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8장 진압(3)
“누, 누구요?”
정체를 묻는 말에 나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빙궁의 일장로님 맞습니까?”
내가 묻자, 사지가 속박된 채 벽에 구속되어 있던 노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소. 내가 일장로요.”
긍정하는 대답도 그렇고, 생김새나 양쪽 눈의 색이 각기 다른 빛을 띠고 있는 모습을 보아 그가 일장로 염흥방임을 확신했다.
몰골이 다소 초췌하긴 했지만 안현에게 들은 특징 그대로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소협께선 누구기에? 그리고 어떻게 이 지하 감옥까지 들어올 수 있었단 말이오?”
“길게 설명해 드릴 시간은 없고, 북해림으로 향하고 있는 현 궁주님을 대신해 찾아왔다는 것만 일단 알고 계십시오.”
“구, 궁주님께서 정녕 무사하단 말이오?”
“예.”
나는 짧은 대답과 함께 염흥방을 구속하고 있던 장치와 사슬들을 전부 뜯어낸 뒤 그의 혈도를 짚어 제압을 풀어주었다.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던 그는 혈도가 풀려 기운이 돌아오자 금방 기세를 되찾았다.
“고맙소.”
“인사도 나중에요.”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은 빙궁의 지하 감옥 중에서도 가장 깊은 층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하릴없이 몇몇 적들을 맞닥뜨렸고 그로 인해 작은 소란이 피어난 상황. 다행인 건 나는 여전히 북해의 무공인 한음지와 겉으로는 별다른 표시가 나지 않는 사신무만을 사용했다는 거였다.
“곧 침입을 알아차린 적들이 대거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오장로님은 어디 계십니까?”
내 물음에 염흥방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오장로 노목이 갇혀 있던 곳으로 달려가 철창을 뜯어냈다.
노목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지 염흥방과 함께 금방 나타났다.
“정말 궁주님께서 보내신 거요? 궁주님은 현재 북해림으로 향하고 있고?”
염흥방에게 건넸던 말을 노목도 듣고 있었기에 그는 봉우가 무사하다는 말이 진심인지를 되물었다.
나는 노목에게도 짧게 사정을 설명해주고 바로 앞장섰다.
“저만 뒤따라오시면 됩니다. 적이 막아서더라도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달리기만 하세요.”
“아, 알겠소.”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나는 지체 없이 지면을 박찼다.
극성의 괘월선보를 발휘하자 나는 왔던 길을 순식간에 지나쳐 지하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를 뒤따르던 두 사람은 내가 쓰러트린 시체들을 슬쩍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들은 대부분 북해의 무공인 한음지에 당한 듯싶은데. 소협 말고 또 누가 있는 거요?”
“아뇨. 저뿐입니다.”
“음?”
염흥방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적들이 아직은 내 침입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막아서는 자들이 없어서 나는 미리 확보해 두었던 퇴로 쪽으로 몸을 날렸다.
파바박!
건물과 건물을 뛰어넘고 다시 성벽을 두어 번 박차 꼭대기에 올라서자 잠시 뒤에 염흥방과 노목도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쫓아왔다.
“허, 소협의 실력이 예사롭지가…….”
“감탄도 나중에 하시고.”
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성벽 밑으로 몸을 날렸다.
***
“헉헉!”
빙궁에서 꽤 멀어졌다 싶은 순간에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가 이내 멈춰 서자 염흥방과 노목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전력으로 내달리는 속도를 뒤쫓아온 데다가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모를 지하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으니 체력과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두 사람에게 품속에서 작은 단약을 꺼내 건넸다.
내상을 치료하고 원기를 북돋아 주는 약으로 백의문에 들를 때면 공손량이 늘 챙겨주던 거라 품 안에 여유 있게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눈치 보지 않고 단약을 건네받아 복용한 뒤 내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소협에게 큰 신세를 졌소이다.”
“그렇소. 궁주님의 소식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며칠 남지 않은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이어 염흥방과 노목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감옥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떠들어대다가, 이내 궁주인 봉우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게 된 상황에 크게 기뻐했다.
“당장 북해림으로 갑시다. 궁주님도 그곳으로 향하고 계신다지 않소?”
“그래야지요. 그전에…….”
노목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염흥방은 내게 다시 시선을 건넸다.
“혹 소협은 중원에서 온 무인이시오?”
“예.”
“그렇군. 경공이 지나치게 뛰어나 유심히 살펴보다가 알게 됐소. 한데 어찌하다 이 먼 길을 오셔서 궁주님을 돕고 있는 건지, 그리고 소협께서 어떻게 북해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소이까?”
소룡단이 북해에 도착한 게 염흥방과 노목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 시점과 비슷했을 테니 우리에 대해 모르고 있는 듯싶었다.
“정천맹 소룡단 소속의 유진휘라고 합니다.”
짧은 소개와 함께 그간의 경위를 설명해주자 두 사람의 표정이 시시각각 급변했다.
마지막에 삼장로 안현을 제압해 두었다는 말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소협께서 삼장로를?”
“그럴 수가. 삼장로의 무공은 그 어떤 공격의 범접도 금지하는 무공이거늘.”
안현이 펼쳐 보였던 천빙갑을 얘기하는 건가. 내가 보기에도 천빙갑이란 무공은 확실히 수비에 탁월한 이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운이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다가 웬만한 강기로는 꿰뚫을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저도 그 천빙갑이란 무공을 마주했을 땐 좀 놀라긴 했었습니다.”
“천빙갑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정말로 삼장로를 꺾으셨나 보오.”
두 사람이 쉬이 믿지 않는 걸 보아 안현이 확실히 북해 제일의 고수이긴 했나 보다 싶었다.
