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5장 복귀(1)
가문으로 돌아온 지 며칠.
그동안 나는 말 그대로 평온한 휴식을 취했다. 단순히 지친 몸을 달래는 게 아니라 심적으로도 쉴 수 있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정도로 지금의 내 몸 상태는 최고조였다.
그걸 뒷받침해준 건 연회라도 열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한바탕 난리를 피운 가문의 어른들을 말려준 부모님과.
“후우.”
한나절의 운기조식으로 반 갑자의 내공이 되어준 영약 덕분이었다.
일월성 놈들이 월영련주 단룡위의 부활을 대비해 준비한 영약을 내가 성채에 잠입했을 당시 몰래 챙겨두었었고 그걸 지금 막 복용한 거였다.
덕분에 지금 내 단전의 내공은 삼 갑자 반을 넘어섰다.
무위도 내공도, 이제는 확실하게 전생의 나를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만족할 수 없었다.
되살아난 단룡위가 얼마나 강해질지도 모를 일이었고 애초에 나는 지극의 다음 경지인 천극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저 이렇게 강해지기만 하는 걸로 천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모든 무림의 역사에 걸쳐 천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인물들은 채 열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조차도 무림의 대종사라고 알려진 머나먼 과거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로 인해 자그마한 단서랄 것조차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천극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었다면 이 정도로 막연하진 않았을 텐데.
‘검신 영감이라면 알고 있으려나.’
전대와 현 무림을 통틀어 천하제일검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자 정천맹주 역사상 가장 큰 입지를 다졌던 그라면.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정천맹의 기록들 속에서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병상에 누워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의식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정도로 위독하다고 했다. 물론 그가 겨우 이 정도로 죽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언제든 병상을 털고 일어나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검신 영감에게는 당장 무사히 깨어나길 바라는 게 전부였다.
한참 그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툭.
품속에서 백색 가면이 흘러내려 바닥을 때렸다. 내가 백의문주로서 활동할 때 항상 쓰는 가면이었다.
나는 무심코 가면을 집어 들다가 텅 비어 있는 가면의 눈이 내 눈과 마주침을 느꼈다.
그리고 순간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 가면이 지닌 사연을 알고 있는가?’
이 가면을 내게 팔아준 노인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때 나는 환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정체를 숨겨야 할 일이 생겨 가면을 구매한 거였다.
그 전에 가면에 새겨진 검상이 눈에 띄어서 나도 모르게 발길이 닿았던 거였고.
그리고 가면에 검상을 새겨넣은 존재는 다름 아닌 과거의 월영련주였다.
여태까지는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겼던 게 왜 지금은 뜻 모를 호기심이 피어오르는 걸까.
‘어떤 사연이지?’
이 가면의 원래 주인은 누구였고 누구기에 과거의 월영련주와 싸웠으며 그 결과가 뭐였을까. 그리고 이 가면이 지금 내 손에 있는 건 단순한 우연인 걸까.
‘너무 갔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의구심이 어느새 헛된 망상으로 비약하는 건가 싶어 나는 그만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도 천천히 알아보긴 할까.
내가 직접 알아보기엔 나는 곧 맹으로 복귀할 시기여서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제 백룡각이라는 전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백룡각주의 자리에 왕삼을 앉히기로 했던 만큼 녀석에게도 슬슬 얘기를 꺼낼 때가 왔다.
***
“드디어 저를 데려가시는 겁니까?”
연무장 중앙에 나와 마주 선 왕삼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호위무사로서 나와 함께하기 위해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었고 그 실력을 확인하고자 불렀다고 하니 피어오른 반응이었다.
“말했던 대로 네 실력을 보고 나서.”
“알겠습니다! 비무는 역시… 진검이겠죠?”
녀석은 준비해왔던 목검을 손에 쥐다가 내 눈빛을 보더니 그걸 냉큼 내던졌다.
나는 피식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실전 비무에 앞서서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었다.
“그리고 당장은 널 호위무사로 데려가는 게 아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엄연히 도련님의 호위무사인데요.”
“그건 맞지. 근데 당장 내게는 호위무사가 필요 없잖느냐. 정천맹의 무인이니까.”
“그럼 저는 뭘 하면 되죠?”
왕삼의 물음에 나는 품속의 가면을 툭 두드렸다.
“백의문으로 보낼 거다.”
“앗!”
백의문이라는 말에 왕삼은 눈을 치떴다.
백의문이 왜 세워졌고 무얼 위해 존재하며 그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얼추 파악하고 있는 만큼 왕삼은 다소 고무된 상태였다.
“저도 그럼 백의문의 제자가 되는 건가요?”
“평범한 제자는 아니고.”
“평범한 제자가 아니면 무슨…….”
“백룡각을 이끄는 백룡각주의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
순간 왕삼은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백룡각은 몰라도 ‘각주’가 어떤 지위인지는 알고 있을 터.
“제, 제가 무슨 각주입니까, 도련님!”
“그러니까 지금 네 실력을 점검해 보겠다는 거잖아. 당장은 세 명이 전부인 백룡각이지만 차차 인원이 늘어날 거야. 그리고 그 모두를 네가 책임지고 이끄는 거다.”
“…저 같은 놈이 가능할까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백룡각주가 되어줄 인물이 필요해. 그리고 나는.”
슁.
검을 뽑은 내가 말을 이었다.
“그게 네 녀석이길 바란다.”
***
쾅!
검과 검이 부딪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내 검과 맞닿아 있는 검 너머로 왕삼의 얼굴을 쳐다봤다.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지만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는 녀석이었다.
“큭!”
