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8장 진압(1)
“지금이라도 유 공자께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수풀 너머 샛길로 빠져나와 북해림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던 봉우는 힐끔 뒤편을 쳐다봤다.
유진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몸소 체감했었다.
천하제일의 후기지수이자 실력 면에선 천하십대고수. 그 수식어가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삼장로 안현 역시 북해 전역을 통틀어 가장 강하다고 여겨지는 고수다. 게다가 그는 오십에 달하는 빙궁의 정예 고수들을 이끌고 온 상태였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숫자 앞에 장사 없다는 말도 있듯이 유진휘가 홀로 미끼를 자처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남지학과 소룡단원들 역시 그런 봉우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정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들인 자신들의 실력이 지금은 유진휘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진휘는 봉우가 하루라도 빨리 북해림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지금보다 강했다면 그를 혼자 남게 하진 않았겠지.’
남지학은 주먹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결의를 불태웠다.
그러는 사이, 장진악은 봉우 옆에서 그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궁주님께선 중원 정파 세력의 천하오주를 알고 계십니까?”
“천하오주입니까?”
봉우는 다른 무가나 문파는 몰라도 정파를 대표하는 오대 세력인 천하오주에 대해선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태산파와 선우약가. 그리고 진천문까지. 세 곳 모두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형님께서 나서서 그들을 모두 구해낸 적이 있습니다.”
“유 공자께서 위기에 빠졌던 천하오주를요?”
“예. 그때도 형님께선 홀로 적들을 상대하며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물론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지요. 적이 얼마나 강한 고수든 간에 형님의 검 앞에선 목이 그냥…….”
장진악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봉우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 형님 걱정은 말고 저희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예. 꼭 북해림의 원조를 받아내겠습니다.”
봉우의 걱정을 덜어준 장진악은 이번엔 남지학을 쳐다봤다.
“너도 표정 좀 풀어라.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나도 안다. 다만…….”
“우리도 형님만큼, 아니, 형님만큼은 힘들어도 형님 옆에 설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되는 거잖냐. 나도 충분히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장진악의 말에 남지학은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
권룡 장진악.
강호에선 괴짜라고 불리며 매사에 무신경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한데 실력만 좋은 단순 무식한 녀석이었다.
과거엔 그랬으나 함께 소룡단으로 소집됐을 때 만났던 장진악은 과거와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그는 자신이 알던 권룡이 아니었다.
장진악은 그러한 남지학의 심중을 알아차렸는지 피식하는 미소를 흘렸다.
“형님께 멋모르고 덤볐다가 된통 두드려 맞아서 정신 좀 차렸다. 너도 맞아봤잖아?”
“…맞아봤지.”
남지학은 유진휘와 벌였던 비무를 상기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이내 눈을 빛냈다. 장진악의 말대로 지금은 자신이 맡은 일에, 봉우를 무사히 북해림까지 호위하는 일에 집중할 때였다.
***
쉬익! 퍽!
한줄기 새하얀 기운이 허공을 갈랐다. 그 궤적의 끝에 걸린 무인 하나는 가슴이 꿰뚫려 힘없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더욱이 관통당한 상처에서 피어오른 극음의 한기가 몸 내부와 외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 한음지!”
순간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적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중원의 무인인 내가 북해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삼장로 안현조차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네놈이 어째서 북해의 무공인 한음지를……?”
나는 가슴 위로 들어 올린 손가락을 이리저리 놀리며 피식 웃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거 없고. 익혀보니 꽤 쓸 만한 무공이더군.”
“꽤? 감히 북해의 무공을 네놈 따위가 평가해?”
쉬익! 퍽!
다시 또 한 놈.
한음지의 지풍에 당한 무인 하나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고꾸라졌다.
이 일련의 과정은 단순히 안현을 도발하기 위함이었고.
“이놈-!”
도발이 먹혀든 안현은 일갈과 함께 내게 단숨에 짓쳐들어왔다. 새하얀 기운을 담은 손바닥은 곧장 내 머리를 노렸다.
한데 흥분한 것치고는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원하던 빈틈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하긴 북해 제일의 고수라는데…….’
파앙!
검을 뽑은 내가 놈의 일장을 쳐내자 역시나 충격의 여파로 짙은 한기가 내 몸을 급습해왔다.
북해의 무공이 까다로운 이유는 공격을 막아도 뒤이어 따라오는 한기가 내 움직임을 제한해서였다.
그 한기를 밀어내기 위해 나로서는 평상시의 전투 때보다 내공을 두 배로 소모해야만 했다.
카가각!
이번에는 좌우에서 호선을 그리며 휘어들어 오는 쌍장을, 검을 비스듬히 눕혀 흘려보낸 뒤 그대로 반격에 들어갔다.
빠르게 승부를 볼 생각이었기에 나는 아낌없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나는 일단 괘월선보를 극성으로 발휘해 놈의 시야에서 빠져나왔다.
쉭!
“헛!”
순간적이나마 내 움직임을 놓친 안현이 탄식을 흘렸고 그 순간에 나는 이미 놈의 후방으로 돌아들어 간 상태였다.
이어 그대로 놈의 왼팔을 노리고 검을 아래로 그었다.
쩌-억!
한데 내 검은 정확히 놈의 왼쪽 어깨 위에서 멈춰 섰다. 터져 나온 소리 역시 팔을 내려친 게 아니라 단단한 무언가를 내려치는 소리였다.
‘얼음?’
내 눈에 들어온 건 놈의 왼쪽 어깨 위로 피어오른 새하얀 얼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북해의 한기를 머금은 호신강기와 같은 부류의 무공이었다.
“쥐새끼 같은 움직임이로군.”
