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5장 복귀(3)
“소협을 의심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내 정면에 마주 선 남지학이 포권지례를 취했다.
무슨 뜻인가 의문을 표하자 총군사 묵가후는 내가 당분간 복룡추호대가 아닌 소룡단에서 활동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총군사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다는 말이죠?”
“명령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그리해 주길 바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협께서 복귀하시면 따로 얘기를 나눠 보겠다고도 하셨고요.”
“그렇습니까?”
“한데 그 소식을 저 말고도 다른 소룡단원들이 알게 됐고 그중 일부가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소협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들 때문에 시선이 곱지 않았나 봅니다. 해서 제가 건방지게 먼저 나서서 소협의 실력을 증명해 보고자 한 겁니다.”
남지학은 결단코 내게 했던 발언들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그저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내 실력을 선보인다면 일부 부정적인 시선을 해소할 수 있을 거라 여긴 듯싶었다.
올바른 방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효과적이긴 했다.
비무를 지켜봤던 관중들부터가 이미 나를 향해 감탄과 경외의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으니까.
저들을 통해 맹 내부에서나마 잠룡 유진휘에 관한 소문들이 긍정적인 쪽으로 뒤바뀔 터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어쨌든 저를 위해 벌인 일이라는 거 아닙니까?”
“예. 소룡단에서 함께할 수 있길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것치고는 검에 실린 기운이 예사롭지 않던데요.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줄 알았습니다.”
“소협이야말로 마음만 먹었다면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저를 제압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 내게 시비를 걸었던 때와 달리 지금의 남지학은 편안한 얼굴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비무에서 패배했다는 사실 때문에 변한 게 아니라 애초에 사람 자체가 올곧은 인물인 듯 보였다.
애초에 그런 인물이기에 소룡단의 단주가 되었겠지. 천하 각지의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들을 이끄는 자리였으니.
그때,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장진악은 퍽하고 남지학의 등을 두들겼다.
“내가 말했잖아? 형님의 실력과 명성은 진짜라고. 애초에 형님께서는 명성을 얻기 전부터 권룡인 나를 가차 없이 두들겨 팰 정도의 고수였단 말이다.”
그 말에 남지학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그 얘긴 벌써 열 번도 넘게 들었다.”
“그랬나?”
두 사람은 소룡단이기 전부터 꽤 오랜 친분이 있었는지 태도에 거리낌이 없었다.
어쨌든.
‘소룡단이라.’
총군사인 묵가후의 바람이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일단 얘기를 나눠봐야 진의를 알 수 있을 터.
나는 남지학과 장진악, 그리고 선우유란에게 나중에 다시 보자는 말을 전하고 걸음을 옮겼다.
***
묵가후를 마주한 건 늦은 저녁이었다.
매일같이 비선당 건물과 집무실을 들락날락하느라 이제야 간신히 시간이 난 것이다.
“오래 기다렸나?”
찻잔을 내밀며 탁자의 맞은편에 자리 잡는 묵가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잠시 차를 마시면서 안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대화가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소룡단주와 만났었습니다.”
“나도 보고받았네. 자네가 남 단주와 비무를 했다고.”
“저에 대한 소룡단원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없애보겠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력행사를 하게끔 해주더군요.”
“혹여라도 불쾌했다면 내가 남 단주를 대신해 사과를…….”
“전혀요. 단지 궁금할 뿐입니다. 왜 저를 소룡단으로 보내려고 하시는 건지.”
내 말에 묵가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소룡단에 임무가 주어질 것이네.”
“임무라면?”
“말했듯이 자네가 확보한 기밀문서들을 해석하던 와중 예상대로 마교의 주요 인물들 몇몇이 생존해있다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네. 또 그중 일부는 이미 단룡위와 접촉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
“십장로나 육마의 인물들입니까?”
“아직 확신까진 아니어도…….”
우려가 현실이 된 건가.
