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2장 육마(2)
“그 늙은이가 무슨 목적으로 만년빙정을 요구했는지는 모른다?”
몽마가 반란을 꿈꾸던 빙궁의 대장로와 손을 잡으면서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요구했던 건 오로지 만년빙정.
덕분에 그에게 상당한 양의 만녕빙정을 제공했지만 사용처까지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궁금하긴 했어도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물어서도 안 될 것 같았고.”
오른팔이 잘려 나간 고통과 충격에 안색이 파래진 심윤술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내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해주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딱히 더 건져낼 정보가 없는 것 같아서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아는 건 이게 전부라는 거지?”
내가 살기를 피워올리자 심윤술의 흠칫하는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속내를 전부 털어놓으며 시간을 끌었음에도 아직 마교의 인물이 나타나고 있지 않았기에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심윤술이 쏘아낸 신호탄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몽마나 그 늙은이의 수하들이 빙궁에 있는 게 맞아?”
“무, 물론이다. 분명 이틀 전까지만 해도 몽마 어르신과 독대를…….”
말을 하던 심윤술은 순간 눈을 치떴다. 설마 싶은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듯 보였다.
나 역시 그런 놈의 표정을 내려다보면서 한 가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
‘원하는 만큼의 만년빙정을 얻었으니 반란의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이 미리 발을 뺀 건가.’
북해빙궁의 궁주가 누가 되든 몽마에겐 딱히 관심이 없는 일이었다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즉, 나로서는 먹잇감을 놓친 셈이었고 심윤술로서는 믿고 있었던 대안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었다.
그걸 깨달았는지 심윤술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 개 같은 늙은이가……. 몽마 이 개새끼야-!”
창밖 너머의 어둠 속으로 갖은 욕과 고함을 내지르며 분노를 표출하던 심윤술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닥에 이마를 처박았다.
“사, 살려주게. 알고 있는 건 전부 털어놓았잖나?”
“…반란의 주범을 살려줄 정도의 영향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더! 아직 정보가 더 있네! 있고말고.”
눈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심윤술에게선 다급함과 절실함이 느껴졌다.
“그 늙은이가 만년빙정을 어디에 사용하려고 요구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놈들이 무언가 특이한 계책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네.”
“특이한 계책?”
“사자소생(死者蘇生).”
“…….”
죽은 자를 살려내?
월영련주가 단룡위의 몸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이번에도 무언가를….
“이 미친놈들이 진짜 천마라도 되살리겠다는 건가?”
있어서도 안 되고, 가능성도 없는 추측이었다. 한데 놈들이라면 왜인지 정말 그 불가해의 영역을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왜?
월영련주 단룡위는 스스로 천마가 되기를 자처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마당에 굳이 진짜 천마를 되살려?
그때 심윤술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사자소생이라곤 했지만 정말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다만 그런 말을 덧붙일 정도의 계획이니 어쩌면…….”
그는 몽마나 마교의 인물이 더 이상 자신을 돕겠다고 나서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닫고 난 뒤로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이런저런 예측과 견해를 더해가며 진심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바를 털어놓고 있었으니까.
“…….”
나는 묵묵히 심윤술이 털어놓는 정보를 토대로 몽마, 나아가 월영련과 마교의 재건을 꿈꾸는 단룡위가 무얼 꾸미려고 하는지를 추론했다.
아니, 그런 와중이었다.
순간적으로 창가 너머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린 찰나.
쉭.
내 시선을 가로지른 한줄기 빛살이 심윤술의 이마를 그대로 관통했다.
***
쿵!
이마가 꿰뚫린 채 절명한 심윤술의 시체가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사이에, 나는 단숨에 바닥을 박차 창가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무리 내가 상념에 잠겨 있었다고 하더라도 적의 기습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은밀했다.
그만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라면 분명…….
내공을 끌어올려 시각을 키운 채 창가 밖의 어둠을 내다보자 상당한 거리의 건물 꼭대기에 유유히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몽마?”
