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4장 잠룡(1)
열 명 남짓한 숫자의 무인들을 처리하고 난 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은소화를 바라봤다.
혈이 짚여 통나무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몰골은 영 말이 아니었다.
몸 곳곳에 새겨진 검상은 깊진 않았으나 상처의 목적이 제압이나 죽음이 아니라 유린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복 역시도 이미 걸레짝처럼 찢겨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니, 단룡위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월영련주를 그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은 게 옳았다는 판단이 섰다.
내가 돌아오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팟!
나는 제압되었던 은소화의 혈도를 풀어주고 진기를 불어넣어 내상을 돌봐줬다.
“고마워요.”
혈색이 돌아온 그녀는 옷가지를 추스른 뒤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다음은 짧은 사과였다.
“그리고 죄송해요. 비선당의 무인인 주제에 은신이 발각되다니…….”
그녀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은소화는 그저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죠. 정보는 충분히 캐냈으니까요.”
“네.”
더 이상 적들의 기습이나 추격은 없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방심은 할 수 없어서 나는 은소화와 함께 십만대산을 벗어났다.
그녀의 속도에 맞춰 산길을 내달리며 나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애초에 일월성주를 살려두고 그를 추적해온 건 월영련 본진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발견한 게 일월성의 성채.
월영련의 본진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월영련주가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것도 마교의 후계자 중 하나였던 단룡위의 육체로.
진천문을 습격했던 일은 일월성주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을 뿐, 놈들의 주목적은 월영련주의 부활이었다.
목적을 달성했고 성채의 위치가 노출됐으니 놈들 또한 십만대산을 벗어나 자취를 감출 게 분명했다.
다행인 건 일월성주는 상처가 깊어 족히 일 년은 병상에 누워있어야 한다는 거였고 일월성의 전력 역시 감소했다는 거였다.
황아산부터 이곳 십만대산까지. 내 손에 죽어 나간 무인들의 숫자가 몇이던가.
게다가 월영련주, 아니 이제는 단룡위라고 불러야 할 놈도 몸 상태가 온전치 않았다. 다음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이번 피해로 놈들의 행보에 차질이 생겼을 터.
월영련은 아마도 예전처럼 잠시 숨을 죽인 채 재정비의 시간을 가질 듯싶었다.
‘단룡위를 놓치게 된 건 아쉽지만, 정천맹도 이걸로 놈들의 계략에 대비할 시간은 벌었다.’
단룡위라는 존재로 되살아 난 게 단순히 그 육체가 탐나서였는지 아니면 마교의 후계자였다는 그 신분까지 이용해 무언가를 꾸미려 하는 건지도 확실히 알아봐야 할 테고.
‘이게 도움이 좀 되려나.’
성채 안으로 잠입해있는 와중에 나는 건물 곳곳에서 무언가 중요해 보이는 듯한 여러 가지를 닥치고 품속에 챙겨 넣었었다.
아직 내용은 알 수 없는 서류나 서찰에 책자 몇 권과 무엇보다 영약까지.
영약은 슬쩍 봤을 때도 값어치가 상당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되살아난 단룡위를 위해 준비해두었을 영약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가로챘으니 이 또한 놈의 전력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데 보탬이 되겠지.
반대로 그만큼 내가 강해질 것이고.
‘물론 이걸로는 부족하다.’
현재 내 무위는 전생의 나보다 조금 더 앞선다. 하지만 눈앞에서 단룡위를 놓쳤다. 은소화를 인질로 잡은 놈의 계책 덕분이라고 하지만 좀 더 강했다면 애초에 놈이 되살아나기 전에 얼음덩어리 안에서 확실히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남을 탓할 것 없이 내 실력이 부족한 데서 피어오른 결과였다.
게다가 단룡위는 분명 전생의 천마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만큼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만일 놈이 현생의 천마가 되려 한다면, 그 천마 역시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전생에는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현생에는 지키기 위해서.
유진휘의 삶과 유진휘에게, 아니 이제는 내게도 소중한 존재가 된 이들을 지켜내야 하니까.
***
“유진휘라…….”
월영련주 단룡위가 텅 빈 건물 안에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월성의 성채에 머물고 있던 수하들은 이미 전부 떠나고 난 뒤였다.
자신의 회생을 위한 역천이혼대법(逆天移魂大法)이 마무리되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큭!”
순간 단룡위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유진휘의 기습으로 본래보다 앞서 강제적으로 눈을 뜬 탓에 내상이 꽤 깊었다.
해서 수하들이 준비해 두었다던 영약을 복용하고자 했을 땐 영약이 사라졌다는 사실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홀로 잠입한 와중에 용케도 이것저것 챙겨갔구나.”
몸속부터 타고 오르는 고통이 썩 심할 텐데도 단룡위는 미소를 머금었다.
왜인지 유진휘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면 적개심보다는 뜻 모를 동질감이 피어올랐다.
전대의 천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천영검대주 천우혁. 그의 무공을 이어받은 인물이기 때문인가.
어쩌면 유진휘라는 존재는…….
“그래. 본좌가 가장 주의해야 할 건 검신이 아니라 네놈이었더냐.”
단룡위의 육체를 통해 자신은 천마가 되고 월영련은 마교라는 이름을 이어갈 세력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은 검신이라 여겼기에 중년인이었던 원래의 몸을 이용해 그를 꺾어두었다.
그때까지도 유진휘는 그저 경계해야 할 인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만남을 통해 확신이 생겼다.
놈이야말로 천마가 되고자 하는 자신을 저지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 거라고.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은 충분히 놈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역천이혼대법을 통해 삶을 유지해온 이백 년의 세월과 경험이 머지않아 단룡위의 육체 안에서 만개하게 된다면…….
“게다가 본좌 역시 천마의 독문무공을 모두 익히고 있는 상태다.”