만일 그들이 단룡위에게 가세하게 된다면 마교 재건의 계획은 무사히 성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계획이 실현되기에 앞서서 놈들을 저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거였다.
혹시나 하여 집어 들고 왔던 기밀문서들이 이 정도로 도움이 될 줄은.
어쨌든 소룡단에게 떨어질 임무 역시 그와 관련된 것 같았다.
정마대전에서 살아남은 마교의 주요 인물이 은거하고 있을 거라 의심되는 위치의 조사와 수색.
“아직 의심 가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질 임무이나, 만일 정말로 그곳에 마교의 주요 인물이 자리 잡고 있다면 소룡단만으로는 감당하기에 무리가 있을 듯싶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말 그대로 임무를 맡기기엔 소룡단만으로는 불안하니 나를 동행시키고자 하는 거였다.
소룡단 말고도 이미 정천맹의 여러 무력 집단들이 묵가후의 지시에 따라 천하 각지로 파견되어 마교의 잔당들을 색출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내가 속해 있는 복룡추호대 역시 며칠 뒤에 맹을 떠난다고 했으니.
하지만 복룡추호대는 내가 없어도 이미 정천맹의 정예라 할 수 있는 곳.
묵가후로서는 나를 소룡단과 동행시키는 걸로 전력을 적절히 분배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총군사인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전생에도 한 번 마교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 중 하나였다.
“그럼 저는 소룡단과 함께하겠습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마음이 놓이는군. 아니, 항상 그랬지. 자네가 없었다면 정천맹은 지금과 달리…….”
“제가 없었어도 정천맹은 굳건했을 겁니다.”
내가 말을 가로채며 미소를 짓자 묵가후는 멈칫하더니 이내 나를 따라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소룡단은 어디로 보내지는 겁니까?”
“북쪽이네.”
“북쪽이요?”
“중원 너머의 북쪽.”
“…….”
설마.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네.”
이 와중에 북해빙궁이라니.
***
세외 세력 중 하나인 북해빙궁은 오랜 무림의 역사 속에서도 중원과의 교류가 매우 적었다.
정천맹조차도 먼 과거에 딱 한 번 그들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당시의 맹주가 퇴임한 이후 다시 교류가 끊겨 강호는 그들을 폐쇄적인 세력이라 단정 지었고 더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마교처럼 중원을 침공하고자 하는 적대감을 비춘 적도 없어서 그저 북쪽 어딘가에 그러한 세력이 존재한다고 인지하는 정도.
그렇다고 해서 북해빙궁이 만만한 세력은 또 아니었다.
교류는 없었어도 이따금 북해의 무공이 중원에 등장했었는데 사람을 통째로 얼려버리는 그들의 음기 가득한 무공에 많은 이들이 경외심을 내비쳤다.
게다가 무지(無知)할수록 두려움 또한 커진다고 했던가.
“북해빙궁… 이라고?”
소룡단주 남지학이 흠칫 놀라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묵가후와 대면하고 돌아온 나는 현재 남지학과 장진악, 두 사람과 함께 정천맹 인근 객잔에 들러 술잔을 나누는 와중이었다.
언제까지일진 모르나 당분간 함께하게 된 만큼 남지학이 먼저 자리를 마련해 왔다.
술자리 덕분에 나는 동년배인 남지학과도 관계가 편안해졌다.
“그래. 소룡단의 임무는 북해빙궁의 조사다.”
“마교의 잔당이 북해에?”
“확실하진 않지만 조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로 의심이 가신다더군.”
나는 두 사람에게 묵가후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중에서도 북해를 의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월영련주가 되살아나기에 앞서, 단룡위의 육체가 거대한 얼음덩어리 안에 잠들어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내가 일월성의 성채에서 직접 목격한 부분이기도 했다.
얼음덩어리 안에 잠들어 있던 단룡위의 육체. 그 육체를 빌려 월영련주가 되살아나지 않았던가.
