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인 환생했다-109화 (109/150)

#109. 3장 회생(3)

“련주님!”

“련주님께서 무사하시다!”

예상치 못한 월영련주의 등장과 건재함은 적들의 사기와 기세를 잔뜩 끌어 올렸다.

내가 펼쳐낸 검령백분의 초식을 감당하지 못해 무력감을 느끼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내 손에 쓰러졌건, 월영련주가 가세한다면 승리는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분명 베었다고 생각했으나 단룡위의 탈을 쓴 월영련주는 내 눈에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군.’

겉으론 무사해 보였으나 놈은 분명 썩 깊은 내상을 입었다. 눈빛을 교환하면서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얼음덩어리가 완전히 녹아내린 뒤에야 눈을 뜨는 게 가장 최적의 상황이었으리라.

하지만 내가 쏘아낸 무형의 검강으로 인해 그 상황이 깨져나갔다. 동시에 위협을 감지한 월영련주는 예정보다 앞서 눈을 떠 기습을 막아낸 듯싶었다.

물론 그걸 고려해도 지금의 형국은 내게 불리했다.

단전의 내공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월영련주가 살아 있다는 건 상정 밖이어서 아낌없이 실력을 내보인 결과였다.

결국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월영련주. 이제는 단룡위라고 칭해도 될 놈은 나와 적당한 거리를 놓고 멈춰 선 상태였다.

그런 우리 주변을 여전히 적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때 단룡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마주하는 건 두 번째로군.”

“나로서는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하하. 그런가?”

중년인의 모습이었던 그때와는 풍기는 기세만 같을 뿐 나머진 단룡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쨌건 죽여야 할 놈이란 건 변함없는 사실이어서 나는 일단 내공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이기어검으로 제어하고 있던 수십 자루의 검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대로 검령백분의 초식을 유지하기엔 내공이 모자라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최대한 내공을 조절하면서 놈과 나머지 적들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을 때였다.

“이대로 계속 싸우겠다는 건가?”

“그럼 항복이라도 할까?”

내가 반문하자 단룡위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항복보다는… 처음 만났을 때 건넸던 제안을 고려해보는 건 어떤가? 그 제안은 아직 유효하네.”

“네 밑으로 들어가라고?”

“본좌의 자리를 제외한 가장 높은 지위를 주마.”

그 제안은 제법 파격적이었던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무인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내게는 하등 쓸모없는 제안이었다.

“련주의 자리를 준다면 제안을 고려해보지.”

물론 련주라는 자리 역시 필요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월영련의 괴멸이니까.

단룡위도 어차피 내가 거절할 걸 예상했는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이 역시 두 번째 거절이로군.”

“세 번째까지는 가지 말자고.”

“그래야겠지. 대신 승부를 보는 것 역시 그때처럼 다음으로 미루는 게 어떻겠나?”

“승부를 또 미루자?”

첫 만남 때도 그랬다. 당시의 놈은 검신 영감과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나와 싸우길 꺼렸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몸 상태가 썩 좋진 않은가 봐?”

“부정하진 않겠다. 네놈의 기습 덕에 역천이혼대법(逆天移魂大法)이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어. 제법 타격을 입었지.”

역천이혼대법.

그게 놈이 먼 과거부터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술법인 건가. 한데 그런 술법의 이름을 밝히는 이유가 뭐지?

의아해하고 있는 내 속내를 읽었는지 단룡위는 계속 말했다.

“그래. 이 대법 덕분에 본좌는 무한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다만 역천이혼대법을 펼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만한 육체면 본좌의 마지막 삶을 불태우기엔 충분하니까.”

“…마지막 삶?”

“그렇다. 재밌는 걸 하나 보여주마.”

단룡위는 그 말과 함께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의 양팔 위로 흑색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엄연한 마기였다.

그것도 무려 천마의 기운과 아주 흡사한.

“천마의 무공을 익혔나?”

“바로 알아보는구나.”

