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7장 사사(3)
북해림의 위치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은신처를 벗어나 삼 일 정도 내달리면 도착할 거리였다. 도중에 큼지막한 설산을 하나 넘어야 하긴 했지만 그 산도 이제는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산만 넘으면 북해림에 도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의 다 왔다는 봉우의 말에 소룡단원들은 슬슬 긴장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봉우가 북해림에게 궁주로서 인정받아 원조를 얻게 된다면, 남은 건 반란을 일으킨 대장로의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것뿐이었다.
해서 나와 소룡단은 북해림으로 이동하는 사흘간 북해빙궁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봉우에게 전해 들은 상황이었다.
그중 익히 들었던 여섯 명의 장로.
일장로와 오장로는 확실한 봉우의 편이지만 지금은 제압된 채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거라 예상하는 중이었다.
대장로 심윤술과 삼장로 안현이 반란의 중심이며 나머지 이장로와 사장로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장로들은 각자 하나의 무력 부대와 각(閣)급에 해당하는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중 내 손에 죽었던 중년인이 대장로가 이끄는 영화대의 대주.
다른 장로들과 달리 대장로는 영화대 말고도 자신만의 친위대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봉우가 강조했다.
다시 각 장로가 이끄는 무력 부대와 세력에 속한 무인들의 숫자는 각자 대략 이백 명 이상.
그 밑으로 북해빙궁의 평범한 무인들까지 합치면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의 숫자는 삼천에 가까웠다.
“…삼천 명이라고요?”
그 말을 들은 소룡단원들은 흠칫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가능성 있는 싸움이냐고 물어보는 눈빛. 우리는 고작해야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었으니까.
나는 그런 녀석들을 마주 바라보며 대답했다.
“숫자는 삼천이지만 그 모두를 쓰러트려야 하는 게 아니잖아.”
막말로 반란의 중심인 대장로와 삼장로, 그리고 그 주변의 주요 인사들만 처치해도 반란은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놈들이 혼자서 전면에 나서거나 암살에 노출될 가능성을 내비치진 않을 테니, 어느 정도의 교전은 불가피했다.
그때 봉우가 내 의견에 힘을 실었다.
“맞습니다. 삼천 명이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중 반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자들입니다. 빙궁의 주요 사업 중 하나인 만년빙정의 추출을 위한 인력들이죠.”
“만년빙정이라는 거. 엄청 비싼 물건 아닙니까?”
만년빙정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 단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북해의 산물인 만년빙정의 값어치가 같은 무게의 금괴와 거래될 정도라고 하니 북해가 축적한 부는 내 상상 이상일 것 같았다.
“일이 잘 풀려서 제가 궁주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여러분께 만녕빙정 하나씩을 내드리겠습니다. 주먹만 한 크기로요.”
“…헉!”
봉우가 자신을 돕는 대가로 만년빙정을 약속하자 소룡단원들의 두 눈에 황금빛이 물들었다.
명문가의 후계자라 재물엔 다소 초연함을 내보이는 남지학과 장진악조차 움찔거릴 정도였다.
두 사람이 그 정도이니 다른 소룡단원 녀석들은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봉우는 내게는 따로 만녕빙정 말고 다른 보답을 해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혹시 원하는 게 있냐고 물어보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만녕빙정으로 충분해.”
“그럴 순 없습니다. 유 공자는 제게 은인이자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 그러니…….”
뭐가 좋을지 고민을 거듭하는 봉우를 바라보던 나는 뭐든 상관없다고 대답하려다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동하고 있는 산길 너머에서 희미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얼추 오십 명. 저번에 싸웠던 놈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적들의 매복을 앞서 감지한 내가 경고하자 인원들은 크게 긴장했다. 그들은 아직 적들의 기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아직 먼 거리이긴 하지만 놈들에게선 완연한 살기와 적대감이 뿜어져 나오는 상태였다.
‘그중 하나는… 상당한 실력잔데.’
중원에서도 이만한 기세는 흔하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십에 달하는 적들의 수장은 상당한 고수였다.
“북해빙궁에선 누가 제일 강하지?”
내가 묻자, 봉우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삼장로 안현입니다.”
“대장로와 함께 반란의 중심에 서 있다던?”
“예. 애석하게도… 그자가 북해의 제일가는 고수입니다. 다른 장로들은 삼장로보단 조금 실력이 떨어지는 정도고요.”
북해 제일의 실력자라.
확실히 이 정도 기세면 북해에서 가장 강하다고 여겨질 만했다.
“그 삼장로라는 놈이 이 앞에 있는 것 같은데.”
“예? 그럴 리가요. 삼장로가 왜…….”
봉우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반란을 일으킨 놈들에게 있어서 궁주인 자신의 목숨이 가장 필요하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삼장로가 직접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저쪽은 우리가 북해림으로 향할 거라는 것까지 예상했나 보군.”
“…제게 남아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저들도 북해림을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북해림과의 접촉을 의식하는 건지, 단지 은신처에 숨어들었던 우리를 찾을 길이 없어 모습을 드러낼 만한 곳에 죽치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적들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뿐.
나는 봉우와 그의 호위무사들, 그리고 소룡단원들을 차례차례 쳐다봤다. 그리고 정면이 아닌 좌측을 가리켜 보였다.
