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6장 북해(3)
스무 명 대 스무 명이라는 비슷한 숫자끼리의 싸움이었다.
“커억!”
“우, 우측을 도와라!”
“아니! 흩어지지 말고 중앙으로 모여라!”
하지만 형세는 일방적이었다.
좌우 양쪽으로 나뉘어 검을 뻗어가는 소룡단원들의 기세에 적들은 덫에라도 걸린 것처럼 허둥대고 있었다.
소룡단이 비록 후기지수들로 이루어진 무력 부대라지만, 고르고 골라 선별한 인원들이라 모두가 절정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최근 북해로 향하면서 내 지도하에 육체를 단련하고 무공의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서인지 정천맹을 떠나 출발한 시점보다 몇 수는 더 강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남지학과 장진악. 그리고 모용비까지.
세 사람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고작 보름이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하나의 벽을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벽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던 녀석들이라 가능했던 거겠지만.
“크악!”
다시 또 한 놈.
남지학의 검에 맞서다가 가슴이 관통당한 적 하나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그걸로 다섯 명째였다.
싸움 초반부터 소룡단원들의 검에 적 다섯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승기가 기울자 딱히 내가 나설 기회는 없어 보였다. 애초에 나는 소룡단이 펼치는 인술진에 관해 이름과 형식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맹의 무력 부대는 항상 지독한 훈련을 통해 서로 호흡을 맞춘다.
새로 재결성된 소룡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합류하기 전에 그들은 이미 훈련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런데도 총군사인 묵가후가 나를 소룡단에 합류시킨 건 그들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녀석들의 힘이 되어주길 바라서였을 터.
지금 당장은…….
“크악!”
이번엔 장진악의 기운 실린 주먹에 얻어맞은 적 하나가 안면이 함몰된 채 고꾸라졌다.
‘생각보다 꽤 압도적이네.’
적들의 정체가 북해빙궁의 대장로라는 인물을 따르는 정예 고수들이라기에 뭔가 있을 줄 알았건만.
그때, 봉우가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내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정천맹 무인들의 실력이 역시나 예사롭지 않군요. 귀공들은 정천맹의 정예 고수들입니까?”
봉우는 적들을 압도하고 있는 소룡단의 기세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정예는 아니고. 머지않아 정예가 될 정천맹의 후기지수들입니다.”
“저 정도의 무위를 지녔음에도 후기지수에 지나지 않는다니?”
물론 평범한 후기지수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시다시피 실력이 나쁘지 않은 녀석들이라. 궁주님께서도 저희와 거래할 의향이 생기신 것 같은데요?”
“…거래를 빙자한 일방적인 도움이겠지요. 반란으로 궁주의 지위를 박탈당할 처지에 놓인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반란을 진압한 뒤에 논의하는 걸로 하죠.”
거래를 빙자한 일방적인 도움이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당장은 봉우에게 얻어낼 게 없었지만, 그가 다시금 원래의 위세를 되찾게 된다면 말이 달라졌다.
무려 궁주의 목숨과 지위까지 구해주게 되는 셈이니까.
더군다나 궁주인 봉우의 협조를 받으면 마교 잔당의 흔적을 뒤쫓기 위한 북해의 조사가 더욱 수월해질 테고.
소룡단의 원래 임무를 위해서라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한데 봉우의 표정이 썩 좋지많은 않았다.
“반란을 진압할 수 있을지… 가 문제겠네요.”
당장 나와 소룡단이 아니었다면 죽을 위기에 놓였었던 상황이니 짐작은 했지만.
“아무런 대안도 없는 겁니까?”
그래도 궁주이니 훗날을 도모할 묘안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다.
“대안이 없지는 않습니다.”
역시나.
“하지만 그게…….”
애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봉우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앗! 조, 조심하셔야 합니다!”
봉우의 외침은 한창 적들을 몰아붙이고 있던 소룡단을 향한 경고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열 명도 채 남지 않은 적들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기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중 적들의 수장인 중년인이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이렇게 된 이상 금제를 푼다!”
