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7장 사사(1)
한음지(寒陰指).
봉우가 내게 건넨 비급의 이름이었다. 북해빙궁의 무공 중 하나로써 주먹이나 손바닥이 아니라 열 손가락에 한기를 싣는 지법.
한음지를 대성하게 되면 손가락 끝에서 쏘아낸 음기로 단숨에 적을 꿰뚫고, 그 상처를 통해 음기가 스며들어 몸 외부는 물론 내부까지 얼어붙게 할 수 있다고 하기에 흥미가 돋았다.
“가능하겠습니까?”
한참 비급을 살펴보고 있는 내게 봉우가 물어왔다.
중원의 심법으로 쌓은 내공으로도 북해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듯.
나는 한 차례 더 비급을 자세히 읽어본 뒤에 입을 열었다.
“북해인들이 사용하는 음기라는 게 심장 부근에 쌓여 있는 겁니까?”
“예.”
단전에 자연의 기운을 담아 사용하는 중원의 방식과 달리 북해의 무인들은 날 때부터 심장 부근에 단전과 비슷한 하나의 그릇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북해인들이 말하는 심장 부근의 그릇이 중단전을 뜻하는 거라는 사실을.
‘날 때부터 중단전이 개방된 채 그 안에 음기를 지니고 태어난다니.’
중원에서는 보통 인극의 경지에 도달할 때쯤에야 중단전이 열렸다.
중단전이 열리기 위해선 우선으로 하단전에 내공이 충분히 쌓여 있어야 하고 내공과 외공의 균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내가 소룡단원들에게 육체의 단련을 등한시하지 말라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북해의 무인들은 하단전이라는 기둥을 세우지 않은 채 무턱대고 중단전의 기운을 사용하고 있는 거였다.
즉, 정상적인 단계를 생략한 몸이 중단전에 들어 있는 음기를 감당하지 못해 육체에 무리가 가는 거였고 그걸 막기 위해서 금제라는 수단을 활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잠시 궁주님의 몸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되자 나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껏 북해의 무인들이 발전시켜온 방식은 틀렸다는 걸.
대신 잘못된 방식을 바로잡아 준다면…….
“예. 물론입니다.”
봉우가 허락하자마자 나는 봉우의 뒤편으로 걸어가 등 중앙에 손을 얹었다. 내력을 불어넣어 그의 몸 내부를 관조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불어넣은 기운이 봉우의 전신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봉우의 몸 안에도 역시나 중단전이 희미하게나마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봉우 스스로는 다른 북해의 무인들처럼 음기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고 느낄 정도로 미약하긴 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봉우가 중원의 심법을 통해 하단전을 몸 안에 이루게 되고 그대로 경지를 쌓아가다 보면 중단전이 미리 조금이나마 개방된 점을 이용해 단숨에 인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그 과정을 견뎌낼 수 있다면 중단전이 열린 채 태어나는 북해인들의 선천적인 특징은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 확실히 축복이라 부를 수 있는 장점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주자 봉우의 표정이 시시각각 급변하기 시작했다.
***
쐐에엑!
허공에 치켜든 내 검지 위에서 한줄기 새하얀 기운이 뻗어나갔다. 반나절 정도 한음지의 비급을 살펴보고 수련한 결과였다.
퍼-억!
내가 쏘아낸 일직선의 기운은 은신처의 벽면에 자그마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구멍 주변이 단숨에 얼어붙었다.
“어, 어떻게 한음지를 고작 반나절 만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봉우는 입을 쩍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로서는 익숙한 반응이었다.
일전에 원로원의 노고수들에게 무공을 사사할 때도 그들은 내가 무공을 익히는 속도와 재능이 남다르다며 놀라자빠지곤 했었으니까.
봉우 옆에서는 장진악이 나 대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희 형님이 비록 나이가 어려 중원의 후기지수들과 명성을 나란히 하고 있지만, 실력만 따지면 분명 천하십대고수 안에 들 겁니다.”
