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6장 북해(2)
“이 길이 맞아?”
내 물음에 남지학은 지도를 살피다가 헛기침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새하얀 평원을 지나쳐 북해의 시작을 알리는 호수 하류에 도착한 게 며칠 전이었다. 원래라면 호수를 맞이하고 며칠 더 이동해 북해빙궁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한데 남지학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고요함만이 가득한 숲속. 잎사귀 없이 눈만 쌓여 있는 거목들 사이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
“지도엔 분명히 이 호수를 따라 북상하라고…….”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지도에 얼굴을 파묻는 남지학을 향해 나를 포함한 소룡단원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너. 독도법 모르지?”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남지학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냐? 난 소룡단의 단주다.”
“네가 소룡단의 단주인 거랑 독도법을 모르는 거랑 뭔 상관이야? 모르면 모른다고 말을 했어야지, 이 새끼야.”
내가 지도를 낚아채자 남지학이 답답함을 호소했다.
“지도가 오래된 탓이다. 내가 볼 줄 모르는 게 아니야.”
“알겠다.”
“…….”
항변을 일축하자 남지학은 고개를 숙인 채 한발 물러났다. 몇몇 단원들은 그를 위로했고 나머지는 내 옆에 서서 지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도가 확실히 오래되긴 했네요, 형님.”
장진악의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맹에서 받은 북해의 지도는 겉으로 보기에도 꽤 낡았고 표시된 지형과 지명 등이 지금과 썩 상이했다.
하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닌 것도 분명해서 나는 남지학을 한차례 쏘아본 뒤 돌아섰다.
“일단 왔던 길로 숲을 벗어나 북서쪽으로 가야 해.”
“알겠습니다.”
“예.”
남지학을 대신해 소룡단을 이끌게 된 내가 지도를 쥐고 앞장섰다. 빙궁과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수련은 잠시 중단한 상황이라 우리는 경신공을 사용해 빠르게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 숲을 가로지를 때쯤이었다.
캉!
희미한 쇳소리 하나가 내 귀를 때렸다.
“잠깐.”
내가 곧장 멈춰 서자 단원들이 의아함에 나를 바라봤다. 남지학은 씩 웃으며 ‘너도 헷갈리지?’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런 단원들 너머 숲속 깊숙한 곳을 주시했다. 소리가 난 방향을 오감으로 뒤쫓자 희미한 인기척과 살기가 느껴졌다.
카강!
그리고 다시 한차례 울려 퍼지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에 이제는 단원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쩔까요?”
단원들이 나와 남지학의 결정을 기다렸다.
“길을 잃긴 했지만 이곳은 분명 북해빙궁의 영역이다.”
내 말에 남지학도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빙궁의 영역 안에서 칼부림이라니. 조사단인 우리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결정이 떨어지자 나와 남지학을 위시한 소룡단 전원이 신형을 쏘았다.
***
“큭!”
억눌린 신음과 함께 사내 하나가 주춤 물러났다.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리는 게 그의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그에 앞서서 이미 몸 곳곳에 여럿 검상이 새겨져 있는 상태.
무인 하나가 황급히 사내 곁으로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사내의 안위를 걱정하는 무인 역시 안색이 창백했지만, 무인은 자신보다 사내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듯 기세를 끌어올렸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저놈들은 저희가 막아설 테니 궁주께선…….”
힐끗 눈짓으로 적들을 쳐다보는 무인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는 적들의 숫자는 대략 스무 명. 그 하나하나가 모두 절정 고수들이었다.
반대로 자신들은 궁주라 불린 사내를 지키는 호위무사가 고작 네 명.
이대로는 패배가 자명했기에 호위무사는 사내만이라도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게 기회를 만들 심산이었다.
그때.
“그만 포기하시오, 궁주. 도망치는 것도 여기까집니다. 도망친다 한들, 그 뒤에 뭐가 남아 있습니까? 빙궁의 무인들 대부분은 이미 대장로님을 따르기로 했소이다.”
적들의 수장인 중년인이 검을 쥔 채 소리쳤다. 그 말에 호위무사는 사내를 뒤로 오게 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궁주님께서 엄연히 이곳에 계시거늘, 대장로를 따르다니!”
“궁주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내를 주인으로 모시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네놈들도 잘 알지 않느냐? 그러니 선택하거라. 궁주를 넘긴다면 네놈들의 목숨은 살려줄 터이니.”
“닥쳐라! 반역자들의 말에 따를 성싶으냐?”
깊은 분노와 함께 호위무사 네 명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뒤쪽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내, 북해빙궁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신들의 희생을 앞세워 도망치라고. 어떻게든 도망쳐 훗날을 도모하라고 말이다.
사내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자신이 궁주로서 취임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로를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전에도 자신과 대장로 사이에 보이지 않는 파벌이 존재하긴 했지만 반란이 성공할 만한 전력 차이가 아니었다.
자신을 따르는 세력의 힘이 훨씬 컸다.
한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힘의 축이 대장로 쪽으로 기울었다.
적잖은 인물들이 죽어 나갔고 다시 자신을 지키고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 마지막이 현재 자신을 지키고 있는 네 명의 호위무사였다.
이들마저 죽게 된다면 자신은…….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내쉰 뒤 검을 잡았다.
“저놈들 말대로야. 도망친다 한들 남는 건 없어. 차라리 이곳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겠다.”
“구, 궁주님!”
사내의 결정에 호위무사들이 안색을 굳혔고, 반대로 중년인과 빙궁의 무인들은 조소를 지었다.
길고 길었던 추격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때였다.