정확한 용모를 파악할 순 없었지만 풍기는 기세나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마기가 놈이 몽마임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창문을 뛰어넘어 몽마로 의심되는 인영을 향해 신형을 쏘았다. 아니, 그러려던 순간이었다.
“과연. 듣던 대로 나이에 비해 범상치 않은 인물이로고. 유진휘라고 했던가?”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그의 칼칼한 목소리가 귓가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차기 교주께서 가장 주의해야 할 존재라고 칭할 만하구나.”
“차기 교주?”
“아직 네놈에겐 련주라고 부르는 게 익숙하려나?”
그가 말하는 차기 교주가 월영련주 단룡위임을 알아차린 나는 살기를 피워올렸다.
“놈은 뭘 꾸미고 있지? 육마의 하나인 너 같은 늙은이를 이 먼 북해까지 보낼 정도의 계획이 뭐냐고.”
“묻는다고 대답해 줄 거였으면 본좌가 이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뒤따랐기에 나는 멈췄던 발을 놀렸다.
팡!
단숨에 몽마가 서 있는 건물의 지붕까지 도달한 나는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나름대로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왼쪽 눈깔에 묘안석을 박아넣은 몽마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앞을 가로막은 누군가가 내 검을 몸째 막아냈다.
촤악!
어깻죽지부터 가슴까지 깊게 베어낸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몽마와 나 사이에 끼어든 인물은 삼십 대의 나이로 추정되는 처음 보는 사내였다.
한데 표정이나 눈빛에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검에 베였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몽마는 그런 사내 뒤에서 얼굴만 삐죽 내밀어 말을 이었다.
“어떤가? 꽤 쓸 만하지 않나?”
“…이거냐? 네놈들의 계획이란 게.”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지. 본좌가 왜 몽마라 불리는지 알고 있느냐?”
몽마.
육마라 불리는 여섯 명의 마귀 중에서 무공은 가장 뒤떨어지지만, 그걸 대신할 능력을 갖춘 자가 바로 몽마였다.
몽령시(夢靈屍).
생강시의 일종으로 죽은 자가 꿈속의 기억을 통해 마치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 움직인다는 마물.
자세히는 모르지만 정마대전 당시 몽령시에 당한 정천맹 무인들의 숫자가 상당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몽령시를 제조하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금액과 구하기도 어렵다는 여러 가지 재료가 필요하다고 알려진바, 그 숫자가 제한적이었다.
덕분에 몽마 역시 몽령시를 제 자식처럼 여기며 귀하게 다루었다고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단순히 칼받이 정도로 써먹는 게 아니라.
즉.
“몽령시 정도는 이제 단순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가?”
“오. 본좌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맞다. 이제 몽령시 정도는 차고 넘치지.”
“만녕빙정 덕분에?”
“만년빙정의 영향이 없진 않지.”
“…….…”
촤악!
나는 나와 몽마 사이에 서 있는 몽령시의 목을 베어낸 뒤 허공으로 치솟는 머리통을 후려쳐 박살 낸 다음 계속 말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을지 궁금한데.”
“흐흐. 눈앞에서 보니 네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체감하게 되는구나. 몽령시를 단숨에 처리하는 걸 보면 말이다.”
몽령시 역시 강시인 만큼 웬만한 검에는 상처를 입지 않는 질긴 살가죽과 짐승 같은 괴력이 특징이었다.
거기에 더해 살아생전의 무공까지 사용하니 여간 까다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정마대전 당시의 과거에는 그 숫자가 제한적이어서 대세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약 몽마의 말대로 그 제한이 사라진 거라면 정천맹에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몽령시의 시체를 뛰어넘어 몽마에게 짓쳐들었다.
그때.
“몽령시가 네놈에겐 통하지 않아도 북해의 무인들에게는 상극의 존재이지 않을까 싶은데. 몽령시에게 북해의 한기 따윈 소용이 없으니까 말이야.”
