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4장 잠룡(2)
청풍(靑風)과 청운(靑雲).
은소화와 함께 백의문의 문도로 받아들인 두 사내의 이름이었다. 비선당 청해 지부에서는 풍운(風雲) 형제라 불리며 꽤 활약했던 사내들이라고.
“청가장(靑家莊). 청해에서 경공과 보법으로 유명했던 가문의 자제들이었습니다.”
산서로 돌아가는 길에, 밤이 깊어 적당한 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하는 와중이었다.
청풍과 청운은 내 허기짐을 걱정하며 먼저 나서서 짐승을 사냥해 오겠다고 숲으로 향했다.
은소화는 나와 둘만 남게 되자 차분히 청풍과 청운에 관해 소개해 주고 있었다.
“청가장은 정마대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에 마인들의 손에 의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랬군.”
마교의 본산이 있던 신강과 맞닿아 있는지라 정마대전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본 건 청해의 문파와 무가들이었다.
그 때문에 청해 무림은 마교라는 이름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거대했다.
청풍과 청운 역시 마교를 향한 복수심을 품고 입맹하여 경공이라는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비선당의 무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전대 천영검대주셨던 천우혁 대주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지요.”
존경씩이나.
전생의 나는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복수를 바라던 사내가 운 좋게 기연을 얻었고 때마침 검신 영감을 만나 마교 그리고 천마와 싸울 수 있었을 뿐.
“존경할 만한 분이셨지.”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나는 은소화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청풍과 청운이 선망하는 대상이라는데 거기다 대고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자 은소화는 옅은 미소와 함께 슬며시 나를 바라봤다.
“그런 천우혁 대주님께 제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두 사람은 크게 기뻐하기도 했어요. 천마를 쓰러트린 천하제일인. 그런 분의 유지를 이었다는 유 공자의 등장을 동경하기도 했고요.”
선망의 대상이 전생의 나를 통해 지금의 내게로 이어진 건가.
“그뿐인가요. 백의문주. 복룡추호대원. 오룡일화의 하나인 잠룡. 비선당의 무인이기 이전에 강호의 젊은 무인으로서도 두 사람은…….”
“두 사람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했으니 그만해도 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두 형제의 소개가 점점 내 얼굴을 금칠할 요량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멋쩍은 얼굴로 손을 내젓자 은소화는 다시금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주님.”
며칠 전까지는 비선당의 무인이었지만 이제는 엄연히 백의문의 사람이 된 그녀였기에 호칭은 금세 바뀌었다.
나 역시 자연스레 하대하고 있었고.
때마침 청풍과 청운이 사냥을 끝내고 돌아왔다.
두 형제는 양어깨에 종류별로 짐승 몇 마리씩을 둘러맨 채였다. 한 끼 식사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문주님!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의기양양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은소화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자신이 했던 말들을 저들이 대변해주고 있지 않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
열흘 가까이 내달려 산서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백의문으로 향했다.
이때부터 나는 품속에 보관하고 있던 백색 가면을 썼고 청풍과 청운은 그 모습을 보자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문주님의 가면이군요!”
“백의문주임을 증명하는 검상이 새겨진 백색 가면…….”
두 형제는 영웅담 속의 주인공을 마주한 것처럼 눈을 빛냈다.
“…….”
나는 굳이 반응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앞장섰다. 지난 열흘간 녀석들의 성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였다간 놈들의 흥분에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었다.
반대로 은소화는 자신이 새로이 몸담아야 할 백의문을 눈앞에 두고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이끌고 백의문의 정문을 열어젖혔다.
활짝 열린 문을 넘어 외원으로 들어섰을 때, 허공을 격하고 날아든 백의검대원들이 좌우에 일렬로 늘어섰다.
이어.
“문주님을 뵙습니다!”
사십에 달하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 선두에선 백의검대주인 이자청과 부대주인 언사룡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인지 놈들은 썩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청해에서 출발하기에 앞서 공손량에게 먼저 서찰을 보내두긴 했었다.
맹으로 복귀하기 전에 잠시 산서에 들를 거라는 말과 함께 백의문의 이름으로 독자적인 정보 세력을 구축할 거란 계획을 알리는 서찰이었다.
그걸 위해 은소화와 청풍, 청운 형제를 데려갈 거라는 내용도 적어두었고.
아마도 이자청은 새로이 받아들이기로 한 은소화와 풍운 형제에게 기강을 확립해 주려고 하는 듯 보였다.
‘아.’
동시에 눈동자만 굴려 은소화의 용모를 살펴보는 이자청의 눈빛까지.
‘그러고 보니 백의문은 죄다 사내놈들뿐이었지.’
백의문주인 내 정체가 유씨세가 소가주라는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백의문에는 그 흔한 시비나 하인조차 고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상관없다고 했지만, 공손량의 제안이었기에 지금껏 따르고 있는 상황.
때문인지 이자청은 한껏 내리깐 목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다가섰다.
“문주님의 무사 복귀를 감축드립니다.”
절도 있는 자세에서 이어지는 포권지례. 녀석에게서 풍기는 기개는 흡사 명문의 절정 고수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해서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퍽!
“억!”
녀석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뭐 하냐?”
혀를 차며 묻자 이자청은 머리를 움켜쥐며 울상을 지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안 하던 짓을 하냐고.”
“안 하던 짓이라뇨. 저는 평소처럼… 으악!”