북해를 벗어나서도 온전히 형태를 유지할 만한 얼음은 북해의 기운이 서린 빙산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며 묵가후는 북해와 월영련, 그리고 단룡위가 어떻게든 연결점을 가지고 있을 거라 여겼다.
“그렇군. 북해였어. 그러니 총군사님께서 너를 함께 보내려 하시는 거였고.”
정천맹이 있는 하남에서 북해빙궁까지의 거리는 오천리가 넘는 거리였다.
워낙 먼 거리인 데다가 임무 자체가 수많은 변수와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나와 소룡단만으로는 무리일 수도 있지만, 너 정도의 고수가 함께해 준다면 임무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겠지.”
남지학은 큰 의지가 된다는 듯 내 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장진악도 취기가 도는 얼굴로 호응했다.
“당연하지. 형님은 예전에도 이미 태산파를 위기에서 구해낸 적이 있다고.”
녀석의 말에 남지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산? 진천문에서의 활약은 익히 전해 들었지만 태산파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월보 놈들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던 태산파를 구해낸 일은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남지학은 궁금하다는 듯 장진악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쏘아보는 내 시선을 알아차린 장진악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형님만 믿으면 된다는 소리다.”
“…물론이지.”
두 사람 모두 나와 실력을 겨루어 압도적으로 패배한 전적이 있는 만큼 나를 향한 신뢰가 썩 커 보였다.
덕분에 소룡단의 단주는 남지학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을 이끌게 된 건 바로 나였다.
해서 남지학은 내게 부단주 자리를 권유했다. 나야 뭐가 됐든 상관없어서 수락했고 그렇게 다음날엔 소룡단의 무인들과 안면을 틀 기회를 얻었다.
남지학과 비무를 벌여 승리했다는 사실을 익히 전해 들었는지 그들은 순순히 나를 부단주로 모셨다.
다시 그날 오후엔 공식적으로 소룡단에게 임무가 떨어졌다.
북해로 향하려면 그만큼 준비가 필요했기에 미리 공지한 것이다.
출발은 나흘 뒤.
인원은 소룡단 중에서도 정예만 추려 나를 포함해 이십 명.
“채비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단주님과 부단주님, 그리고 장 공자께서는 염려 마십쇼.”
그 이십 명 중에서 나와 장진악, 그리고 남지학이 가장 고수였기에 단원들은 우리 셋을 향해 깍듯한 대우를 보였다.
덕분에 나는 떠나기에 앞서서 복룡추호대원들과도 하루 시간을 보냈고 선우유란을 따라 검신 영감에게도 문안을 올릴 수 있었다.
“자네 왔는가?”
방 안에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침상에 누워 있는 검신 영감이 보였고 그 곁에서 한창 치료 중이었던 천의 선우청이 나를 반겨주었다.
“예. 입맹하셨다는 얘긴 며칠 전에 전해 들었는데 이제야 찾아뵙는 걸 용서하십시오.”
나직이 용서를 구하자 선우청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며 손을 내저었다.
“너무 남 대하듯 하지 말게. 자네는 본가의 은인이지 않은가?”
그는 인자한 미소로 화답하고는 옆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내 시선에 검신 영감의 모습이 온전히 들어왔다.
‘…꼴이 그게 뭐요, 영감?’
환생한 이후 처음 마주하는 거였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될 줄은 알았으나 이런 만남을 예상하진 않았다.
검신이 누군가에게 패배한다면 그건 오직 나로 인해서이길 바랐으니까.
‘월영련주. 이제는 단룡위라는 그놈이 마교의 재건을 꿈꾼답니다. 영감과 내가 그토록 노력해서 괴멸시킨 그 마교요. 두고 볼 수 없으니 놈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그러니 죽지 말고 기다려요. 놈을 상대하고 난 뒤엔 영감과도 실력을 겨뤄볼 생각이니까.’
나는 대답 없는 검신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