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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129화 (129/150)

#129. 2장 육마(1)

대장로 심윤술이 마교의 인물과 손을 잡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즉, 심윤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마교의 인물까지 끌어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는 뜻.

그리고 놈은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해 준 상태였다. 놈이 쏘아낸 신호탄을 보고 과연 누가 달려오려나.

“북해빙궁의 대장로가 붙어먹은 마교의 인물이 누굴까? 십장로? 육마?”

조소와 함께 묻자 심윤술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가 나타나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인가?”

“물론. 이미 정파 세력에게 한 번 패배한 개새끼들이야. 두 번은 쉽지.”

“정마대전. 이곳 북해에서도 정마대전 만큼은 주의 깊게 살폈던 사안이지. 한데 너 같이 어린놈이 마치 그 정마대전의 중심에서 활약이라도 한 것처럼 이야길 하는구나.”

활약?

활약을 넘어 내 손에 죽어간 마인들의 숫자만 합쳐도……. 종국엔 목숨과 맞바꿔 천마의 숨통을 끊어놓은 게 바로 나였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심윤술로서는 마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같잖아 보이는 듯싶었다.

“천마라도 살아 돌아오는 거면 조금은 놀랄 자신이 있는데.”

“…….”

뭐지? 저 반응은.

천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심윤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발견한 나는 순간적이나마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두려움 따위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반응에 대한 당혹스러움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농담 삼아 지껄인 말인데.

“마교 놈들이 북해에서 뭘 꾸미고 있는 거지?”

“궁금하더냐?”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걸 보아 쉽게 털어놓을 낌새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거로 생각했다.

“누가 나타나든 일단은 전부 죽여놓을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몇 놈은 살려놔야겠어. 그쪽도 살고 싶다면 알고 있는 걸 전부 털어놔. 그럼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지.”

“대단한 자신감이군.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북해빙궁의 대장로라는 자리가 우습게 보이더냐?”

“대장로라는 자리를 떼놓고 보면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라는 건 알겠어.”

“이 쥐 좆만 한 놈이……!”

도발에 넘어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심윤술이 단숨에 짓쳐들어왔다.

쩌저적!

동시에, 그가 휘둘러오는 검의 궤적을 따라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북해의 무공 대다수가 장법과 지법을 포함한 권각술을 기반으로 한다지만 그중에는 분명 검을 사용하는 무공도 존재할 터였다.

게다가 빙궁의 대장로가 펼치는 검법이니 그저 그런 수준의 검법도 아닐 테고.

캉!

찔러오는 검을 쳐내는 걸 시작으로 적당히 상대해주자 순식간에 수십 합의 공방이 스쳐 지나갔다.

놈의 검이 발산하는 새하얀 서리는 내 검이 머금은 검강을 상대로도 위용을 뽐냈다. 단단하다거나 위력이 세다는 게 아니라, 검과 검이 부딪치는 충격에 부서져 나가는 얼음 파편들이 수십 개의 암기가 되어 내게 쏘아지는 식이었다.

더불어 얼음 파편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며 작은 생채기를 만들어냈는데, 그 상처를 통해 스며든 예의 그 한기가 몸 내부를 좀먹고 있었다.

독처럼 뻗으며 전신을 헤집는 한기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니, 내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 역시 점점 느려질 수밖에.

“이것이 북해의 검법이다!”

카가가강!

덕분에 심윤술은 자신감에 차오른 표정으로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내 실력이 생각보단 뛰어나지 않다고 여겼는지 다소 흥분한 상태였다.

이윽고.

우-웅!

심윤술의 검이 한차례 크게 진동하더니 그 주변으로 시야를 뒤덮는 새하얀 기운을 뿜어냈다.

끝장을 볼 심산으로 비장의 초식을 꺼내 보인 것이다.

“네놈의 목을 잘라 봉우, 그놈 앞에 던져주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지 기대가 되는구나. 죽어라!”

