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2장 추적(3)
“이 무슨…….”
공격이 가로막힌 노인은 당황이라도 한 듯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슬쩍 보기에도 나름 실력 있는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둘.
나는 시선을 돌려 두 노인으로 인해 죽을 뻔한 위기에 놓였었던 세 사람을 쳐다봤다.
“비선당 소속이십니까?”
내가 묻자, 세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월성 놈들이 황아산에서 패퇴하고 돌아선 다음 비선당의 추적이 곧바로 따라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중간에 포착당해 총 열다섯이었던 숫자가 셋으로 줄어들었다.
만일 내가 일월성주에게 묻혀둔 추종향을 뒤쫓는 게 한발만 더 늦었어도 나머지 세 사람 또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한발만 더 빨랐어도 열두 구의 시체를 보지 않아도 됐겠지.
그 안타까운 마음이 자연스레 분노로 뒤바뀌었다.
“잠시 물러나 계세요.”
나는 시체들 사이에 주저앉아 있던 세 사람을 한쪽으로 물러나게 한 뒤 천천히 시선을 되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 걸린 두 노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자신의 공격이 막혀 당황했었던 노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진천문에 있어야 할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그는 역시나 나를 곧장 알아보았다.
그들의 주인인 일월성주를 쓰러트린 게 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조소와 함께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일월성주를 괜히 살려 보낸 줄 알아?”
“…추종향이라도 써둔 게냐?”
“맞아. 무색무취에 가까운 상질의 추종향이지.”
무색무취의 추종향을 뒤쫓기 위해선 내 품 안에 들어있는 추향지(追香紙)가 필요했다.
손가락 길이 정도의 작은 종이로 추종향과 맞닿으면 색이 변질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사용한 추종향은 물에 씻어내는 걸로는 향을 벗겨낼 수 없었다. 내공으로 불태우거나, 혹은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향이 흩어지길 기다리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추종향이 사용됐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만큼 내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유씨세가의 소가주라 했던가. 어린놈이 무위뿐만 아니라 재주마저 좋구나.”
“칭찬은 사양하지. 그런다고 살려 보내진 않을 테니까.”
“클클. 살려 보내진 않는다?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네놈은 필시 본 월영련의 행보에 큰 방해물이 될 터. 이 자리에서 확실히 죽여놓고 가는 게 좋을 듯싶구나.”
“고작 둘이서 가능하겠어?”
내가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려 자세를 잡자 두 노인 역시 지긋한 살기를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고작 둘이라 했느냐? 일월성의 좌호법이자 우호법인 우리 두 사람의 합공은 성주님마저 쉬이 감당하지 못한다. 게다가 네놈은 성주님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이지. 그런 몸으로 우리를 상대해 살아남을 수 있을 성싶으냐?”
일월성의 좌호법과 우호법이라.
보통 한 단체의 수장을 지키는 호법들은 그에 걸맞은 실력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두 노인 역시 호법이란 지위에 걸맞은 실력자임은 틀림없었다. 내 손에 죽었던 일월성의 흑웅대주. 그 흑웅대주보다 더 윗줄.
하지만 두 노인이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은, 내가 일월성주를 상대할 때 도를 사용했다는 거였다.
즉 그들에겐 본 실력을 전부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런 내가 기세를 피워올리자 두 노인이 움찔 놀라는 게 보였다.
이어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그들을 도발했다.
“호법이란 작자들이 왜 황아산에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일월성주가 내 손에 무참히 쓰러져가는 그때까지도. 직무태만 아니야?”
내 말에 순간적이나마 두 노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보아하니 자신의 무위에 자부심이 넘쳐 혼자 나서길 좋아하는 일월성주의 성정 탓에 황아산에서는 호법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물론 두 노인의 탓은 아니었으나 호법이자 수하의 처지에선 충분히 자책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을 건드리자 역시나 두 노인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놈은… 그 주둥이부터 다물게 만들어야겠구나!”
한차례 일갈과 함께 두 노인은 내 좌우를 점하며 동시에 쇄도해 들어왔다.
*
캉! 카가강!
좌우 양방에서 내 요혈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검을 쉴새 없이 쳐내던 내가 눈을 빛냈다.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엔 흥분해서 달려든 두 노인의 맹렬한 공세에 내가 연신 밀려나는 모양새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밀려나는 척 수비에만 집중하니 도발에 당해 흥분했던 두 노인의 기세가 더욱 달아오른 상태였다.
아마 두 사람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흥분된 상태로 승리감에 도취한 만큼 그들은 마치 오랜 배고픔에 허덕이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앞뒤 재지 않고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걸렸네.’
겉으로 드러낸 표정과 달리 나는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두 노인이 했던 말대로 내 몸 상태는 아직 온전하지 못했다. 일월성주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진천문에서 며칠 치료와 휴식을 취했다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되려면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상태로 두 노인과 제대로 맞붙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이들을 상대하고 나선 다시금 일월성주를 뒤쫓아야 하는 만큼 체력과 내공의 안배도 필요했고.
해서 혹시나 하고 던진 도발이 두 노인에게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카가가강!
“큭!”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억눌린 신음까지 뱉어내자 순간 두 노인은 기회라는 듯 더욱 내공을 끌어올렸다.
두 노인의 검 위로 피어오른 검강 역시 잔뜩 기세를 뽐냈고 그대로 내 상체를 가르고 지나갔다.