물론 대성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할 테지.
“세 번째 만남이 기대되는군. 그때는 본좌도 놈도…….”
첫 만남과 두 번째 만남에서 보지 못했던 승부의 결과를 그때는 제대로 보게 될 거란 판단이 섰다. 그리고.
쿠구구궁!
다음을 기약하며 내공을 끌어올린 단룡위의 기세가 대번에 성채를 집어삼켰다.
콰과광!
결국 기세를 이기지 못한 성채는 건물째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십만대산을 벗어나 계속 이동한 나는 은소화와 함께 비선당 청해지부에 들렀다.
지부장인 배종무는 우리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먼저 기뻐했고 그다음으로 우리가 알아낸 정보들을 전해 들으며 경악해하고 있었다.
월영련주가 새로운 육체를 얻어 되살아났다는 말에는 충격을 받아 눈으로도 모자라 코와 입까지 쩍 벌렸다.
하긴, 이건 누가 들어도 놀랄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가.”
“역천이혼대법이라더군요.”
“역천이혼대법?”
“놈이 제 입으로 실토한 사실입니다. 그걸로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삶을 유지해왔다고 합니다.”
“허. 그럼 요동의 천산에서 놈이 겪은 죽음은…….”
“전대 맹주님을 노리고 일부러 자신을, 정확히는 쓸모없어진 몸을 희생한 겁니다.”
“…개자식이!”
전말을 파악하게 된 배종무는 연신 분노를 토해냈다. 전대 맹주인 검신을 모셨던 맹의 무인들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분노였다.
단룡위는 되살아났지만 검신 영감은 아직도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후. 일단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자님이 아니었더라면 저희는 애초에 놈들을 추적하는 임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 이런 엄청난 정보까지 파악해주셨으니.”
목숨은 물론 임무까지 대신해서 완수해 준 것에 대해 배종무는 입이 닳도록 감사한 마음을 전해왔다.
“감사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희에게 공자님은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비선당 청해지부의 힘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지부장의 자리를 걸고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배종무의 말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짓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가지라뇨? 뭐든 말씀하십시오.”
부탁이 뭔지 듣지도 않고 흔쾌히 허락하겠다는 표정이었기에 나는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지부장께선 이미 제가 백의문의 문주라는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죠?”
“…내색하지 말라는 총군사님의 명령이 있긴 했지만, 인지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겠지.
총군사 묵가후가 이끄는 정천맹의 대표적인 정보 세력이니까.
내게 필요한 게 바로 그 부분이기도 했다.
“백의문의 이름으로 저만의 독자적인 정보 세력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 내 결심을 들은 배종무가 잠시 침묵하다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
내가 알아낸 정보는 청해지부를 통해 다시 정천맹으로 보고가 올라갈 터였다.
해서 나는 급하게 복귀하지 않고 이곳에서 먼저 제대로 몸을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월성주와의 혈전으로 입은 상처가 아직 모두 회복되지 않았고 그 뒤 곧장 일월성 놈들을 추적해 성채에 잠입했다가 복귀한 후였다.
상처도 상처이거니와 체력이나 내공이 모두 바닥이었다.
그런 내가 며칠 머무르겠다는 말에 배종무는 거처와 식사 그리고 의원까지. 모든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다섯째가 되는 날 아침에 무사히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벌써 떠나신단 말입니까? 총군사님께 보고를 올려두었으니 좀 더 마음 편히 쉬었다 가시지 않고.”
몸을 회복하자마자 떠난다는 말에 배종무는 무척 아쉬워했다. 나는 그런 그의 배웅을 받으며 청해지부의 정문을 나섰다.
“맹으로 복귀하기 전에 산서에 들릴까 합니다.”
“산서라면…….”
백의문과 유씨세가가 있는 곳.
입맹을 결심해 출가한 이후 아직 가문에 돌아가 본 적이 없는 만큼 이번 기회에 잠시 다녀오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공자님께서 부탁하신 대로 이들을 데려가십시오.”
정문을 나서는 내게 배종무가 세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한 명은 나와 함께 일월성 놈들을 추적했던 은소화.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그녀만큼이나 비선당 청해 지부에서 실력이 좋다는 사내들이었다.
“셋 모두 공자님께 적잖은 도움이 될 겁니다. 특히 정보 수집 면에서는 저희 지부에서 이들을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제가 이들을 데려가면 청해 지부의 전력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닙니까?”
며칠 전만 해도 비선당 청해 지부의 무인들이 열 넘게 희생된 마당이었다.
하지만 배종무는 끄떡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안타까운 희생이 있긴 했지만 청해 지부엔 그들의 뒤를 인재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여기 세 명은 직접 공자님을 따라가고 싶다며 자원한 이들입니다.”
자원했다는 말에 나는 세 사람을 천천히 둘러봤다.
은소화는 그렇다 쳐도 나머지 둘은 처음 보는 사내들인데.
그때 사내 중 하나가 내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비선당의 무인으로서 오래전부터 유씨세가 소가주님의 명성을 가장 먼저 접해왔습니다. 가문을 지키고자 백의문을 세우신 일부터 시작해….”
사내는 내가 환생한 이후 벌인 일들을 조목조목 짚어나가며 경외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마지막엔 자신도 백의문의 문도가 되어 나를 따르고 싶어 한다는 말까지.
사내의 말이 끝나자 배종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혹시나 염려하실까 하여 총군사님께도 말씀을 드렸는데 오히려 인원을 선별하여 함께 보내라는 확답을 받아둔 상태입니다.”
이들은 엄연히 정천맹의 무인들이기에 데려가도 되는 건가, 내심 걱정했었는데 묵가후가 허락했다면야.
“감사합니다.”
나는 배종무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은소화와 두 사내를 수하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