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6장 북해(4)
“여태껏 소식이 없다?”
북해빙궁의 대장로 심윤술(沈尹戌)이 창가 너머로 바깥을 주시하며 물었다.
그의 뒤편엔 빙궁의 무인 하나가 고개를 조아린 채 서 있었다.
“궁주를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 이후에 연락이 끊겼습니다.”
“…….”
무인의 대답에 심윤술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이끄는 영화대(榮華隊)는 북해빙궁의 최정예 무력 집단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현재 도망친 궁주의 추격을 맡은 인물은 영화대의 대주와 그 밑에 스무 명가량의 절정 고수들.
궁주인 봉우 곁에 역시나 북해빙궁의 최정예 고수라는 호위무사들이 함께하고 있긴 하지만 고작 그 네 명에 당할 전력이 아니었다.
추격에만 성공한다면 반드시 궁주의 목을 가져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는데 연락이 끊겼다니.
“며칠이나 지났지?”
“삼 일째입니다. 이미 복귀하고도 남을 시간인 데다가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연락도 없을 리가…….”
무인의 대답에 심윤술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삼 일째 연락인 끊긴 영화대뿐만 아니라 중원의 정천맹에서 파견을 보냈다는 조사단 역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천맹의 총군사가 보내온 서찰에 따르면 조사단 역시 며칠 전쯤에 도착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정천맹의 조사단이 도망친 궁주의 사정이나 위치를 어찌 알아내 도운단 말인가.’
궁주를 밀어내려 반란을 도모한 일은 아주 은밀하고도 빠르게 진행됐다. 수천 리나 떨어져 있는 중원의 정천맹이 이 상황을 알아챌 리는 만무했다.
만에 하나 사정을 알게 됐더라도 철저한 외부인인 그들이 권력과 세력을 대부분 잃어버린 봉우를 도울 이유도 없었다.
“일단.”
상념에서 깨어난 심윤술은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인원을 좀 더 보내 확실한 정황을 조사해 오거라.”
“얼마나 보내면 되겠습니까?”
무인의 반문에 심윤술은 잠시 눈을 굴렸다.
궁주를 추격하는 일을 영화대에 맡긴 건 그들이 실력을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정예기 때문이었다.
영화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력은 현재 빙궁 내부에서 반란에 반대하고 나섰던 파벌과 세력들을 정리해나가는 중이었다.
영화대가 궁주의 목만 가져왔다면 내부 사정 역시 일사천리로 정리가 됐을 테지만.
‘북해빙궁의 주인이 뒤바뀌는 일이다. 쉬워서는 안 되지.’
이 정도의 험난함은 당연하다는 듯 심윤술은 속내에 자리하고 있던 불안감을 지워버렸다.
“영화대의 나머지 인원들. 그리고… 삼(三)장로를 보내야겠다.”
“…삼장로님을요?”
심윤술의 결단에 무인은 흠칫 놀랐다.
대장로인 심윤술을 비롯해 북해빙궁에는 여섯 명의 장로들이 존재했다.
그중 삼장로 안현(安玄)은 대장로와 함께 반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동시에 북해빙궁의 절대 고수 중 하나였다.
안현의 존재만으로 반란에 반대하고 나섰던 일장로가 손쉽게 제압당했고 이장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남은 건 사장로와 오장로.
봉씨 일가를 향한 충성심을 버리지 못한 채 끈질기게 버티던 두 사람 역시 안현 덕분에 슬슬 단념할 기색을 비치고 있었다.
“삼장로가 없어도 궁 내부는 머지않아 정리가 끝날 게다. 남은 건 궁주의 목뿐이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방을 벗어난 무인은 곧장 삼장로 안현을 찾아가 심윤술의 전언을 전했다.
빙궁의 절대 고수가 간만에 궁 밖으로 나서게 되는 순간이었다.
***
“정말 감사합니다.”
북해빙궁주 봉우가 허리까지 숙여가며 감사를 표하자 남지학을 비롯한 소룡단원들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봉우와 소룡단원들의 나이는 엇비슷할 테지만 그 지위가 천지 차이였으니까.
맹에서도 궁주를 만나게 되면 정천맹주를 대하는 것처럼 예의를 잃지 말라고 경고했을 정도였다.
물론 나는 덤덤하게 봉우의 감사 인사를 건네받았다.
지위가 어떻고 간에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봉우를 추격해왔던 중년인과 스무 명가량의 적들은 빙궁의 대장로를 따르는 영화대의 무인들이라고 들었다.
그런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 놓았으니 지금쯤 대장로라는 작자 역시 변고를 깨달았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미 내 손에 죽은 중년인보다 더 강한 고수를 보내왔을지도 모르는 일.
해서 우리는 일단 봉우와 함께 그만이 알고 있는 은신처로 피신한 상태였다. 이틀 밤을 지새워 내달린 만큼 빙궁과도 거리가 꽤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휴식과 치료가 필요한 소룡단원들을 쉬게 하고 봉우와는 이다음 일을 논의할 계획이었다.
“감사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하시고, 그날 궁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대안이란 걸 좀 듣고 싶은데요.”
은신처 중앙에 마련된 탁자에 봉우와 마주 앉은 채로 내가 묻자 다시 내 양옆에 앉아 있는 남지학과 장진악이 눈을 치떴다.
녀석들이 느끼기엔 궁주를 향한 내 태도가 다소 건방져 보였나 보다 싶었다. 그런 두 녀석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봉우의 말에 집중했다.
“예. 물론입니다.”
봉우 역시 내 태도가 어떤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나와 소룡단원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니까.
“일단 빙궁의 현 상황이 어떤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소룡단의 단주님과 부단주님께서는 제 얘길 듣고 저를 도와 빙궁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빌려주실지 말지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주시길 바랍니다.”