“마교의 교주라도 되려는 건가?”

“조건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천마의 무공. 마교의 후계자였던 단룡위의 젊은 육체. 그리고 본좌라는 존재. 머지않아 본좌는 전대의 천마보다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개소리하지 마. 내가 있는 한 넌 천마가 되지 못해.”

내가 기세를 피워올리자 단룡위는 점차 표정을 굳혀갔다.

“그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네놈의 그 검법은 전대의 천마마저도 당해내지 못한 천영검대주의 무공이니까. 마음 같아선 본좌 역시 네놈을 이곳에서 죽여놓고 싶다만….”

“그럼 헛소리 늘어놓지 말고 덤벼. 충분히 오래 살았잖아? 네가 있어야 할 곳은 현세가 아니라 저세상이다.”

“그럴 순 없지. 승부를 보려면 지금은 네놈도, 본좌도 목숨을 걸어야 할 테니. 아직 우리에겐 할 일이 많이 남지 않았느냐?”

“아니. 내 할 일은 지금 이곳에서 주제도 모르고 천마가 되려 하는 네 목을…….”

내가 손에 쥔 검을 뻗으며 바닥을 박차려 할 때였다.

“이곳까지 혼자 온 게 아니더군.”

“뭐?”

“이 근처에 쥐새끼 한 마리가 더 숨어 있다는 걸 안다. 젊은 계집이라던가?”

순간 나와 함께 일월성 놈들을 추적해왔던 은소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복귀하는 시간이 지체되면 먼저 돌아가라고 일러두었었는데.

‘내가 몸을 빼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속으로 그녀의 안위를 염려하는 사이 단룡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머금었다.

“이제 네놈은 본좌와 승부를 보려면 그 계집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처지로구나.”

“천마가 되고자 한다더니 하는 짓은 영락없는 파락호 새끼네.”

씹어뱉듯 말한 내 조롱에 분노한 건 단룡위가 아니라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일월성의 무인들이었다.

단룡위는 그런 자신의 수하들을 향해 손을 뻗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얕은 도발 따위에 넘어가진 않으니 슬슬 선택하는 게 어떻겠느냐?”

“…….”

나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손님이 돌아가신다니 길을 열어주거라.”

단룡위의 명령에 따라 포위망 한쪽에 출구로 향하는 길목이 생겨났다.

나는 검을 집어넣고 그 길을 따라 걷다가 슬쩍 물었다.

“네놈들은 이제 월영련이 아니라 마교가 되는 건가?”

내 물음에 이번에는 단룡위가 대답 대신 침묵을 고수했다.

***

“이런…….”

수풀 속에 은신한 채로 일월성의 성채를 주시하던 은소화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성채와는 제법 거리가 멀었기에 자신의 위치가 발각될 줄은 몰랐는데 어느새 사방 곳곳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채 안으로 잠입했던 유진휘의 복귀를 기다리느라 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던 게 실수였다.

시간이 지체되면 먼저 돌아가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미 유 공자에게 한 번 구제받은 목숨이야. 나 혼자 살자고 먼저 도망칠 순 없어.’

지금까지 일월성 놈들을 추적하며 작성했던 보고서와 위치를 표기한 지도 등은 이미 비선당 청해 지부로 보내둔 뒤였다.

비선당 무인들은 전서구 대신 제각기 특유의 짐승들을 연락용으로 길러두고 있었다.

은소화 역시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뒤따르는 백(白)담비 몇 마리를 애용했다.

덕분에 자신의 임무는 여기서 끝이었다.

유진휘와 함께 무사히 복귀할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은소화는 입술을 깨물며 품속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내 쥐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최대한 많은 적을 길동무로 삼겠다는 결의와 함께 습격에 대비했다.

그에 맞춰 사방에서 피어오르던 살기가 점차 거리를 좁혀왔다.

이윽고.

파악!

수풀 너머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짓쳐들어왔다.

카가강!

