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1장 원조(3)
봉우와 함께 북해림의 장원에 들어서 곧장 북해림주를 만났고, 봉우를 궁주로 인정하겠다는 확답까지 들은 상황.
더군다나 북해림주가 북해 제일의 고수라 여겨지던 안현마저 뛰어넘는 지극 고수였기에 봉우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림주님.”
봉우가 연신 고개를 숙이자 북해림주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그저 북해빙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뿐. 감사받을 일이 아닙니다. 또한 궁주께서는 한낱 북해림주에게 고개를 숙이실 인물도 아닙니다. 앞으로의 태도에 있어 이를 명심하여 주시기를.”
북해림주 구대림(丘大林).
구대림의 충성 선언에 어느샌가 그의 뒤편으로 집결하고 있던 북해림의 무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 북해빙궁의 궁주님을 뵙습니다!”
백 명에 달하는 절정 고수들. 그중 몇몇은 정문에서 나와 봉우를 맞이했던 여인과 같은 인극 고수였다.
빙궁의 전력과 비교하자면 양은 밀리지만 질적으로는 몇 수 위인, 소수정예라 부를만한 인원들이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네.”
나는 북해림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봉우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달랑 호위무사 넷과 함께 빙궁을 탈출한 지 불과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봉우는 온 힘을 다해 노력했고 원하는 결과를 손에 쥐었다.
남은 건 대장로 심윤술과 그의 세력을 몰아내고 위신을 되찾는 일뿐.
“이게 다 유 공자님 덕분입니다.”
“나야 뭐. 만년빙정을 준다기에 최선을 다해 도운 거고.”
“하하.”
농 섞인 어조로 훗날 보답으로 내주겠다던 빙정을 들먹이자 봉우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빙정뿐이겠습니까. 이 은혜를 다 갚으려면 빙궁의 보고(寶庫)를 전부 털어도 모자랄 텐데.”
…만년빙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북해빙궁의 보고 정도면 모자라긴커녕 충분하고도 남을 텐데.
내가 짐짓 입맛을 다시자 봉우는 웃다 말고 흠칫 놀랐다.
“…보고를 털겠다는 말은 허언이었습니다. 아시죠?”
***
이틀 뒤엔 염흥방과 노목. 그리고 안현과 소룡단에 봉우의 호위무사들까지. 일행 모두가 설산을 올라 북해림의 장원에 도착했다.
원래라면 북해림의 장원은 궁주를 제외하고는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북해림주 구대림이 봉우에게 제안한 일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는 건 물론 그 계획을 진행하기에 앞서 피로가 쌓인 일행들에게 몸을 추스를만한 장소를 제공하기 위함이라며.
반란을 진압하고 궁주의 지위를 되찾아야 하는 대사를 치러야 하는 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테니 휴식을 통해 심신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다시 사흘이란 시간이 흐른 뒤.
봉우와 북해림주 구대림이 나를 찾았다.
“내일 아침에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북해빙궁으로 진격해 들어가기로 결단을 내렸다는 의미여서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나와 소룡단은 봉우의 조력자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중원에서 파견된 외부인인 만큼 굳이 며칠 동안 이어진 회의엔 참석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여 힘을 빌려주는 게 가장 깔끔한 도움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구체적인 계획이랄 것까진 아니지만, 이번 싸움을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고자 하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속전속결로 끝낸다.”
“예. 그러기 위해선 결국 대장로 심윤술을 처리해야 하는데….”
대장로 심윤술은 두꺼운 성벽에 둘러싸인 빙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게 분명했다. 우리로서는 그 빙궁으로 쳐들어가 수많은 저항을 뚫어내야 하는 처지였다.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고수라곤 하지만 이쪽의 전력은 백 이십이 조금 넘어가는 숫자.
반대로 심윤술과 빙궁 측의 전력은 삼천.
더불어 심윤술과 손잡은 마교의 인물까지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해서 초반에는 야습을 통해 네 곳의 성문 중 하나를 점령해 빙궁 안으로 진입, 외원에서 시간을 벌이며 전면전을 가장할 생각입니다.”
“전면전을 가장해 이목을 끌겠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성문들은 다소 경계가 허물어질 거고, 소란을 틈타 잠입하기도 수월해질 겁니다.”
“성동격서란 말이군.”
“최우선으로 대장로를 처리하기 위한 계책이죠. 한데 그게…….”
봉우가 잠시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기에 나는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보고 대장로라는 그 작자를 처리해달라는 말이잖아?”
“유 공자께선 일전에 홀로 빙궁에 잠입하여 일장로님과 오장로님을 구출시킨 전적이 있으시니 유 공자만큼의 적임자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어려운 부탁을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봉우가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사이 북해림주 구대림이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선 노부가 그 역할을 맡고 싶었네만, 들어보니 자네는 무공뿐만 아니라 잠행술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네.”
잠행술이야 전생에서부터 갈고 닦아온 거니 나로선 당연했다.
“예. 염려 마시죠. 대장로를 처리한 뒤엔 본대로 곧장 합류할 테니까.”
“고맙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거든…….”
그렇게 다음 날까지 나는 봉우와 구대림과 조금 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일행들 모두와 함께 설산을 떠나 북해빙궁으로 출발했다.
***
북해빙궁을 목전에 두고 나는 일행들에게서 떨어져나와 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시(子時) 초에 맞춰 저희는 동쪽 성문을 함락하겠습니다.’
계획대로 일행들이 동쪽에서 전면전을 가장한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 반대편에서 궁 안으로 잠입해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잠입 정도는 그런 소란이 없어도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대장로 심윤술은 철통같은 경계와 삼천에 가까운 전력에 둘러싸여 있을 터.