“너희들은 저쪽으로 길을 돌아서 곧장 북해림으로 향해라.”
내 말에 인원들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유 공자께서 홀로 삼장로와 오십 명에 달하는 무인들을 상대하시겠다고요?”
봉우를 시작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널 혼자 놔두고 우리만 몸을 피하라고?”
“형님. 형님이 아무리 강해도 그건 안 됩니다. 저쪽도 북해 제일의 고수라면서요?”
“부단주님 덕분에, 그리고 은신처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저희 소룡단도 많이 강해졌습니다. 싸울 수 있습니다.”
남지학과 장진악, 그리고 소룡단원들이 내 결정에 불복하고 나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결정을 번복할 리가 없지.
나는 그들을 지나쳐 정면의 길로 나아가면서 말을 이었다.
“정천맹을 떠나 북해에 도착해 지금까지 두 달이 지났고 그 시간 동안 틈틈이 내가 단련시켜 두었으니 당연히 강해졌어야지. 그러니 그 실력으로 지금은 북해빙궁의 궁주를 목적지로 데려가라.”
“하지만…….”
끝까지 만류하려는 남지학에게 나는 총군사 묵가후의 말을 상기시켰다.
“총군사님께서 내 판단을 따르라고 했다며?”
“…….”
“반란이 일어난 지도 거의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으니, 이 판단이 옳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래. 저들을 상대하고 난 뒤 곧장 따라가마. 이걸 챙겨둬.”
나는 품속에서 추종향을 병째로 꺼내 남지학에게 건넸다. 이후에 이걸 통해 인원들과 벌어진 거리를 따라잡을 심산이었다.
남지학은 추종향을 받아 일단 제 몸에 발라놓고는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조심해라.”
“내 걱정은 말고 궁주 녀석이나 잘 챙겨.”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계속 정면을 향해, 나를 제외한 인원들은 좌측의 수풀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
‘아직 눈치채지는 못했나 본데.’
나를 제외한 인원들이 샛길로 빠져나갔음에도 매복하고 있는 적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놈들을 향해 적당한 속도로 계속 나아갔다.
놈들과 가까워질수록 삼장로 안현의 존재감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중원의 천하십대고수들과도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놈으로서는 이번에 만난 상대가 나라는 게 문제였다.
현재 전생의 내 실력을 넘어선 나는 내색하진 않았어도 천하십대고수들보다 윗줄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월영련주 단룡위와 검신 영감.
둘을 제외하면 내가 위협을 느낄 만한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넓디넓은 천하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고수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북해 제일의 고수라는 삼장로 안현은 그 정도의 고수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때.
쉭.
허공을 가르는 희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빠르고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삼장로 안현이 슬슬 내 기세를 알아차리고 맞은편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그는 새하얀 장발을 가지런히 늘어뜨린 중년인의 모습.
북해의 한기마저 비껴갈 정도의 차가운 기세는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주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상보다… 나이가 어리구나.”
예상보다?
“나를 아나?”
내가 묻자 안현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네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건 파악하고 있었다. 영화대주를 내력만으로 단숨에 불태워 죽였더군. 나머지도 모조리 일검에 베어 넘겼고.”
낌새를 보니 봉우와 처음 마주쳤던 그 숲속에서 혈전의 흔적을 발견하고 우리를 뒤쫓았던 것 같았다.
소룡단 녀석들이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지만 안현 같은 고수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나 보다 싶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언제든 검을 뽑아 들 수 있도록.
“내 실력에 대해 알아차렸다면 반란 따윈 그만두고 현 궁주를 따르고자 했어야지.”
“알아차렸기에 지금 내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아니겠나? 네놈을 제외한 궁주와 나머지가 다른 길로 빠져나갔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궁주가 북해림과 접촉하는 것보다 네놈 하나가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지.”
말을 하는 안현의 주변으로 하나둘씩 나머지 빙궁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오십에 달하는 수하들과 함께 나를 합공할 심산인 듯 보였다. 그런 그의 판단은 옳은 판단이자, 여전히 틀린 판단이었다.
놈들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내가 맞지만, 이 정도 인원으로는 나를 죽일 수가 없을 테니까.
적어도 두세 배의 인원은 더 끌고 왔어야 했다.
바꿔 말하면 반란 세력의 중심 중 하나이자 북해 제일의 고수라는 그가 고작 오십이라는 숫자와 함께 궁을 벗어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적들의 전력 한 부분을 잘라낼 기회라는 거였다.
여기서 삼장로 안현을 처리하게 되면 남은 건 빙궁에 있을 대장로뿐이었다.
만약 봉우가 북해림의 원조까지 받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불리했던 전황의 흐름을 크게 뒤집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혹시 모르니 최대한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선에서 끝낼까.’
안현에게서 무언가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삼장로라는 직위를 가진 인물이니 그의 처단은 봉우에게 맡기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반란을 일으킨 죄인이라지만 북해 제일의 고수라는 점을 고려해 개심이라는 대가로 용서할 가능성도 있었다.
대신.
“주인을 문 개새끼니 팔 한 짝 정도는 잘라내도 되겠지.”
슁.
내가 덤덤히 검을 뽑자 안현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