“예!”
금제?
금제가 뭔가 싶어 봉우를 쳐다보자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북해의 무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속에 극한의 음기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북해인들의 선천적인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봉우의 말에 따르면 지니고 태어나는 음기의 양에 따라 북해의 무공을 배울 수 있는 자질이 결정된다고 했다.
그 재능이 뛰어난 자들은 타고난 음기의 양이 너무 많아 신체에 무리가 가는 수준.
그 때문에 일정한 재능 이상의 고수들은 평상시에 음기를 제한하기 위한 금제를 걸어둔다고 했다.
그런 금제를 푼다는 건 육체의 손상을 감안하고 본 실력을 내보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기에.
내가 의아해하자 봉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부터가 저들의 본래 모습입니다.”
***
쩡!
“큭!”
가장 선두에서 적들을 몰아붙이던 남지학이 난색을 표했다.
적들의 기세가 갑작스레 뒤바뀐 것이다. 그들은 전부 쥐고 있던 병장기들을 내던진 뒤 쌍장을 이용해 반격해 오고 있었다.
한데 놈들의 양손에 맺힌 새하얀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다.
검기가 실린 검을 손으로 막아냈는데 상처 하나 없었고 도리어 부딪친 충돌의 여파로 단단한 충격과 차가운 한기가 검을 타고 전신으로 흘러들어왔다.
여지껏 맞이한 북해의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한기였다.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몸 안을 침범하는 한기가 움직임마저 제한하고 있었다.
“놈들의 공격을 막지 말고 최대한 피해라! 북해의 무공이다!”
남지학의 충고에 소룡단원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도 이미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지 않고 피하기만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객관적인 무위는 자신들이 앞서지만 적들도 엄연히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었다.
거기에 북해의 무공이 더해지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어서 유리했던 전황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더군다나.
쩌저적!
단원 하나가 적이 쏘아낸 장력에 얻어맞아 검을 쥔 팔이 상체에 달라붙은 채로 몸 일부가 얼어붙었다.
“저, 저게 무슨!”
난생처음 마주하는 음한기공에 소룡단원들의 기세가 더욱 급속도로 꺾였다.
“진형을 변경한다!”
남지학은 눈앞의 적을 검으로 멀찍이 쳐낸 뒤 소리쳤다.
공격일변도로 몰아붙이던 이룡공아진에서 둘씩 조를 나누어 산개한 채 적을 상대하는 수비 진형.
하지만 그걸로도 상황은 역전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피해가 막심할 게 분명했다.
“젠장!”
카가강!
이때부터 남지학은 온 힘을 다해 위기에 처한 단원들을 구해내는 동시에 적들을 상대하는 신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남지학을 뒤따라 장진악과 모용비까지.
세 사람의 고군분투로 싸움의 향방이 팽팽해졌다.
그런 소룡단원들의 싸움을 나는 뒤에서 덤덤히 지켜보고 있었다.
남아 있는 적의 숫자는 이제 일곱.
소룡단원들은 사망자는 없었지만, 전투 불능의 상처를 입은 인원들이 여섯. 그로 인해 남은 숫자가 열세 명.
피해가 더욱 커지기 전에 나서야겠다는 판단과 함께 나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내 기세에 움찔 놀란 봉우가 나를 쳐다봤다.
“…귀공께서도 저들과 같은 후기지수입니까?”
나는 그런 봉우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여준 뒤 지면을 박찼다.
***
꽈-앙!
밀고 밀리는 전장의 중앙에 내려앉은 내가 내공을 실어 진각을 밟았다.
그 충격의 여파로 거대한 진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흡사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닥에 깔려 있던 눈이 허공으로 흩날렸고 반대로 거목 위에 쌓여 있던 눈은 땅으로 흘러내렸다.