장진악의 말에 봉우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습니까? 저를 구해주셨을 당시에 영화대주를 실력으로 압도하는 걸 보고 짐작은 했었습니다만, 천하십대고수라니…….”
“그런 저희 형님께 무공을 배운다는 건 기연이나 다름없는 일이죠.”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두 사람이 쓸데없는 사담을 나누는 사이에 남지학은 정천맹으로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북해빙궁의 현 상황과 당장 빙궁주인 봉우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소룡단이 그런 봉우를 어쩌다 돕게 되었는지까지.
짐마차에 실어 온 전서구를 이용할 테니 서찰은 금방 전달될 터였다.
그리고 다시 맹과 총군사인 묵가후의 답변이 돌아올 때까진 이곳 은신처에서 머무를 계획이었다.
그동안 나는 봉우에게 제안했던 대로 중원의 심법 한 가지를 전수할 생각이었다. 전생에 정천맹의 천상비고에서 눈에 담아두었던 심법을 북해인인 봉우의 체질에 걸맞게 뜯어고친 심법. 그뿐만 아니라 내공과 외공의 균형을 맞추는 법까지.
이걸 통해서 봉우의 무위를 끌어올린다면 반란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지워버리는 건 물론 그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여기고 있는 북해림의 원조까지 얻을 수 있을 터.
대장로라는 작자에게 빼앗기다시피 한 궁주의 지위를 되찾으려면, 현재로선 그 길밖에 없었다.
봉우도 그걸 알고 있기에 어느새 내 앞으로 조심스레 다가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데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저를 제자로 거두어주십시오.”
봉우의 발언에 장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
“궁주님. 아니 될 말입니다. 궁주의 신분으로 제자라니요.”
봉우의 갑작스러운 결단에 그의 호위무사들이 경악과 함께 저지하려 나섰다. 그들로서는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북해빙궁은 일개 세력이 아닌 북해의 패자다. 그런 빙궁의 주인이 중원 무림의 젊은 후기지수의 제자가 된다니.
하지만 봉우의 표정은 확고해 보였다.
“궁주의 신분이 제자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당연히 상관이 있지요. 물론 유 공자를 포함해 이곳에 계신 소룡단의 무인 분들은 저희의 은인입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궁주님께서 유 공자의 제자가 된다면…….”
내부인과 외부인의 처지. 정천맹과 북해빙궁의 입장. 그 외에도 여러 사정이 얽히게 될 것이다.
호위무사는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거론하며 봉우의 결심을 되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봉우는 얘기를 듣다 말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궁주의 신분을 떠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유 공자에게 제대로 무공을 배워보고 싶다. 허락된 시간이 많진 않겠지만, 그 시간만큼은 유 공자가 궁주인 내 신분에 개의치 않고 부담 없이 가르침을 내려주길 바라서야.”
“…….”
“게다가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북해의 무공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스승으로 모시기엔 부족함이 없어.”
거침없는 봉우의 언변에 호위무사들은 도리어 설득당하며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나는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고 장진악과 남지학을 비롯한 소룡단원들은 내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수군대고 있었다.
“이, 이래도 되는 거야? 형님께서 북해빙궁의 궁주를 제자로 거둔다니.”
“모르겠다. 하지만 궁주께서 원하시니 안 될 것도 없지 않을까?”
“하긴.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부터가 이미 스승과 제자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근데 형님께서는 궁주님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우리를 대할 때처럼 가차 없이 굴릴 것 같은데.”
“…설마. 적당히 하겠지.”
녀석들은 육체의 단련이랍시고 맨몸으로 마차를 이끌며 수천 리에 달하는 거리를 내달리던 기억을 되살렸는지 몸을 흠칫거렸다.
나로서는 피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한 이상 ‘적당히’를 염두에 두진 않았으니까.
봉우도 그럴 심산으로 제자가 되겠다는 말을 꺼낸 것 같았고.
나아가 무공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있는 만큼 지도는 더 고될 수밖에 없었다.