내가 재차 팔을 들어 올리자 이자청은 황급히 몸을 날려 자리를 피했다.
녀석 덕분인지 백의문의 외원에선 한바탕 대소가 터져 나왔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백의검대원들을 뒤로하고 집무실로 향하는 나를 맞이한 건 공손량이었다.
“고생은 무슨.”
“청해에서 벌어진 일을 대부분 전해 들었습니다. 문주님의 활약도 함께였지요.”
“그 덕분에 과분한 별호까지 얻었어.”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나마 문주님의 나이가 어린 걸 고려해 잠룡이라는 천하제일의 후기지수가 되신 거지요. 그게 아니었다면 후기지수가 아니라…….”
“됐어.”
내가 피식 웃자 공손량도 따라 웃으며 뒷말을 흐렸다.
이어 공송량은 내가 데려온 세 사람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전부 비선당 소속의 무인들이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공총관님.”
공손량의 질문에 풍운 형제와 은소화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공손량을 나를 대하듯 따르라고 미리 지시해 두었기 때문이다.
총관이자 문주 대리이며 백의문의 모든 대소사를 관리하는 인물이니만큼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였다.
“너무 긴장들 하지 말게. 백의문의 규율은 그리 엄하지 않으니까. 다만 여기 계신 문주님의 의지만을 따르겠다는 충성심. 그거면 충분하네.”
“명심하겠습니다!”
공손량이 나름 푸근한 미소로 긴장을 풀어주었음에도 세 사람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들이라 나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사이에 공손량은 세 사람에게 적당한 거처를 마련해주고 휴식을 취하게 해주었다.
이후 나는 공손량과 둘이서 집무실 안에 자리 잡았다.
그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백의문과 유씨세가를 포함한 산서 무림은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더불어 그동안 종승재가 이끄는 성화상회와의 유대가 깊어져 제법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었고 그로 인해 백의문의 재력이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까지.
“돈이 모자랄 일은 없겠어.”
백의문만의 독자적인 정보 세력을 구축하려면 무엇보다도 돈과 인재가 필요할 거라고 예상했다.
한데 그 두 가지가 당장 어느 정도 충족된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정보가 필요할 땐 항상 외부의 정보 세력을 이용하고 있었고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돈까지 예산에 포함한다면 부족할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때 백의문의 역할은 유씨세가가 있는 산서 무림의 비호(庇護)였다.
내 가문뿐만 아니라 가문과 연관된 모두를 지키려면 무력은 물론이고 정보가 가장 중요했다.
더군다나 이제는 월영련이 나를 대놓고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다. 온갖 계략과 음모에 능통하기도 한 놈들이니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련된 모두를 노릴 것도 분명했고.
일차적으로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독자적인 정보 세력의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앞으로는 나 역시 정보가 필요할 때가 많을 것이다. 그때마다 외부의 정보 세력에 의탁하거나 묵가후에게 부탁해 비선당을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백룡각(白龍閣)이 어떻겠습니까?”
공손량은 어느새 정보 세력의 이름까지 생각해두었는지 내게 제안해왔다.
“백의문의 이름과 잠룡이라는 문주님의 별호를 빌려본 것입니다.”
“백룡각이라. 그렇게 해.”
이날, 백의문에는 백의검대 이후 또 하나의 전력이 탄생했다.
***
다음 날.
은소화와 청풍, 청운 형제를 공식적으로 백의문 백룡각 소속의 제자들로 임명했다. 동시에 세 사람에게 따로 지시까지 내려두었다.
은소화는 산서 무림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후 백룡각의 제자가 될 자질을 갖춘 이들을 찾아 인원을 늘려나가는 임무를 맡았다.
반대로 청풍, 청운 형제는 산서가 아닌 외부에서 활동하며 나와 백의문 사이의 연락책 및 월영련 놈들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이었다.
당장은 이 셋이 전부였지만 머지않아 백룡각 역시 백의검대에 버금가는 중요한 전력으로 성장시킬 계획이다.
그랬기에 각주의 자리에 누구를 앉혀야 할지 고민이었다.
공손량은 이미 총관 역할로도 충분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홍야는 일장로이자 백의검대원들의 무사부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한창 고민하던 중 이자청이 내게 슬쩍 다가왔다.
“제가 하겠습니다, 문주님.”
“넌 백의검대주잖아?”
“둘 다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백의검대주. 백룡각주.”
“…….”
헛소릴 늘어놓는 이자청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자 녀석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속셈이야 뻔하지. 백룡각주가 되어 은소화와 친해질 명분을 만들려는 거잖아?”
“그럴 리가요. 문주님의 고민을 덜어드리려는 제 의지를 왜곡하지 마십…….”
퍽!
“억!”
머리를 후려쳐 입을 다물게 만들자 이자청은 괜히 나섰다며 한숨을 내쉬다가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만 있던 공손량이 내게 한 사람을 추천해 주었다. 나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은연중에 녀석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왕삼.
원래는 내 호위무사이나, 녀석의 안위를 걱정해 항상 가문에만 머물게 했다.
그게 불만이었던지 녀석은 강해지고자 매일같이 수련에 몰두하고 있다고 들었다.
원래 무공에 재능이 있었고 내가 따로 연활팔식(延活八式)이란 무공을 전수해준 만큼 적잖은 성장을 이뤘을 테지.
환생한 이후부터는 내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녀석을 안 본 지도 오래된 만큼 나는 가문에 들를 날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