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3장 선제(1)
끼익.
철문이 열리면서 마주한 광경은 거대한 규모의 병기고였다. 말 그대로 보고 안의 또 다른 보고. 막대한 부를 자랑하는 북해빙궁인 만큼 병기고 역시 수준이 남달랐다.
안으로 들어서니 십(十)자 형태의 길이 깔려 있고 네 방위로 나뉘어진 구역엔 갖가지 병장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봉우는 나를 병기고의 중심으로 데려간 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시다시피 북해의 무공은 대부분 권각술을 기반한 무공인지라 빙궁으로 흘러들어온 여러 무기가 주인도 없이 잠들어있습니다.”
봉우의 말대로 북해의 무인들은 대부분이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상대했던 적들도 대장로 심윤술만이 검법을 사용했었고.
“그러니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마음 편히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봉우는 슬쩍 옆으로 길을 비켜주며 원하는 대로 둘러보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살펴보지.”
나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준 뒤 길을 따라 걸으며 병장기들을 둘러봤다.
일견하기에도 명품(名品)이라 칭할 만한 무기들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검만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청로검에 버금갔다.
하지만 내게는 청로검 말고도 태산파에서 얻은 묵마검까지 있었기에 검이 진열된 구역은 슬쩍 지나쳤다.
그 뒤로 도와 창 같은 강호에서 주류라 불리는 병장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눈으로만 구경했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병장기들이었지만 내게는 검 두 자루면 충분했으니까.
이어지는 부, 선, 절, 편 등 특색있는 병장기까지 차례차례 구경하고 나자 봉우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마음에 드시는 게 없는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지금 있는 검으로도 무기는 충분해서.”
“아…….”
봉우는 내 허리춤에 메여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바라보더니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보니 확실히 유 공자님의 검은 명검, 아니 한 자루는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검보다도 뛰어나군요.”
청로검은 물론 명검이지만 진한 마기를 흡수해 탄생한 묵마검은 검집에 들어있음에도 그 예기가 겉으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눈은 호강하는군.”
나는 피식 웃었지만, 봉우는 웃지 못했다. 내게 뭐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는지 직접 나서서 병기고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봉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문득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제법 쓸 만할지도.”
내 중얼거림에 봉우는 진열장 사이에서 고개만 삐죽 내밀었다.
“어떤 겁니까?”
*
백룡수호갑(白龍鬚護鉀).
백룡의 수염으로 만들어졌다는 이름 답게 내 손에 들려있는 호신갑은 새하얀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물론 새하얀 용수를 상기시키는 백참사로 만들어진 호신갑이었다. 덕분인지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웠다.
“백룡수호갑은 무게는 가볍지만, 그 단단함이 만년한철에 버금가는 호신갑입니다. 대대로 빙궁의 모든 궁주가 애용했던 만큼 효과는 확실할 겁니다.”
“그런 걸 내게 줘도 되는 거냐?”
‘너도 궁주잖냐’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봉우는 미소와 함께 자기 겉옷을 들쳐 보였다.
“저도 착용하고 있습니다. 유 공자께서 들고 계신 건 예비용이고요.”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아서 몰랐는데 직접 보니 착용감도 뛰어난 듯싶었다.
봉우는 자신의 백룡수호갑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삼장로를 상대하면서 천빙갑이라는 무공을 겪어보셨습니까?”
“겪어봤지.”
기운이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공격을 막아내는 데다가 웬만한 강기로는 꿰뚫을 수 없는 수준이어서 내심 감탄하기도 했고.
“백룡수호갑은 그 무공과도 견줄 정도의 내구성을 자랑합니다.”
봉우의 말대로라면 백룡수호갑 역시 어지간한 공격은 대부분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이어서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 자리에서 백룡수호갑을 착용하자 순간 호신갑이 내 내공을 빨아들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뭐라 할 새도 없이 내공을 흡수해 간 호신갑은 이내 크기가 절로 줄어들어 내 몸에 알맞은 형태로 변해갔다.
“신물(神物)이네.”
“신물이죠.”
내가 웃자, 봉우는 마침내 나를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후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깊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이가 호흡을 가다듬는 모양새였다. 그 숨소리엔 짙은 마기가 뒤섞여 있었는데, 곧이어 터져 나오는 두 개의 안광에도 그러한 마기가 감돌았다.
두 눈동자는 이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듯 허공으로 떠올랐고 재차 안광을 토해내자 거대한 기파가 전방을 휩쓸었다.
투쾅!
뒤따라 굉음이 터져 나오면서 벽 한 면이 허물어졌다.
뻥 뚫린 공간으로는 중천의 햇살이 스며들어 어둠을 몰아냈고 이내 누군가가 환해진 세상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월영련주 단룡위.
새로운 몸으로 회생한 이후 지금껏 폐관수련에 몰두한 그가 마침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때, 단룡위의 곁으로 중년인 하나가 내려앉았다.
“감축드립니다, 련주님.”
일월성의 총관인 오태(吳太)가 바로 그였다. 머리가 땅에 닿을 듯 부복한 오태의 말에 단룡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허기지군.”
“곧장 교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러지. 현재 상황은?”
단룡위가 앞장서자 오태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붙었다.
“본단의 공사는 마무리가 되었고, 목월방주(木月幇主)주가 수하들과 함께 본단으로 합류했습니다. 일월성주는 차츰 병세가 호전되어가는 상황입니다.”