내 움직임을 놓친 게 분했던지 안현은 거칠게 몸을 휘돌려 다시금 쌍장을 쏟아부었다.
파파파파팡!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놈의 공격을 일일이 쳐내면서 나는 놈의 전신을 보호하는 유기적인 움직임의 기운을 눈여겨보았다.
새하얀 기운이 몸 주변을 선회하다가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놈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지켜주는 듯싶었다.
“해괴한 무공을 익히고 있네.”
“‘심오한’을 잘못 말한 게 아니더냐?”
안현은 제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게 문제였다.
카강!
공격을 막아내다가 슬쩍 반격을 찔러넣어 보자 예의 그 기운이 이번에도 내 검을 막아냈다.
“천빙갑(天氷鉀)이라는 북해의 무공이다. 네 실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내 몸엔 상처 하나 낼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맹신하는 거 아닌가?”
텅!
놈의 복부를 걷어차 거리를 벌린 내가 조소를 지어 보였다.
이름이 뭐건 간에 놈의 몸을 지켜주는 저 기운은 호신강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기운 자체가 스스로 판단해 몸을 보호한다는 것뿐.
덕분에 안현은 수비는 배제한 채 오로지 공격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따위 기운은 부숴버리면 그만이었는지라 나는 검에 실은 내공을 일점에 집중시켰다.
이어 지면을 박차 그대로 놈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놈은 내 의도를 알아차렸음에도 여전히 제 무공을 맹신한 채 마주 쌍장을 뻗어왔다. 내 검은 천빙갑의 기운을 두른 몸으로 막아내고 그 틈에 반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꽈드득!
“커억!”
가슴께에 검을 적중시키자 놈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놈을 지켜주던 천빙갑의 기운에 금이 갈 정도의 충격이었으니 고통이 상당할 게 분명했다.
나는 휘청거리는 놈에게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다시금 바짝 달라붙어 검을 뻗었다.
쩌억!
“크헉!”
이번에도 안현은 고통을 참아내며 몸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놈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기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따위 무공을 익힌 덕에 고통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을 테지?”
“크윽!”
상처란 걸 입어본 적이 없는 만큼 놈은 고통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던 놈의 천빙갑이 깨져나갈 조짐을 보였다. 나는 마지막 일격을 가할 생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때, 안현의 양손 위로 몸이 아릴 정도의 한기가 피어올랐다. 적절한 순간에 펼쳐진 반격이었다. 놈은 조금이나마 내 동작이 커질 때를 노리기 위해 기세를 웅크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어.
후-웅!
놈의 쌍장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강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회전을 거듭하다가 그대로 내게 쏘아졌다.
그 기운은 마치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을 집어삼키는 눈보라와 같았다.
결국, 나는 검을 거둬들인 뒤 뒤로 후퇴하면서 천일백야검법의 후반부 초식 중 두 번째 초식인 무령지유(無靈之有)를 펼쳐냈다.
검령백분이 이기어검의 경지를 다루는 초식이라면 무령지유는 이기어검의 경지와 함께 무형검(無形劍)의 경지까지 내포한 초식이었다.
촤라라락!
순간 내 주변으로 검의 형상을 띈 강기가 무수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빚어지는 그 무형검들은 내 의지에 따라 안현이 쏘아낸 기운을 향해 쏘아졌다.
이어.
콰과과광!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눈보라와 강기로 이루어진 검림(劍林)이 허공에서 충돌했고 그 여파로 주변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
“삼장로님을 보호해라-!”
초식과 초식의 격돌 이후 안현은 뒤로 쭉 밀려나 한 움큼의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고, 나는 몸 곳곳이 칼날 같은 얼음의 파편들에 베여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서로 상처를 입긴 했지만, 승자와 패자는 이미 정해진 후였다.
그로 인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무인들이 즉각 움직였다. 안현을 지킬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나를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오십이 넘어가는 숫자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직 내공에 여유가 있었고 내 주변에도 여전히 무령지유의 초식으로 빚어낸 무형검이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쉭!
나는 손에 쥔 검을 쏘아내 가장 선두에서 쇄도해오는 한 놈을 처리한 뒤, 허공 위에 떠 있는 무형검 하나를 낚아챘다.
오로지 강기만으로 이루어진 검은 얼핏 보면 형체가 보이지 않을 만큼 투명했다.
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허공을 선회하다 내 의지에 따라 적들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 가공할 광경에 적들이 달려들다 말고 움찔 멈춰 섰다.
“무, 물러서지 마라!”
그중 누군가가 악을 쓰며 기세를 북돋으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북해 제일의 고수라는 안현마저 당해내지 못한 초식은 이미 놈들의 기세를 압도하고 있었다.
“덤비든 도망치든 알아서들 해라. 어차피 죽을 테니까.”
내가 손을 뻗자 마침내 수십 자루의 무형검이 허공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때.
“자, 잠깐!”
다급한 음성이 잠시 내 공격을 멈춰 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안현이 내 앞으로 다가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와 이곳에 있는 자들은 전부 반란을 일으킨 죄를 인정하고 궁주께 항복하겠다.”
안현이 제 입으로 패배를 시인하자 나머지 적들 역시 조심스레 부복하고 나섰다.
나는 그런 놈들을 바라보다가, 놈들의 목을 겨누고 있던 무형검들을 회수해 와해시킨 뒤 입을 열었다.
“전부 살려 둘 마음은 없는데.”
“…….”
내 차가운 어조에 안현은 눈을 질끈 감더니 자기 왼팔을 오른손으로 강하게 잡아 뜯었다.
푸확, 하고 터져 나오는 핏물과 찢겨 나온 왼팔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안현은 그 상태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대가 원하던 왼팔 한 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