해서 나는 일단 두 사람을 적당한 숲속에 던져두었던 안현에게 데려갔다.
안현은 여전히 나무 기둥 밑에 사지가, 아니, 왼팔이 없으니 사지라기도 뭐한 신체가 묶인 채 속박되어 있었다.
“허…….”
그런 안현의 몰골을 발견한 염흥방과 노목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북해 제일의 고수인 그가 패배했다고는 해도 이런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때, 축 늘어져 있던 안현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의 시선이 염흥방과 노목을 지나쳐 내게로 꽂혔다.
“이 미친놈이 설마설마했는데 기어이 해냈구나.”
***
“대, 대장로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무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장로 심윤술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그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궁리하던 무인을 향해 심윤술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때문에 그리 호들갑을 떠는 게야? 설마 궁주를 추격하기로 했던 삼장로가…….”
“아, 아닙니다. 삼장로님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일장로님과 오장로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쾅!
탁자를 내려치며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심윤술이 눈을 부릅떴다.
“사라졌다니?”
“지난밤에 외부에서 누군가가 잠입해 왔습니다. 동쪽 성문을 지키던 무인 네 명을 시작으로 지하 감옥의 경비 무사들 이십여 명이 시체로 발견됐고…….”
누군가가 빙궁으로 잠입해 일장로와 오장로를 빼내 갔다는 말에 심윤술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인지 정체는 모르나, 두 사람을 빼내 갔다는 건 궁주인 봉우가 여전히 무사하다는 방증이 아니던가.
북해 제일의 고수인 삼장로가 나섰는데도 도리어 반격을 가해오다니.
“또한 시체 대부분에서 한음지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한음지?”
한음지라면 북해의 무공 중 지법으로는 손에 꼽히는 수준의 무공이 아니던가.
한음지를 익히고 있는 건 궁 내부에서도 궁주와 장로들 그 외에 몇몇 고위급 간부들뿐이었다.
‘내부에 여전히 놈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가 남아 있었던 건가?’
외부에서부터의 침입이라고 했지만, 침입자가 한음지를 사용했다고 하니 침입을 가장한 내부인의 소행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따르기로 했던 이장로. 혹은 확답을 주진 않았지만, 은연중에 자신의 편에 서려고 하는 사장로. 그 외에도 의심 가는 인물이 몇몇 떠올랐다.
“빙궁의 전력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일장로와 오장로도 차라리 회유보다는 반란을 일으켰던 그날 그 자리에서 죽여 놓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쨌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궁 내부의 분위기였다. 자신에게 승기가 기울고 있던 이 순간에 궁주가 내놓은 이 한 수는 제법 타격이 컸다.
‘능력도 없는 한낱 애송인 줄 알았더니…….’
심윤술은 머릿속으로 피어오르는 궁주의 모습을 단숨에 지워버린 뒤 입을 열었다.
“두 장로가 궁주의 편에 서게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 괜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전하고. 그전에, 삼장로로부터 별다른 보고가 올라오진 않았는지 알아보고 더불어 이장로와 사장로를 불러오거라.”
“알겠습니다.”
염흥방과 노목. 두 사람이 사라졌으니, 남아 있는 이장로와 사장로를 당장 확실하게 제 편으로 만들어두려는 심윤술이었다.
***
“소협께선 북해림의 위치를 어찌 알고 있는 게요?”
염흥방과 노목. 그리고 안현까지.
세 사람과 함께 북해림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내가 앞장서고 있자 염흥방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어왔다.
“일행에게 건네둔 추종향을 뒤쫓고 있는 것뿐입니다.”
“오. 그런 방법이…….”
“…….”
이젠 하다하다 별걸로 다 감탄하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염흥방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염흥방은 물론이고 노목까지 지금껏 오는 내내 나를 향해 경외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 기저엔 내가 이제 갓 약관을 넘어선 젊은 나이의 후기지수라는 사실이 깔려 있을 터였다.
안현 역시 북해 제일의 고수인 자신을 꺾은 내가 이토록 어린 줄은 몰랐던지 중간중간 힐끔거리는 시선을 던져왔다.
나는 그런 세 사람의 시선을 덤덤히 흘려 넘기며 추종향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빙궁에 잠입해 두 장로를 빼 오는 데 하루 남짓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일행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어지진 않았으리라.
반나절 정도 속도를 높여 쫓아가자 마침내 일행들의 행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서둘러 가면 일행들과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살아서 궁주님을 다시 만나 뵙게 된다니. 이게 다 소협의 도움 덕분이오.”
“지금은 제가 도와드리는 처지지만 앞으로는 두 분께서도 저희를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대장로와 결탁했다는 마교의 인물 때문이로군. 거기다 그 배후에 있는 월영련이라는 세력까지.”
염흥방과 노목에게 나와 소룡단이 북해로 오게 된 연유와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한 이후라 두 사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의 적을 상대하게 된 상황인 데다가 소협은 궁주님과 노부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니 도움이란 말은 가당치 않소. 나아가 궁주님께서 무사히 대장로의 반란을 진압하고 빙궁의 상황이 정리가 된 이후에는 소협뿐만 아니라 정천맹과도 교류를 맺으면 어떨까 싶소.”
북해빙궁과 정천맹이 동맹을?
궁주와 대장로 다음 가는 지위인 일장로 염흥방의 발언이니만큼 단순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진심이십니까?”
“당연히 진심이오. 물론 궁주님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궁주님께서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은데.”
봉우야 당연히 긍정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게 무언가 보답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으니까.
어쨌든 북해빙궁과의 동맹은 월영련과 마교와 전쟁을 앞둔 정천맹에겐 큰 힘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물론 동맹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북해의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어서 나는 걸음을 조금 더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