그로 인해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정확히 소룡단원들과 적들의 정중앙. 양 진영을 갈라놓을 의도였기에 인원들은 각자 뒤로 물러나면서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먼저 남지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애들 데리고 물러나. 나머진 내가 상대하마.”
“우린 아직 싸울 수 있다. 다 같이…….”
남지학은 말을 하다 말고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북해의 무공에 당해 몸 일부가 얼어붙어 있는 소룡단원들이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저만한 음기를 몰아내려면 외부에서 기를 불어넣어 줘야 한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몰아내기가 더욱 힘들 거야.”
“…알겠다.”
남지학은 결국 분한 표정으로 단원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에, 적들의 수장인 중년인이 등을 돌리고 있던 내게 한차례 기운을 쏘아 보냈다.
단원들의 몸을 단숨에 얼어붙게 만든 한빙장(寒氷掌)이었다.
쐐엑!
한걸음 옆으로 물러나자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장력이 틀어박혔다. 이어 장력이 내리꽂힌 바닥 위로 날카로운 얼음꽃이 피어올랐다.
봉우에게 설명을 들었던바, 이게 북해빙궁이 자랑하는 영화빙장(榮華氷掌)인 듯 보였다.
나로서도 내심 감탄할 정도의 무공이긴 했다. 이 정도의 음기를 다루는 고수는 중원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게 전부였다.
놈들의 음한기공 따위는 내게 소용이 없을 테니.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력을 쏘았던 중년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감히 네놈 혼자서 우리를 상대하겠다?”
중년인을 비롯한 적들은 금제를 푼 영향인지 동공마저 새하얗게 물들어있었다.
나는 그런 놈의 백안을 마주 바라보다가 팔을 들어 올렸다. 이어 내공을 실어 장력을 뿜었다.
화악!
사람 몸집만 한 손바닥 형상의 기운은 그대로 중년인을 덮쳤다.
쾅!
장력을 막아낸 중년인이 주르륵 밀려나다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쏘아낸 장력은 극양의 기운을 내포한 열화장(烈火掌).
북해의 기운과 상반되는 성질의 무공이었다. 이 역시 일전에 원로원의 노고수 한 명에게 사사한 거였다.
극양의 무공으로는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며 자신하던 그가 익혀두면 쓸데가 있을 거라기에 가르침을 받았었는데.
“극양 계열의 무공을 익힌 놈이었구나.”
“경험 삼아 익혀두었지.”
내가 피식 웃자 중년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고작 이따위 양기로 북해의 무공을 상대할 수 있을 줄 아느냐?”
“충분히?”
“…감히!”
얕은 도발에 넘어온 중년인은 곧장 내게 짓쳐들어왔다.
한기가 서린 쌍장을 내밀기에 나 역시 열화장의 기운을 담은 양손을 내밀었다.
콰곽!
양기와 음기.
맞잡은 손을 통해 상반된 두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중년인으로서는 내력의 대결을 통해 단숨에 나를 얼어붙게 만들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우우웅!
나와 중년인을 중심으로 기파가 휘몰아치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인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적들은 중년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고 봉우와 그의 호위무사들은 내가 북해의 무공에 맞서 내력 대결을 펼칠 줄은 몰랐는지 내 안위를 염려했다.
소룡단원들도 직접 북해의 무공을 체감했던지라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쩌저적!
그때 중년인의 손을 맞잡은 내 손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것이 북해의 무공이다. 차라리 검을 쥐고 날 상대했다면 더 나았을 것을.”
승리를 장담했는지 중년인은 코앞에서 조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나 역시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화르륵!
얼어붙었던 손아귀 위로 순식간에 불길이 번져 올랐다. 그 열기로 인해 얼음은 단숨에 녹아버렸고 불길은 그대로 중년인의 팔을 타고 놈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당혹스러워하던 중년인은 덮쳐오는 열기를 피해 손을 빼내려 했지만 나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이, 이거 놔라. 이놈! 크아악!”
자리를 벗어나려 발악하던 놈은 결국 전신이 화마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