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1장 원조(2)
“쫓겨나면 쫓겨났지,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북해림의 정문으로 들어서며 여인과 눈을 맞췄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얇은 천 너머로 비치는 눈빛에선 차갑고도 날카로운 기세가 묻어나왔다.
내 은신을 알아차릴 정도의 고수인 데다가 직접 마주하고 나니 확실히 그녀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여인이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북해빙궁의 궁주님을 제외하곤 문을 열어드릴 수 없는 게 북해림의 원칙이긴 하지만, 공자님 같은 고수 앞에선 그 문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괜히 발길을 멈추어 세우려다 문이 박살 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내가 그렇게 막돼먹은 놈은 아닌데.”
“저도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짧은 대화 속에서 그녀는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려는 듯 보였고 반대로 나는 그녀를 넘어 북해림의 장원 곳곳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무인들의 숫자와 수준을 헤아렸다.
얼추 백 명 남짓한 인원들로 이루어진 세력이었는데 들은 대로 그 하나하나가 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은 고수들이었다.
당장 눈앞에 서 있는 여인 역시 인극 고수.
암암리에 북해빙궁을 수호하며 오로지 북해빙궁주의 명령만을 따르는 세력이라더니.
이 정도면 확실히 비장의 한 수라 여겨질 만했다. 물론 그들이 아직 봉우를 진정한 궁주로서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았지만.
와중에, 봉우가 내게 나직이 물어왔다.
“유 공자님이 왜 이곳에…….”
“딱히 이유는 없는데, 북해림에 관한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흥미가 생겼나 보더군. 산 밑에서부터 느껴지던 누군가의 기세에 이끌렸다고 볼 수도 있고.”
설산 전체를 아우르던 기세가 북해림이라는 세력 자체에서 풍겨오는 기세인 줄 알았건만, 장원에 도착하고 나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기세는 북해림이 아니라 북해림의 인물 중 하나가 품고 있는 기세였다는 걸.
“북해 제일의 고수가 이곳에 있었네.”
그동안은 봉우의 말대로 삼장로 안현이 북해에서 가장 강한 인물인 줄 알았다. 직접 겪어본 바로도 안현은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오감을 자극하고 있는 저 인물이야말로 안현을 뛰어넘는 북해 제일의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내 말에 봉우와 여인이 동시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북해 제일의 고수…….”
봉우는 그 인물의 존재감을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지 장원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반대로 여인은 더욱 지긋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예의 그 미소를 되찾았다.
“북해림주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여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장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건물이었다.
북해림주의 거처라기엔 낡고 초라했으나 건물 안쪽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운 덕에 그 초라함이 희미해졌다.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여인은 그 건물 앞에 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림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어 잠깐의 정적 끝에 대답이 들려왔다.
“곧 나가마.”
설산의 풍경처럼 맑고 깨끗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중후한 목소리였다.
덜컹.
얼마 지나지 않아 낡고 해진 문이 열리면서 백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나를 제외한 봉우만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대 궁주님을 쏙 빼닮았구나.”
노인의 말에 봉우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북해림의 수장이자 자신의 아버지를 모셨던 인물을 향한 당연한 예우였다.
“봉우가 북해림의 어르신을 뵙습니다.”
“그래.”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 끝으로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걸로 과거의 인연은 끝맺음을 지어야겠지요.”
온화하다고도 할 수 있었던 미소가 사라지자 노인에게선 다시금 설산을 아우르던 차가운 한기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현 궁주께서 북해림에 방문하셨으니, 빙궁에 무언가 변고라도 생긴 모양입니다?”
“예. 궁주인 제가 부족한 탓에…….”
봉우는 노인에게 지금까지의 사정을 자세히 토로했다.
대장로인 심윤술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 궁을 탈출해 도망치다가 마주친 소룡단과의 인연. 이를 계기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무공이 일취월장하여 지금은 스스로 궁주의 지위를 되찾고자 결심을 세운 상태라는 것까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선 북해림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대장로인 심윤술은 제 야욕을 채우기 위해 마교와 월영련이라는 제 삼의 세력과 손을 잡았습니다. 북해빙궁의 궁주로서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인 만큼…….”
봉우가 긴장한 눈빛으로 말을 잇는 도중에 노인의 시선이 마침내 내게로 향했다.
“제삼자와 손을 잡은 건 궁주께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만.”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라 봉우는 순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와 소룡단이 아니었다면 봉우는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되었을 테고 대장로의 반란 역시 성공적으로 결착이 난 상황이었을 터.
그렇게 되면 북해림 역시 새로이 궁주가 된 대장로에게 충성을 바쳤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현 궁주께서는 오로지 한 가지 사실만 증명하시면 되는 겁니다.”
“한 가지라면 어떤?”
“북해림이 왜 대장로가 아닌 봉씨 가문의 후계자를 궁주로서 인정하고 따라야 하는가.”
노인이 차가운 얼굴로 안광을 터뜨리며 봉우를 내려다보자, 봉우는 그 기세에 눌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길 잠시.
봉우는 내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하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려 그 기세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기세와 기세가 뒤엉키며 서서히 주변의 공기가 달아올랐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팽팽했던 기 싸움이 한쪽으로 치우쳐갔다. 아무리 봉우의 무위가 일취월장했다고 하더라도 노인의 기세를 감당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일견하기에도 노인은 인극의 경지를 넘어선 지극 고수.