몽마의 말에 나는 문득 한창 혈전이 벌어지고 있을 동쪽 성문의 전장을 쳐다봤다.
대장로 심윤술이 죽었으니 반란은 금방 진압되겠지만 몽마의 말대로 저곳에 몽령시가 나타나게 되면 빙궁은 다시금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백 구. 시험 삼아 몽령시 이백 구를 풀어두었네. 과거의 몽령시보다도 한층 발전한 수라몽령시를.”
이백이란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봉우 측에 북해림주 구대림과 빙궁의 장로들이 있다고 하지만, 몽령시 이백 구는 말 그대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내가 몽마를 상대한다고 시간을 지체했다간 봉우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숫자였다.
“어쩔 텐가? 그래도 북해빙궁의 궁주가 죽게 놔둘 순 없지 않겠나? 지금껏 반란을 진압하고자 고생한 시간과 노력이 있을 터인데.”
몽마의 경고에 나는 검을 거두고 시선을 쏘았다.
“꺼져. 다시 볼 때까진 목 간수 잘하고 있고.”
“클클.”
***
“저, 저게 대체…….”
한창 혈전이 벌어지고 있던 동쪽 성문의 전장에 암운이 드리웠다.
느닷없이 나타난 이백 명의 무인들이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빙궁의 모든 무인들을 상대로 기괴한 신위를 내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옷차림에 핏기 하나 없는 얼굴. 웬만한 공격엔 상처 하나 입지 않으며 북해의 무공에 얻어맞아 몸이 얼어붙어도 물러서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적을 향해 살기를 내뿜는 존재.
게다가 그 살기엔 은은한 마기가 뒤섞여 있었다.
“마교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흠칫 놀랐다.
북해의 무인들에게도 마교의 악명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명사였다.
정마대전을 통해 마교가 궤멸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속으로나마 정천맹을 향해 찬탄을 보내기도 했었고.
한데 그런 마교의 무인들이 느닷없이 빙궁을 습격하다니.
“설마 유 공자께서…….”
북해림주 구대림과 함께 최전방에서 마교의 무인들을 상대하던 봉우는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주워 담았다.
유진휘의 안위를 염려하는 건 그에 대한 실례이기도 했고 당장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집중할 때였으니까.
“모두 들어라-!”
내공을 실은 봉우의 일갈이 하늘 높이 뻗어가자 빙궁의 무인들이 귀를 열었다.
“반란을 도모했던 대장로는 그 배후에서 외부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마교의 인물과 손을 잡았다. 제 야욕을 위해 만년빙정을 빼돌려 마교의 배를 채워주었으며 너희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자 애꿎은 희생을 강요했다. 그런 자에게 궁주의 자리를 넘길 성싶은가-!”
심윤술의 추악한 이면을 들춰내는 봉우의 말에 삼천에 달하는 빙궁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복잡한 표정을 머금기 시작했다.
“또한 이 모든 사실을 삼장로 안현이 직접 실토한바, 그 진위를 의심하지 말거라.”
북해 제일의 고수이자 대장로와 함께 반란의 중심이었던 안현이 봉우 측에 서서 싸우던 걸 의아하게 생각하던 빙궁의 무인들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거기에 더해.
쿵!
허공을 격하고 날아와 봉우의 곁으로 내려앉은 사내 하나가 대장로의 시체를 바닥에 내던지는 걸로 반란의 불씨를 확실하게 잠재웠다.
봉우는 그 사내를 돌아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믿고 있었습니다. 유 공자.”
이어 봉우의 시선이 다시금 빙궁의 무인들에게로 향했고.
“반란은 끝났다. 하지만.”
빙궁의 무인들을 한차례 훑은 그 시선이 마지막으로 이백에 달하는 마교의 무인들에게 꽂혔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궁주로서 명령하마. 감히 북해빙궁을 어지럽히려 하는 저 마인들을 처단하라!”
봉우의 명령에 둘로 나뉘어 혈전을 벌였던 빙궁의 전력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