아마 봉우가 침입해왔다는 말에도 당장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승기가 기울 때를 기다리다 적절한 순간에서나 전장에 발을 들이밀 테니, 나로서는 그 전까지가 기회였다.
쉭!
적당한 구릉 위에 올라 자리를 잡고 내려다보자 거대한 규모의 북해빙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계획의 중심인 동쪽과 서쪽 성문을 주시하며 기다리길 한참.
번쩍, 하는 섬광에 이어.
쿠웅!
굉음과 함께 동쪽 성문 주변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새벽녘의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불빛이 피어오르고, 머지않아 적과 아군의 기세가 한데 엉켜 허공마저 일렁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시야 끝에 들어오는 전장을 주시하다가 때가 됐다 싶었을 때 곧장 몸을 날렸다.
허공을 가르고 단숨에 북해빙궁의 서쪽 성문을 향해 내달리자 점차 귓가에 누군가의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다.
“적의 야습이다!”
“동쪽! 동쪽 성문을 지원해라!”
“대장로님께 곧장 상황을 보고하고 명령을…….”
듣자 하니 계획대로 적들의 이목이 동쪽 성문으로 쏠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덕분에 나는 별문제 없이 성벽을 박차고 올라가 궁 내부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염흥방과 노목을 구하기 위해 잠입했을 때와 달리 주변의 경계망과 기세 역시 헐거워져 있는 상태였다.
“침입한 적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대장로님께선 모든 전력을 동원해 적을 쓸어버리라고 명령하셨다.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곤 모두 동쪽 성문으로……!”
나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다급하게 내달리는 빙궁의 무인들을 묵묵히 주시하다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드디어 왔구나!”
대장로 심윤술이 탁자를 쾅, 내려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토록 갈망하던 순간이었다. 그것도 궁주인 봉우가 최전방에서 백이 조금 넘어가는 숫자만을 이끌고 빙궁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물론 그만한 전력을 어디서 마련하였는지는 의문이나, 이곳은 북해빙궁이었다.
삼천에 달하는 무인들과 이장로와 사장로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당에 고작 백 명 남짓한 숫자라니.
‘이것이 네 마지막 발악이라고 한다면, 나 역시 무참히 네놈의 목줄을 끊어내 주마.’
심윤술은 보고를 올렸던 수하를 통해 당장 빙궁의 모든 전력을 동쪽 성문으로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봉우가 도망칠 새도 없이 재빠르게 승부를 보고자 하는 판단에서였다.
압도적인 숫자와 전력으로 놈들을 쓸어버린 뒤 자신은 마지막에 등장하여 봉우의 목을 취하기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럴 거였다면 그분께 괜한 도움을 요청하여 애꿎은 빙정이나 더 내준 꼴이 되었군.’
심윤술은 봉우의 반격을 예상해 자신과 손을 잡은 마교의 인물에게 마지막으로 힘을 빌려달라 요청해놓은 상황이었다.
당장 신호만 보내면…….
심윤술은 품속에 들어 있던 신호탄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음산한 기운이 몸을 엄습했기 때문이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심윤술은 탁자 옆에 세워두었던 검을 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
원래라면 상시 대기하고 있을 자신의 호위무사나 수하들이 모습을 드러내야 함에도 아무런 반응이 들려오지 않자 심윤술은 섬뜩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운! 척만필! 백상!”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수하들까지 대답이 없자 심윤술은 일단 방을 빠져나가야겠다 싶어 걸음을 옮겼다.
이어 방문을 열어젖히고자 문고리에 손을 올리던 순간.
핑.
작은 파공성과 함께 한줄기 기운이 허공을 갈랐다.
“헛!”
심윤술은 다급히 몸을 휘돌려 검을 뽑았고.
쩡!
느닷없는 기습을 가까스로 막아낸 뒤 튕겨 나가듯 방구석으로 물러났다.
그런 심윤술의 시야에 웬 낯선 사내 하나가 창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네놈은 누구지?”
“누구긴?”
심윤술의 물음에, 나는 조소와 함께 살기를 피워올렸다.
“대장로 심윤술. 맞나?”
“…….”
“아니어도 죽일 테니까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고.”
“이 미친놈이…….”
분노와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시뻘게진 심윤술은 검을 뽑아 들면서도 슬쩍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건물에 있던 스물네 명은 이미 처리하고 오는 길이야. 저세상에서 네가 뒤따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곧장 보내주마.”
“…이게 네놈들의 계획이었구나.”
내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심윤술은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당했다고 통탄하는 표정이었다.
“궁주 그놈이 대놓고 전면에 나선 것도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겠군.”
“알면서 뭘 계속 묻고 있지? 시간이라도 끌어보려는 것처럼.”
내가 검을 뽑으며 서서히 다가서자 심윤술은 혀를 차며 마주 검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놈의 왼손이 품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여서 곧장 검을 내리그었다.
촤악!
놈은 내가 쏘아낸 반월형의 검기에 맞서다가 오른쪽 어깨가 갈려 나갔음에도 개의치 않고 왼손을 놀렸다.
결국 놈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고 그걸 내 뒤편의 창문 너머로 내던졌다.
나를 노리는 암기 따위가 아니었기에 지켜보고만 있자 뒤이어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섬광 하나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빛을 뿜어냈다.
“신호탄?”
내가 묻자 심윤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큭큭. 날 죽이러 온 주제에 뭘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나? 그게 네놈의 실수다. 이제 곧…….”
“마교의 인물이라도 납시는 건가?”
내가 말을 가로채자 심윤술은 어버버거리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