“봤지? 길을 잃은 게 오히려 천운이었다.”
낯선 목소리가 숲속 저편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와 소룡단원들이 서 있었다.
***
“그러게. 길을 잃었다가 북해빙궁의 궁주님을 구하게 됐어.”
내가 피식 웃으며 남지학을 쳐다보자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우리는 북해빙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의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현 궁주를 밀어내려는 반란이었다.
나는 스무 명 남짓한 무인들을 슬쩍 둘러보다가 그 반대편으로 다가갔다.
젊은 사내를 중심으로 네 명의 호위무사가 서 있는 곳. 상황을 보아 이 사내가 현 북해빙궁주였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때 적의 진영에서 진득한 살기가 쏘아졌다.
“네놈들은 누구냐?”
나는 소리친 중년인을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소룡단원들을 이끌고 사내 앞에 당도했다.
이어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그 사내에게 나직이 물었다.
“북해빙궁주이십니까?”
“…예. 궁주인 봉우라고 합니다. 귀공들은 누구시기에…….”
사내의 대답과 동시에 내 뒤에 서 있던 소룡단원들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북해빙궁의 궁주님을 뵙습니다!”
나 역시 옅은 미소와 함께 작게 고개를 숙였다.
“북해빙궁주를 뵙습니다. 저희는 정천맹 소룡단 소속의 무인들입니다.”
“정천맹이라면 중원의 정파 세력을 이끄는……?”
고개를 끄덕이자 북해빙궁주 봉우는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외부인에게 빙궁의 복잡한 속내를 내보여 면목 없다는 듯.
“서로의 사정을 설명하기엔 당장 상황이 급한 듯싶으니 저희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를 도와주시겠다고요?”
“예.”
“하지만…….”
봉우가 곁눈질로 스무 명 남짓한 적들을 가리켰다. 내게 소리쳤던 중년인을 포함한 놈들은 당장에라도 검을 쥐고 덤벼들 것처럼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정천맹의 무인들이란 소릴 듣고는 잠시 움찔한 모양새였다.
봉우는 그런 적들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저들은 북해빙궁의 대장로를 따르는 정예 고수들입니다.”
“저들이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궁주님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겁니다.”
“…아뇨. 아셔야 합니다. 귀공들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다음은 빙궁의 또 다른 무인들을 상대하셔야 할 겁니다. 빙궁의 전력 대부분이 대장로에게 넘어갔으니까요.”
봉우는 결연한 얼굴로 빙궁의 현 상황까지 부연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죽을 처지인 마당에 우리의 안위를 염려해 괜히 나서지 말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거였다.
왜 반란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엔 썩 궁주다운 인물인데.
“북해까지 어떤 연유로 방문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저를 도왔다가 귀공들까지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봉우의 말에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두 눈을 응시했다. 거짓 하나 느껴지지 않는 깨끗한 눈빛이었다.
해서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시니…….”
“예. 이런 상황에서 선뜻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봉우 역시 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나와 달리 썩 씁쓸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뒤로한 채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도움 말고. 거래는 어떻습니까?”
“…예?”
“저들을 처리해 주는 대가로 훗날 저희의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대화는 이쯤이면 충분했다.
나는 봉우에게서 몸을 돌려 소룡단원들과 함께 중앙으로 나섰다.
그러자 중년인을 비롯한 적들이 시뻘게진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인가?”
적들의 수장인 중년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내 맞은편에 섰다. 다리에 힘만 주어도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사정거리였다.
그런데도 당장은 대화로 상황을 풀어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중년인을 덤덤히 쳐다봤다.
“보면 몰라? 빙궁의 궁주와 거래 좀 했다.”
“말장난하지 말거라. 외부인인 주제에 빙궁의 일에 간섭하겠다?”
“조금 전까진 외부인이었지만 이제는 조력자야. 간섭할 만한 거 같은데?”
“…정녕 피를 보겠다, 이 말이더냐?”
“피는 볼 수밖에 없겠지.”
“네놈이 그걸 감당할 수는 있고? 이번 일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단순히 네놈들과 우리의 싸움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자칫 빙궁과 정천맹의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그걸 알고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게야?”
중년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원래라면 한 세력의 일에 외부인이 끼어드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건 다분히 정상적인 상황에서나 논할 얘기였다.
주인을 배신한 개새끼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
슁!
내가 힘껏 검을 찔러내자 중년인은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었다.
미간이 꿰뚫리는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는지라 놈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조소와 함께 놈을 내려다봤다.
“네놈들은 여기서 다 죽을 테니까, 뒷일은 걱정하지 마.”
“이 개잡놈의 새끼가……!”
쉭!
중년인이 욕지거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려는 틈을 타 나는 그대로 놈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큭!”
하지만 봉우의 말대로 정예 고수라 그런지 고작 이 정도로는 목숨을 내주지 않았다.
대신 놈은 재빠르게 내 사정거리 밖으로 굴러가듯 벗어나 자신의 수하들과 진형을 정비했다.
그사이에 소룡단원들도 내 곁으로 모여 대형을 짰다.
좌측과 우측에 나눠선 남지학과 장진악을 따라 인원도 반으로 나눠지는 이룡공아진(二龍公牙陣).
실력의 우위를 자신하는 상황에서 수비를 배제한 체 공격에만 집중하는 인술진이었다.
내가 눈짓을 보내자 남지학과 장진악이 일시에 소리쳤다.
“개진-!”
이어 좌우 양쪽에서 소룡단의 인원들이 날개를 펼치듯 뻗어나가 적들에게 쇄도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