중단전이 개방된 채라 머지않아 인극의 경지에 도달할 봉우라지만 당장은 완연한 지극 고수인 노인에게 일초지적도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봉우는 악물고 있는 입술 사이에서 핏물이 터져 나오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노인에게 맞섰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로서는 봉우가 깊은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만큼 결과가 눈에 훤히 보였지만 굳이 나서지 않았다.
아마도 노인은…….
내가 속으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사방으로 휘몰아치던 기파가 눈 녹듯이 사라지면서 봉우가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노인은 그런 봉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히 듣던 것과 달리…….”
북해림주인 만큼 궁주인 봉우를 향한 북해의 평가가 어떤지는 인지하고 있었다는 분위기였다.
반란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 역시 능력과 자질이 모자란 봉우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조금 전 치렀던 작은 시험을 통해 봉우를 다시 보게 됐을 게 틀림없었다.
봉우 또한 그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노인을 올려다봤다.
“이걸로 조금은 인정을 받은 겁니까?”
노인이 대답 대신 손을 뻗자 새하얀 기운이 흘러나와 봉우를 휘어 감았다. 그 기운은 천천히 봉우를 일으켜 세웠고 이내 노인은 봉우를 지나쳐 내 앞으로 다가섰다.
“궁주님을 인정하기에 앞서, 한 가지 더 확인해 볼 게 있습니다.”
***
나와 마주 선 북해림주는 마치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다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원의 정천맹 소속 무인이라고?”
“유진휘라고 합니다.”
내가 짧게 소개하자 북해림주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현 궁주님과 같은 젊은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내가 그의 기세를 읽어낸 것처럼 북해림주 역시 내 기세가 어느 정도인지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파악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었다.
놀람과 호승심.
그건 내가 느끼고 있는 심정과도 같았다.
북해림주의 기세는 검신 영감이나 월영련주 단룡위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 말은 나와도 실력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봉우를 통해 북해의 무공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있던 나로서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 북해림주가 한 가지를 물어왔다.
“자네가 궁주님께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고 들었네만.”
“중원의 방식대로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과 그 외 몇 가지를 지도해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해의 무인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충고해 주었다던데.”
“어르신을 뵙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지는 중이긴 합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북해림주에 한해서는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심을 전하자 북해림주가 묘한 미소와 함께 느닷없이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의도는 당연히…….
“진심이십니까?”
내가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의 무공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이나, 궁주님을 보고 있자면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됐네. 그러니 이 늙은이가 개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그냥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신 걸로 보입니다만.”
“그 말 역시 부정하지 않겠네. 자네가 궁주님을 돕는 처지니 앞으로는 나와 북해림과도 함께 움직이게 될 테지?”
이 발언은 봉우를 궁주로서 인정하겠다는 뜻을 표명한 거였기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봉우의 표정이 잠시 밝아졌다.
이로써 봉우는 북해림의 원조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게 된 셈이었다.
다만 북해림주가 나와 실력을 겨뤄보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워하는 중이기도 했다.
“북해림주님. 유 공자…….”
봉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구르는 사이에, 북해림주는 마침내 바닥을 한 차례 밟았다.
쿠-웅!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주변이 뒤흔들렸고 그 여파로 건물과 바닥, 그리고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이어.
후-웅!
북해림주가 양팔을 가볍게 휘두르자 거센 바람이 허공을 때렸다.
눈과 바람이 뒤엉켜 몰아치는 거센 설풍(雪風)은 단숨에 내 전신을 집어삼켰다.
그건 마치 대자연의 기운이 나를 적으로 인식하여 공격해오는 모양새와도 같았다.
여태껏 마주했던 북해의 무공과는 차원이 다른 한 수.
결국 나 역시 하릴없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촤라라락!
순간 내 내공과 의지를 머금은 무형의 기운이 허공 위로 피어올라 검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천일백야검법의 후반부 초식 중 두 번째 초식인 무령지유.
허공을 유영하는 수십 자루의 무형검이 노도와도 같은 설풍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연신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쾅!
그 충격으로 사방이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바닥이 뒤집히고 건물이 내려앉으며 하늘 높이 치솟아 있던 거목들이 뿌리째 뽑혀 바닥을 굴러다녔다.
초장부터 서로의 절기를 내보인 싸움. 즉 승부를 길게 끌고 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해서 나는 곧장 신형을 쏘았다.
초식이 충돌한 여파로 시야가 어지러워진 틈을 노려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할 심산이었다.
한데.
쉭!
북해림주 역시 맞은편에서 나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내 검과 그의 쌍장이 정중앙에서 맞부딪쳤다.
쩌엉!
결국 검과 손이 바싹 달라붙은 채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나와 북해림주는 서로의 얼굴을 코앞에 두고 입가를 씰룩였다.
“기대 이상이군.”
“어르신도 보기와는 다르게 아직 정정하십니다?”
“크하하.”
밀고 밀리는 힘겨루기 도중에 북해림주는 대소를 터뜨리더니 훌쩍 물러나며 기운을 거둬들였다.
“이쯤 하지. 늙은이를 상대로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