양손에 쥔 단검을 방패 삼아 공격을 막아낸 은소화는 반격을 위해 곧장 팔을 뻗었다.

하지만 뒤따라서 몸을 날려오는 적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 금세 포위망에 갇혀 수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으윽!”

비선당 무인치고는 제법 무위가 높은 그녀였다. 덕분에 어떻게든 버텨보고는 있지만 열이 넘어가는 적들의 공세는 만만치가 않았다.

촤악!

결국 가슴 위로 무복이 갈라지면서 핏물이 튀어 올랐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은소화는 비틀거리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무인 중 하나가 눈을 빛냈다.

“…쥐새끼 한 마리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긴 했는데.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운걸?”

“흐흐. 그렇습니다. 쥐새끼가 이런 젊은 계집일 줄이야.”

“어쩔까요. 조장?”

놈들에게서 피어오르던 진득한 살기는, 어느샌가 색욕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그것도 열이 넘는 숫자였다.

은소화로서는 목줄을 옥죄던 살기보다 더 견디기 힘든 기운이었다.

“역겨운 놈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무릎 꿇은 자세에서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 일직선으로 뻗은 단검은 정확히 조장이라 불렸던 장년인을 노렸다.

파박!

하지만 장년인은 아예 맨손으로 단검을 틀어쥐었다. 이어 손아귀에 힘을 주자 은소화의 얼굴과 장년인의 얼굴이 코앞에서 맞닿았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도 제법 곱구나.”

“다, 닥쳐라.”

“계집의 반항은 사내의 아랫도리를 더욱 굵어지게 만들지.”

장년인이 대소를 터뜨리자 그의 수하들도 따라 웃으며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조장 다음은 내 차롑니다. 망가지지 않게 살살 다루시라고요.”

“그다음은 접니까?”

“부조장 다음은 나지, 이 새끼야.”

그들은 저마다 색욕을 불태우며 한마디씩을 더했다. 그러는 사이, 장년인에게 붙잡혀 있던 은소화는 어느샌가 혈이 집혀 몸도 말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됐다.

이대로라면 적들의 노리개가 되어 바닥을 구르다 치욕적인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저항보다는 차라리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분한 마음에 쏟아지는 은소화의 눈물은 오히려 장년인의 욕망을 북돋웠다.

“우는 모습도 아주 보기 좋구나, 크흐흐.”

이어 장년인은 은소화를 향해 우악스러운 손길을 뻗었다. 먼저 넝마가 된 무복을 모조리 벗겨낼 심산으로.

장년인의 수하들은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서서 포위망을 유지했다. 차례를 기다리는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안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장년인의 거친 손길이 은소화의 무복에 맞닿는 그 순간.

번쩍! 하는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눈만 끔뻑였다. 분명 주변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별안간 터져나온 섬광의 진원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어억! 조, 조장!”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고, 그곳엔 언제 잘려 나갔는지 모를 장년인의 목이 피를 토해내며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적이다! 기습을 조심해라!”

이미 죽어버린 장년인 다음 가는 지위의 부조장은 황급히 주변을 경계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수하들 역시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또 하나의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푸확!

“끄윽!”

이번에는 수하 하나가 가슴의 관통상을 움켜쥐며 무너져내렸다. 그걸 시작으로 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나머지 역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수하들의 무력한 죽음을 지켜보는 부조장으로서는 이 믿기지도 않는 상황 앞에서 두려움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자신만 남기고 모두가 죽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 모습을 드러내라! 우리는 일월성의 무인들이다! 감히 이곳에서 우릴 건드리고 살아남을…….”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치떴다. 푸욱, 하는 섬뜩한 소리가 가슴께에서 울려 퍼졌다. 시선을 내리니 검날이 가슴을 뚫고 삐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간신히 등 뒤로 고개를 돌리자 검을 쥔 채 서 있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 너는…….”

자신들의 주인인 월영련주마저도 경계하는 그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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