열십(十)자의 모양으로 내 몸이 갈라지는 걸 보면서 그들은 씩 하고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괘월선보를 밟아 이형환위를 펼쳐 잔상만 남긴 채 두 노인의 뒤로 돌아들어 간 상태였다.
원래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내 잔상을 갈랐다는 걸 단숨에 깨달았을 터였다.
하지만 흥분한 상태여서 반응이 한발 늦었다. 그리고 그 한발 늦은 반응이 내게는 충분한 여유로 다가왔다.
천일백야검법의 제이초식 팔섬관혼(八暹貫魂).
여덟 줄기의 섬광은 자신을 좌호법이라 칭한 노인의 몸을 꿰뚫었다.
벌집처럼 여덟 개의 관통상을 짊어진 좌호법은 부릅뜬 두 눈과 함께 그대로 허물어졌다.
“이, 이런!”
반대로 우호법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황급히 몸을 휘돌렸다. 동시에 내 공격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는지 곧장 수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또 한 번 이형환위의 수를 펼쳤다.
그 상태로 쥐고 있던 검 말고 허리춤에 메여진 또 다른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극쾌의 발검술인 제일초식 일섬단세(一暹斷世).
내가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싸우는 도중에도 언제든 일초식을 펼쳐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처럼.
촤아악!
이형환위에 속아 등을 내준 우호법 역시 사선으로 갈라진 상처에서 핏물을 쏟아내며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쿵.
계획대로 내공 소모가 가장 적은 전반부 초식만으로 두 노인을 쓰러트린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 와중에, 나는 이번 싸움으로 내 경지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걸 깨달았다.
일월성주의 좌호법과 우호법은 분명 인극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이었다.
그런 두 고수를 상대로 이뤄진 싸움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흘러갔다.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일련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두듯이.
‘검에 담긴 의지가 상황마저 조율한다.’
일월성주와의 혈전으로 발판을 마련했다면 이번 싸움은 그 발판을 딛고 나아가는 순간이었으리라.
전생에도 느껴본 적 없는 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전신으로 받아들이면서 내 호흡도 어느새 점차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
“감사합니다.”
비선당 청해지부장 배종무(裴淙嫵)가 내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내가 구해 낸 비선당의 무인 세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그의 뒤로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각자 은소화(恩昭華)와 조태경(赵太慶)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사내였다.
예상대로 그들은 총군사인 묵가후의 지시를 통해 패퇴한 일월성의 뒤를 쫓아 놈들의 향후 행방을 조사해가던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비선당 소속인 자신들의 추적이 이토록 쉽게 들통날 줄은 몰랐다며 비통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귀공 덕분에 저희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배종무가 존칭까지 써가며 연신 감사를 전해오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좀 더 서둘렀다면 더 많은 이들이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니죠. 호칭도 편히 해주시고요.”
사양과 함께 내가 복룡추호대원임을 밝혔다. 맹의 무인으로서 청해지부장인 배종무의 지위가 나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종무는 태도를 고수했다.
“비선당 소속인 만큼 공자님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총군사님께서도 본당의 무인들에게 행여 공자님과 마주치게 된다면 대우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는 경고 아닌 경고를 해둔 상황입니다.”
“…….”
정천맹이 자랑하는 정보 세력이자 묵가후가 이끄는 비선당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분위기를 보아 배종무는 내가 백의문주라는 사실 역시 파악하고 있는 듯싶었다.
덕분에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은소화와 조태경마저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나로서는 딱히 상관없는 일인지라 그에 대해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부턴 제가 놈들을 뒤쫓겠습니다.”
세 사람에겐 시체들을 수습하고 복귀하길 제안했다.
이후에 내가 일월성 놈들을 뒤쫓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선당 청해 지부에 들러 정보를 전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전사자들은 물론 수습해야겠으나 총군사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임무 역시 이대로 포기할 순 없습니다. 해서 저희 중 한 명이라도 공자님과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실 순 없는지…….”
배종무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추종향을 따라 적당한 속도로 일월성 놈들을 뒤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을 데려간다면 후에 정보를 전하거나 보고를 올릴 때도 더 수월할 테고.
“그렇게 하시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종무가 눈짓을 보냈다. 그의 눈짓을 받은 은소화는 조심스레 내 앞으로 나섰다.
“저희 청해 지부에서 경공과 잠행술, 추적술 등이 가장 뛰어난 아이입니다.”
배종무의 짤막한 소개와 함께 은소화는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공자님의 명성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강호에선 이미 공자님을 잠룡(潛龍)이라 부르고 있지요.”
“잠룡… 이요?”
처음 들어보는 말에 내가 반문하자 은소화는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전해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일월성과의 싸움에서 진천문을 승리로 이끈 공자님의 명성이 하남에서부터 퍼져나가 지어진 별호입니다. 오룡일화의 잠룡이라고…….”
“…….”
천하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가장 명성이 높다는 사룡일화.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가 오룡일화가 된 건가.
예상치 못한 명성을 얻긴 했지만, 그간 월영련을 상대하고자 지나온 행보를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나 싶었다.
이제는 딱히 정체를 숨길 필요성도 없는 만큼 나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가문의 어른들도 기뻐하시겠지.
유씨세가의 소가주가 오룡일화라니.
순간 머릿속으로 부모님의 기뻐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왕삼 녀석도.
조만간 시간을 내 가문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은소화와 함께 일월성주를 마저 추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