마침내, 커다란 용의 형상을 띈 새하얀 기운이 아가리를 벌린 채 나를 집어삼켰다.

***

펑!

어둠으로 물든 하늘 위로 피어오른 굉음과 빛무리에 모두가 움찔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쪽 성문 아래에 펼쳐진 전장 최전방에서 빙궁의 무인들을 상대하고 있던 봉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호탄?”

방향이나 위치를 보아 빙궁의 가장 깊숙한 곳. 대장로 심윤술이 머무르고 있을 내원 쪽이 분명했다.

퍽!

“컥!”

봉우는 좌측에서 쇄도해 들어온 무인 하나의 가슴에 일장을 꽂아 넣어 제압한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느닷없는 신호탄의 출현에 이목이 쏠린 것도 잠시. 전장은 다시금 삼천과 백이라는 인원이 뒤엉키며 난전을 이어갔다.

수적으로는 단연코 자신들이 밀리는 모양새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북해림주를 필두로 일장로 염흥방과 오장로 노목 그리고 삼장로 안현이 신위를 내보이며 적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뒤로 북해림의 무인들과 소룡단원들까지 가세하자 삼천이라는 숫자가 백 명 남짓한 인원들의 기세에 밀려 주춤주춤 밀려나는 모양새였다.

그때.

“피, 피해라!”

“크아악!”

양팔을 휘둘러 부챗살처럼 뻗어나가는 설풍을 쏘아내 수십 명의 적을 얼어붙게 만든 북해림주 구대림이 봉우 옆으로 날아들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 겝니까?”

적들을 압도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궁주의 안위까지 신경 쓰는 구대림에게 봉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이다.”

그 모습에 구대림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봉우의 무위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유진휘. 그 사내의 가르침을 훌륭히 소화하신 궁주님의 재능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내 재능이 아니라, 유 공자의 가르침이 훌륭해서이겠지.”

“그 부분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봉우와 구대림은 자신들이 서 있는 전장의 반대편에서 빙궁으로 잠입해 들어왔을 유진휘를 떠올리며 내원 쪽을 쳐다봤다.

지금쯤이면 그가 대장로 앞에 당도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진휘는 봉우와 구대림을 포함해 아군 모두에게 그만한 신뢰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절대고수였으니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난데없이 터져 나온 신호탄이었다.

신호탄에 대해선 유진휘와 상의한 적이 없는 만큼 분명히 대장로가 쏘아 올린 신호탄일 터였다.

“기습에 당한 대장로가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하려는 연락망이지 않겠습니까?”

“그럴 테지. 하지만 누구에게? 빙궁의 대부분 전력은 우리가 붙잡아두고 있지 않나.”

대장로가 최우선으로 노리는 건 궁주의 목. 즉 자신이 이곳 동쪽 성문의 전장에 있으니 적들 처지에서는 그럴 수밖에.

당장 대장로 편으로 돌아선 이장로와 사장로의 움직임 역시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마교나 월영련. 그놈들이 역시 이미 궁 내부에….”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유진휘의 안위가 염려되는 봉우과 구대림이었다.

“지원을 보내시겠습니까?”

원래의 계획은 유진휘가 홀로 나서서 대장로를 처리한 뒤 본대에 합류하는 거였다.

반란의 중심이었던 대장로만 처리하면 궁주인 봉우가 나서서 적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빠르게 궁을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는 마교의 인물들이 대장로에게 가담한다면 시간이 지체되는 건 물론 유진휘의 안위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봉우는 순간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유진휘가 마지막으로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계획에 어떤 변수나 차질이 생기든 내 걱정은 하지 마. 알아서 해결할 테니.’

유진휘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지닌 봉우로서는 결국 각자의 임무에 집중하는 게 오히려 그를 돕는 거란 판단이 섰다.

“우린 우리의 임무에 충실하면 될 듯싶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구대림은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 전장의 중심에 내려앉았다. 좀 더 실력을 발휘해 확실하게 적들의 이목을 끌 심산으로.