수하들을 이끌고 진천문으로 진격했다가 도리어 큰 피해를 본 일월성주였다. 그 자신도 부상이 심각했었는데 최근 의식을 차려 요양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가? 다행이군.”
오태의 보고에 단룡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금월보주.
화월각주.
수월림주.
세 사람이 유진휘 단 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마당에 월영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월성주까지 목숨을 잃었다면 뼈아픈 손실이었을 터.
“계속 보고해라.”
“…예.”
단룡위가 점차 이동하는 속도를 높이면서 명령하자 오태는 쫓아가기도 벅차다는 듯 식은땀을 흘리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정마대전에서 살아남은 마교의 생존자들 역시 빠른 속도로 본단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중 마교의 십장로였던 인물 세 명과 보름 전에는 검마 어르신까지…….”
오태는 보고를 이어가던 와중, 단룡위가 갑자기 멈춰서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검마라고?”
“예.”
“그렇군. 이런 기세를 가진 인물이라면 검마일 수밖에 없지.”
단룡위의 말에 오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단룡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외팔이 노인 하나가 정면에 마주 서 있는 상태였으니까.
‘아,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땅에서 솟아났는지, 하늘에서 내려앉았는지 모를 느닷없는 노인의 등장에 오태는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노인이 오른팔에 쥐고 있는 검을 휘둘렀다면 자신은 왜 죽은지도 모르고 눈을 감았을 게 아닌가.
그런 노인의 정체가 검마였고 그런 검마가 자신과 같은 편이라는 데에 오태는 크나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검마와 단룡위가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입을 연 건 검마였다.
“직접 보니 실로 놀라운 일이로고. 겉은 소공자이지만, 속은 월영련주라?”
비록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전대 천마의 자식 중 하나였던 단룡위의 모습을 검마가 잊을 리 없었다.
단지 생김새만 같을 뿐, 기억 속의 단룡위와 눈앞에 서 있는 단룡위는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천지 차지였다.
과거, 마교 서열 이(二)위였던 자신이 절로 긴장할 정도.
‘허.’
자신이 이곳에 온 건 마교의 재건을 위해 천마가 되고자 하는 존재가 있다는 말을 듣고 흥미가 돋았기 때문이다.
자격이 있다면 따를 것이고, 자격이 없다면 죽일 심산으로. 한데 보고 있자니 단룡위의 모습 위로 전대 천마의 용태가 스쳐 지나갔다.
“전대 교주님의 무공마저 전부 익혀낸 것인가?”
검마의 물음에 단룡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걸 위한 폐관수련이었으니까.”
“놀랍군.”
“딱히 놀랄 게 있나? 천마가 되고자 하여 천마의 무공을 익혔을 뿐이거늘.”
말은 쉬웠지만 십만마도의 정점이었던 천마의 독문무공은 아무나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공 비급들이 정마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대부분 실전된 상황이었다.
어쩌면 정천맹 측에서 회수하여 봉인시켜뒀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 무공을 모조리 익혔다니.
“정천맹에서 비급을 회수한 겐가?”
“어느 정도는 회수했다고 볼 수 있다.”
그걸 위해 정천맹의 집형당주를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을 회유한 거였다. 물론 지금은 유진휘 덕에 대부분 색출되거나 배신하려는 의지를 감춘 채 숨죽이고 있었다.
그 말에 검마는 다시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천맹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정마대전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다.
한데 눈앞에 서 있는 인물은 그런 정천맹을 상대로 여러 활약을 선보였다고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단신으로 검신 백도천을 쓰러트린 일.
정마대전 이전이나 이후로도 자신의 오랜 염원이었던 그 일을 눈앞의 존재가 이루어 낸 것이다.
해서 검마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왼팔이 없었기에 검집은 검을 떠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왼팔은 검신에게 잃었다.”
검마의 짧은 설명에 단룡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랬나? 유감이군.”
“그러니 보여보거라. 검신을 쓰러트린 실력을. 복종 여부는 그 후에 결정하겠다.”
복종.
과거, 마교 서열 이위였던 검마의 입에서 복종이란 말이 나오자 단룡위는 순간적으로 전신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검마의 복종을 말미암아 자신이 진정한 천마로 거듭나게 될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스릉.
단룡위는 허리춤의 검을 뽑음과 동시에 천천히 자세를 잡아갔다.
“시작하지.”
“선공을 양보하겠다?”
“누가 위인지는 명백하지 않나.”
“…”
순간 할 말을 잃은 검마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평생을 살아오며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여러 감정이 피어올랐지만 빠르게 마음을 비워낸 검마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쿠궁!
그 기세만으로 주변을 진동하게 만든 검마는 이윽고 손에 쥔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단순한 일검.
하나 그 안에 담긴 묘리와 내력은 감히 누가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고절한 경지였다.
검이 추구하는 완벽함.
검의 완성.
검마의 일검은 티끌 하나의 부족함도 없는 완전무결(完全無缺)의 표본이었다.
번쩍!
그 검의 궤적을 따라 피어오른 섬광이 단룡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이어지는 침묵.
얼마 지나지 않아 검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땠나?”
“천의무봉(天衣無縫).”
“그렇군.”
“다만 그 위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말거라.”
같은 눈높이임에도 검마를 내려다보던 단룡위의 말과 함께.
쩌저적!
검마의 검 위로 금이 가면서 반으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이어 검마는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검마가 교주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