봉우는 자신의 처지가 풍전등화인 상황이니 우리가 여기서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는 투였다.
나와 남지학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곧 봉우가 상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반란의 중심은 빙궁의 여섯 장로 중 대장로와 삼장로입니다.”
대장로 심윤술.
삼장로 안현.
두 사람 모두 봉우의 부친인 전대 궁주와 함께 북해빙궁을 이끌어왔던 절대 고수들이었다.
그 두 사람에 의해 나머지 장로들이 제압당했거나 봉우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려다 도리어 밀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일장로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궁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일장로님은 큰 상처를 입어 쓰러지셨고…….”
나머지 장로들도 지금쯤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을 거라는 게 봉우의 판단이었다.
다행인 건 아직 봉우의 편에 섰던 장로들이 살아 있다는 거였다.
여섯 장로는 빙궁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여서 죽이기보다 회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빙궁 내부에서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뜻입니까?”
“맞습니다.”
봉우의 대답에 남지학과 장진악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건 봉우가 말한 대안뿐이라는 건데.
“사실 그 대안조차도 확실한 도움이 되어줄지가 의문입니다.”
봉우는 깊은 탄식과 함께 반란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
봉씨세가.
대대로 북해빙궁을 이끌어온 가문이자 봉씨세가의 인물들은 북해인들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음기의 양이 다른 누구보다 훨씬 많다고 했다.
음기를 얼마나 지니고 태어나는가로 자질을 선별하는 북해 무인들의 특성상 봉씨세가의 인물들이 빙궁을 이끄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한데 그 이치가 봉우에겐 들어맞지 않았다.
전대 궁주의 유일한 후계자인 봉우에겐 북해인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음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은 현 궁주인 봉우가 북해의 무공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반란이 일어난 원인도…….”
“예. 능력도 재능도 없는 제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 안에 음기가 존재하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음기를 축적할 수 있는 심법을 사용하곤 있지만 고작 그걸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궁주의 독문무공을 고작 삼성까지밖에 익히지 못했다고 하니.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제 무능함 덕분에 빙궁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까지 저를 외면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라는 게 궁주님께서 말씀하신 대안입니까?”
“…예.”
북해림(北海林).
북해빙궁과는 별개의 세력이나 북해림 역시 꽤 오랜 역사를 지닌 세력.
그들의 역할은 암중에서 북해빙궁을 비호하는 거였고 동시에 북해림은 궁주의 자질을 지닌, 그동안은 봉씨세가의 인물을 따르던 세력이었다.
하지만 봉우는 현재 궁주로서 역량이 의심되어 반란을 자초한 상황인지라 북해림이 자신을 따라줄지 염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 만큼 염치없이 귀공들께 저를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사지가 눈앞인 곳에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들을 끌어드릴 순 없으니까요.”
“…”
봉우의 말에 남지학과 장진악은 입을 열지 못했다. 도와주고 싶어도 냉정한 현실을 자신들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어 남지학이 내게 나직이 속삭였다.
“이 문제는 우리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겠는데. 총군사님께 보고를 드리는 게 우선인 것 같다.”
“그렇게 해.”
나는 여전히 봉우에게 시선을 꽂은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남지학의 말대로 맹에는 일단 보고를 해두는 게 옳았다.
그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내 말에 봉우가 뭐든 물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북해의 무인들은 무공을 사용할 때 오로지 타고난 음기만을 사용하는 겁니까?”
“예. 중원의 무림인들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중원에서는 자연의 기운을 몸 안에 축적한다고 들었는데 북해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북해의 기운을 몸 안에 담아두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음기가 존재하지 않는 궁주께서는 중원의 방식과 비슷한 심법을 사용하고 있는 거고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저도 전대 궁주님이신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은 거라 중원의 심법과 비교해서 비슷한지 어떤지는 잘….”
대답을 들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날 때부터 자연의 기운 중 하나인 음기를 지닌 채 태어난다니 북해인들에게는 운기행공 자체가 필요치 않은 듯 보였다.
대신 그 양이 많을수록 육체에 무리가 가서 평소엔 금제를 해둬야 하는 부작용이 있는 걸 테고.
내공을 쌓는 과정을 생략하는 걸 보면 축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객관적인 시선에선 금제 따위에 얽매일 바에야 차라리 중원의 방식이 훨씬 낫다고 느껴졌다.
해서 나는 봉우에게 제안을 건넸다.
“제게 무공을 배워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난데없는 제안이라고 느껴졌는지 봉우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중원의 방식대로 단전에 내공을 쌓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중원의 심법을 익혀보란 겁니까?”
“평소엔 금제를 걸어두어야 할 정도로 몸에 무리가 가는 기운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그리고 중원의 심법으로도 충분히….”
말을 하면서 내공을 끌어올린 내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손바닥 주변으로 극양의 기운을 내포한 화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영화대의 대주라는 중년인을 상대로 펼쳐 보였던 열화장이었다.
북해의 음기와는 상반되는 극양의 기운이지만 어찌 됐든 중원의 심법을 통해 쌓은 내공으로도 충분히 음기와 양기를 다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거였다.
그런 내 뜻을 어느 정도 알아차렸는지 봉우가 눈을 빛냈다.
“중원의 심법으로 쌓은 내공으로도 북해의 무공을, 영해빙광심결을 사용할 수 있을 까요?”
영해빙광심결이라는 게 궁주의 독문무공인건가.
“아마 가능할 겁니다. 북해의 무공을 익혀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내 대답과 동시에 봉우가 품속에서 책자 한 권을 꺼내 보였다. 그걸 내게 건네는 그의 두 눈은 북해 무인들의 눈과 달리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빙궁의 무공입니다. 귀공께서 빙궁의 무공을 먼저 한번 익혀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