이어 짓누르는 내 기세를 밀어내던 녀석이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내가 녀석에게 전수해준 연활팔식이란 검법은 수비에 치중한 검법이었다. 하지만 수비만으로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필요한 게 후발제인(後發制人)의 묘리를 깨닫는 거였다.
그리고 왕삼은.
치지지직! 파앙!
밀어내던 내 기세를 단숨에 흘려보낸 뒤 자세가 무너진 내 빈틈을 노리고 검을 찔러넣었다.
쩡!
하지만 어느새 나는 자세를 바로잡아 최후의 반격이었던 녀석의 검을 쳐올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은 검은 핑그르르 회전하다가 저 멀리 연무장의 바닥 위에 추락했다.
“잘했다.”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는데요.”
왕삼은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기저에 녀석이 얼마나 환호하고 있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로 잘했다. 이 정도일 줄은…….’
전신에 새겨진 상처 위에서 핏물이 뚝뚝 흐르는 만신창이의 몰골.
그만큼 나는 제법 실력을 내보였다.
한데 왕삼은 그런 내 검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텨냈고 끈질기게 반격했으며 끈질기게 승리를 갈구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백의검대주인 이자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여서 나는 속에서나마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정말로 백룡각주가 되는 겁니까?”
왕삼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검을 집어넣었다.
“짐 싸. 내일 바로 떠나야 하니까.”
***
“은소화 소저와 함께 백룡각의 전력을 성장시키는 동시에 도련님께 백색 가면을 판매한 노인의 정체를 조사해라. 이거죠?”
원래라면 왕삼과 함께 출가해 백의문에 한 번 더 들를 생각이었지만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인해서.
총군사 묵가후가 내게 서찰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는 왕삼을 홀로 백의문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공손량에게 보내는 서찰을 함께 쥐여줬고 애초에 왕삼은 백의문도들과도 안면이 있었기에 내가 따라가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더욱이 왕삼은 내가 인정할 정도로 무공이 크게 성장했다. 그런 만큼 녀석이 백의각주의 자리에 앉는 걸 크게 반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녀오마. 넌 분명 잘 해낼 거다.”
“예, 도련님. 믿고 맡겨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도련님도 부디 옥체 보중하십시오.”
백의문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왕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곧장 정천맹으로 복귀하기 위해서였다.
지면을 박차고 괘월선보를 펼쳐 빠르게 내달리는 와중에 나는 묵가후가 보내온 서찰을 펼쳤다.
‘자네 덕분에 나를 비롯한 정천맹은 월영련과 월영련주의 심각성, 그리고 위험성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네. 큰 공을 세운 뒤인 만큼 자네를 고향에서 조금 더 쉬게 해두고 싶지만…….’
공을 세운 것에 대한 치하를 시작으로 내용은 빠르게 본론에 접어들었다.
‘일월성의 성채에서 자네가 습득한 놈들의 여러 기밀문서를 조사하는 중이네. 뜬구름 잡는 식의 문구로 이루어진 암어(暗語)가 대부분이라 그 진의를 파악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릴…….’
성채에 잠입했을 당시에 영약과 함께 이것저것 중요해 보이는 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주워 왔었다.
그걸 비선당 청해지부를 통해 그대로 묵가후에게 보내뒀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기밀문서라고 칭할 정도였다니.
‘다만 문서들을 살펴보며 확실한 사실 몇 가지를 깨닫게 되었네. 하나는 자네 말대로 되살아난 월영련주, 아니, 이제는 단룡위라고 칭해야 할 그놈이 그 신분을 이용해 마교의 재건을 노린다는 것.’
‘그리고 죽을 줄만 알았던 단룡위가 실은 살아 있었던 것처럼 적잖은 마교의 인물들이 강호 곳곳에 은거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단 사실이네.’
정마대전 이후 정천맹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마교의 잔당들을 소탕했다.
하지만 마교는 오랜 역사와 함께 강호의 한 축을 담당했던 거대한 세력 중 하나였다.
그런 마인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궤멸시키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단룡위는 그런 마교의 생존자들을 차츰 끌어 모으려 하는 것 같네. 월영련주가 아니라 마교의 후계자였던 단룡위 그 자체를 연기하면서 말일세.’
생존자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엔 마교주인 천마를 중심으로 수많은 절대 고수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상위로 여겨지던 이들이 십(十)장로와 육마(六魔).
열 명의 장로 중 네 명은 내가 직접 목을 벴고 육마에 속해 있던 귀마(鬼魔)와 광마(狂魔)도 밤낮을 지새운 혈전 끝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렇다는 건 그 나머지 중에…….
‘검마(劍魔)는 아니겠지?’
마교제일검. 교주인 천마와도 능히 자웅을 겨루던 존재. 만일 검마가 정파 세력의 무인이었다면 백도천과 검신의 자리를 두고 다퉜을 거라는 평가를 받던 고수였다.
내 기억에 검마는 분명 전대 천군지사대원들의 합공에 밀려 패퇴했다고 들었다.
…죽음이 아니라 패퇴였던가.
검마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고수들이 많아서 그때는 그저 검마가 쓰러졌구나,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확실히 검마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었다.
게다가 마교를 재건하겠다는 단룡위의 계획을 미루어보아 검마 외에 또 누군가가 살아 있을 가능성 역시 커 보였다.
나아가 정말로 마교가 부활하게 된다면 예전처럼 사파인들 역시 그쪽으로 가담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단룡위라면,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었다.
그런 놈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 묵가후는 기밀문서를 통해 천하 각지에 마교의 생존자들이 은거했을 법한 위치를 추려가는 중이었다.
아마 내가 맹으로 복귀할 시점에 맞춰 여러 위치가 색출되겠지.
해서 나는 보다 전력으로 하남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