 틀어박혀 죽음을 앞둔 그때 월영련주는 마치 훗날을 기약하듯 그렇게 읊조렸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월영련주가 남아 있는 월영련의 세력들에게 뒤를 맡기고자 했던 게 아니겠냐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월영련주는 죽었지만, 그의 의지를 이어받은 월영련이 계속해서 강호를 장악하고자 들고 일어설 거라며.
하지만 나는 확실히 위화감을 느꼈다.
검신 영감이 있는 요동의 천산에 혈혈단신으로 등장한 것도 그렇고.
그가 이미 먼 과거부터 오랜 세월 살아온 존재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나로서는 분명 월영련주가 따로 노리는 바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낌새만 보면 마치 부활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니면 나처럼 환생이라도 한다든가.’
남이 들으면 개소리로 치부할 소리였지만 직접 환생이라는 현상을 겪어본 나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검신 영감을 대신해서라도 반드시 놈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 부디 검신 영감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저는 이대로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정말 혼자서 괜찮겠느냐?”
설표가 연신 불안한 눈빛을 보내오기에 나는 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저 뒤쫓기만 하는 건데요. 위험한 상황이다 싶으면 저도 곧장 몸을 빼겠습니다.”
“…알겠다. 맹주님과 총군사껜 그렇게 보고를 올려두마.”
***
진천문을 노리고 황아산으로 쳐들어갔던 일월성은 예상치 못했던 일월성주의 패배로 황급히 후퇴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번 습격을 위해 그동안 확보해 두었던 벽력탄마저 전부 동원했기에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야 아쉬워도 무사히 일월성주를 구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다소 안도하고 있었다.
“성주님의 상태는?”
그중 일월성주의 호위를 담당하는 좌호법과 우호법이 내달리는 마차 옆에서 함께 달리며 물었다.
그러자 마차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일단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행이군.”
“예. 하지만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 이상 달리는 속도를 높여서는 안 됩니다. 아직 내상이 아물지 않아서…….”
“명심하겠다.”
좌호법과 우호법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마차에서 떨어져나와 허공으로 치솟았다.
거목 위에 내려앉은 두 사람은 먼저 후퇴하고 있는 일월성의 무인들을 내려다봤다.
수백에 달했던 숫자가 지금은 고작 백오십을 넘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일월성의 최고무력집단인 흑웅대. 그런 흑웅대를 이끄는 흑웅대주마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하오주의 하나인 진천문을 우리가 너무 우습게 본 것인가?”
“아니. 진천문을 포함해 청해 무림의 저력은 전부 예상 범위 안이었지. 놈들은 결코 우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거다. 그놈만 아니었더라면.”
월영련주 다음가는 최고수인 일월성주를 단신으로 쓰러트린 존재.
알고 보니 흑웅대주 역시 그 존재에게 당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진휘.”
“련주님마저 경계하는 인물이라더니. 우리가 우습게 본 건 진천문이 아니라 그놈이었어.”
고작 그놈 하나 때문에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지금이라도 놈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놈은 언젠가 우리 손으로 처리해 두세.”
“그래야지. 그보다 지금은…….”
좌호법과 우호법 두 사람은 이번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지나쳐온 길을 응시했다.
은밀한 추격자의 존재감이 느껴져서였다.
“저놈들을 먼저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빠르게 정리하고 복귀하세.”
정천맹에는 총군사가 이끄는 정보 세력인 비선당이 존재한다고 했던가.
아마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게 그 비선당의 무인들일 거라는 생각에 좌호법과 우호법은 살기를 피워 올렸다.
***
“크악!”
단말마와 함께 신형 하나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비선당의 무인임을 증명하는 신분패 역시 반으로 쪼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 어떻게 우리의 추격을…….”
동료의 죽음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무인 하나가 눈을 치뜨며 중얼거렸다.
비선당의 추적술과 잠행술은 정천맹의 모두가 인정할 수준이었다.
거기다 자신들은 그 비선당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
한데 그런 자신들 앞에 웬 노인 두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검을 뻗어왔다.
잠행술과 추적술은 뛰어나나 무공은 그리 높지 않은 비선당의 무인들로서는 두 사람의 검을 막아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두 사람이 일월성주를 지키는 좌호법과 우호법이라면.
“감히 성주님이 가시는 길에 벌레 따위가 꼬이려 드느냐?”
아마 자신들을 뒤쫓아 본진이 어디인지 알아내려는 심산이었을 터.
좌호법과 우호법은 그걸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빠르게 비선당의 무인들을 죽여나갔다.
두 사람 앞에선 대항도, 도주도 소용없었다. 번갯불 같은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시체의 숫자가 차곡차곡 늘어갈 정도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열두 명이 당해 남은 숫자는 고작 셋.
그 셋을 한꺼번에 처리하려는 듯 좌호법이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검을 가로로 그었다.
순간.
쩡!
일(一)자로 그어지던 궤적이 중간에서 뚝 끊겼다.
“이 무슨…….”
좌호법은 흠칫 놀라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샌가 나타난 인영 하나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