***

쿨럭!

한 움큼의 핏물을 토해낸 심윤술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 이게 대체…….”

이어 그가 크게 갈라진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며 비틀거렸다.

나는 검을 휘둘렀던 자세를 고쳐잡으며 심윤술을 향해 조소를 내비쳤다.

“마지막 초식만큼은 북해빙궁의 대장로다웠어.”

새하얀 기운이 백룡(白龍)의 형상으로 화해 짓쳐들 땐 나조차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천일백야검법의 제사초식 진광결인(振光結刃)으로 쏘아낸 무형의 검강이 나를 집어삼키려던 백룡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가 심윤술의 가슴까지 베어냈다.

심윤술로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의 초식을 파훼한 모양새였으리라.

투둑.

나는 내 몸 위에 달라붙은 얼음들을 덤덤히 털어내면서 심윤술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가슴의 상처를 부여잡은 채 주춤 물러나는 심윤술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백룡지기(白龍之氣)에 당한 척 연기한 거였나?”

“백룡지기?”

놈의 검법이 뿜어내던 한기를 부르는 이름인 듯하여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북해의 한기엔 이제 꽤 익숙해져 있어서.”

“얕은수에 넘어갔군.”

“수작이라고 할 것도 없지.”

몸이 한기에 침범당한 척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조절하자 놈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 것뿐.

이제야 그걸 깨달은 심윤술은 자조적인 한숨과 함께 벽까지 밀려나 바닥에 주저앉았다. 표정을 보니 아직 패배를 인정한 건 아니었다.

“네놈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고 한들,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그래서. 놈들은 언제쯤 나타나는데?”

푹!

“컥!”

주저앉은 심윤술의 어깨에 검을 틀어박은 나는 무릎을 접고 시선을 맞췄다. 그사이에도 검을 쥔 손을 비틀자 심윤술이 고통에 겨운 비명을 토해냈다.

이어 내게서 멀어지고자 발악하는 놈의 머리칼을 붙잡아 벽에 고정한 뒤 눈을 주시하는 채로 몇 번 더 검을 쑤셔 박았다.

“끄윽!”

그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자 심윤술은 눈까지 까뒤집으며 괴로움을 호소했다. 놈의 눈가에 맺힌 독기 역시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그쪽 목이 달아날 것 같은데? 시간을 더 끌고 싶으면 아는 거나 좀 털어놔 봐.”

나직한 충고에 심윤술은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놨다.

“그, 그분께선 만년빙정을 대가로 협조를 약속하셨다.”

“그분?”

“천마교의 육마 중 한 분이셨던 몽마(夢魔)…….”

몽마!

몽마의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손에 죽었던 귀마와 광마를 제외하면 남은 육마는 넷. 그중 살아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건 검마라고 여겼다.

검마 외에 나머지는 분명 정파인들의 손에 확실히 처단됐을 터였다.

몽마 역시 정마대전 당시 검신 영감이 이끌던 천군지사대의 협공으로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고 들었다.

그로 인해 시체를 발견하진 못했어도 몽마의 죽음을 의심하는 자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마교 측에서도 몽마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정도니까.

한데 그 몽마가 살아있다?

“몽마가 확실해? 왼쪽 눈에 묘안석(猫眼石)을 쑤셔 박고 다니는 그 늙은이?”

몽마는 원래 눈 한쪽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짐승의 눈을 닮은 보석인 묘안석을 눈 대신 애용했었다.

해서 일각에서는 몽마를 묘안노마(猫眼老魔)라 부르기도 했고.

“몽마 어르신을 알고 있다면… 이곳이 네 묫자리가 될 거라는 사실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심윤술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조금이나마 기세를 되찾았다.

나는 피가 흘러나와 시뻘게진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놈을 응시하다가 그대로 검을 그었다.

서걱!

“끄, 끄아악!”

반듯하게 잘려 나간 오른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놈의 조소를 가로챘다.

“이곳이 누구 묫자리가 될진 지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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