해서 나는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는 봉우와 호위무사들을 일축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곧장 시작하시죠.”
***
북해빙궁의 삼장로 안현이 영화대의 무인들을 이끌고 한 장소에 도착했다.
궁주를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던 영화대주의 마지막 보고에 적혀 있던 그 숲속이었다.
“샅샅이 조사해라.”
“예, 삼장로님.”
안현의 명령에 따라 영화대의 무인들은 숲의 초입부터 안쪽 깊숙한 곳까지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일류 이상의 무인들이었기에 흔적은 금방 찾아냈다.
“삼장로님. 이곳입니다.”
영화대의 무인 중 하나의 목소리를 따라 이동한 안현은 숲의 중앙 부근에서 혈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싸움이 끝난 이후에 주변의 뒤처리까지 끝낸 모양새였지만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었을 터.
“궁주와 놈의 호위무사들 말고 누군가가 더 있었군.”
“대장로님께서 중원의 정천맹이 북해로 파견을 보내왔다는 조사단을 언급하긴 했었습니다.”
“조사단?”
“예.”
정천맹의 조사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안현은 얼굴을 굳혔다.
확실히 주변 곳곳에서 발견된 흔적 중 북해의 무공이 아닌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 스무 명쯤인가? 그리고 그중 하나는…….”
안현은 발견한 흔적 중에서 가장 희미하면서도 가장 눈에 띄는 흔적 하나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범상치 않은 놈이로고.”
순간 안현은 양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놈이 남긴 흔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긴장감이 몸을 휘감은 것이다.
‘이 무슨…….’
이런 긴장감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북해빙궁의 전대 궁주나, 대장로가 ‘그분’이라 칭하는 존재에게서도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정천맹이라고? 북해에 대체 뭘 보낸 것이냐.’
이를 악물며 긴장감을 떨쳐낸 안현은 흔적이 가리키는 방향을 지그시 쳐다봤다.
***
“부르셨습니까?”
빙궁의 대장로인 심윤술이 어둠 너머의 인물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북해빙궁주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하는 그가 고개를 숙이는 자라니.
하지만 심윤술은 개의치 않았다.
어둠 너머의 존재는 자신과 삼장로를 제외하면 아는 이가 없는 인물이었다.
반란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협조였다.
반대로 자신 역시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고 있었다.
북해빙궁의 산물인 만년빙정(萬年氷精).
만년빙정의 값어치는 같은 무게의 금을 지불해야 할 정도로 진귀한 물건이었고, 그로 인해 북해빙궁은 먼 세외에서도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 만녕빙정을 달라는 대로 내주고 있으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셈이었다. 그 많은 양을 어디다 쓰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 어둠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획이 막바지에 접어든 것 같더군.”
“예. 궁주를 추격하는 데도 성공한 만큼 상황은 금방 정리될 겁니다.”
“그런가? 그럼 우리의 거래도 이걸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네. 한데.”
목소리가 중간에 멈춘 순간, 심윤술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형의 기운 앞에서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분노 속에 옅은 살기마저 담겨 있는 기운이었다.
“왜 이러시는 건지 연유를…….”
“정천맹 놈들이 북해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얘길 들었다.”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압박을 가하던 기운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심윤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교… 아니, 천마신교의 생존자가 북해에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조사단이라고 합니다.”
“뭔가를 알아차리긴 했나 보군.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놈들이 본교의 움직임을 어찌 알아차리고 이곳까지 조사단을 보내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
심윤술이 입을 다물자 장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분위기가 왠지 어둠 너머의 인물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심윤술은 황급히 부정했다.
“저희는 아닙니다. 어르신에 관해선 저와 삼장로 외에는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정천맹의 조사단도 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믿겠네. 아, 그리고 며칠 내로 다시 빙정을 가져다주길 바라네. 아마 마지막 요구일 게야.”
마지막이라.
궁주를 몰아내려는 반란도, 그를 위해 월영련과 천마신교의 인물과 협력하는 것도 이제 슬슬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