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3장 선제(3)
소룡단과 내가 정천맹으로 복귀한 시각이 해가 지고 난 때였는지라 맹주인 독고태문을 알현하는 건 그다음 날이었다.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소룡단은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은자 팔십 냥에 추후 천상비고 중(中)층에 존재하는 무공 비급 한 권씩을 익힐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상, 중, 하로 나누어진 천상비고의 비급들은 중층이라고 하더라도 강호에 나가면 절정 수준 이상이라 평가받는 것들인 만큼 모두가 기꺼워했다.
물론 나로서는 전생에 중층은 물론 상층의 일부 무공 비급들까지 한 번씩 훑어본 전적이 있었기에 딱히 필요한 권한은 아니었다.
“내 권한은 네게 양도하마.”
내가 슬쩍 언질을 주자 장진악이 감격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짭니까, 형님?”
“그럼 가짜겠냐.”
“아뇨. 형님이 허언할 분은 아니시죠. 감사합니다!”
“얼른 강해져서 권왕을 뛰어넘어라.”
“물론입니다. 얼른 강해져서 권왕을……. 예? 제 아버지요?”
하남장가의 가주이자 장진악의 아버지인 천하십대고수 권왕.
장진악에게 있어서는 하늘같은 존재였다. 그런 권왕을 따라잡는 걸 일생의 목표로 여기고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진정으로 강해지려면 목표의 기준을 허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잡지 말고 뛰어넘으라고.”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너라면 충분히.”
녀석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자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럼 형님을 목표로 삼겠습니다.”
“나?”
“예. 솔직히 제 눈에는 형님이 천하제일인 같습니다.”
전생에는 죽기 전 병상에 누워 있을 동안 그렇게 불린 적이 있긴 했지.
지금은 그때보다도 경지가 조금 더 앞서는 상태였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직 내가 검신 영감과 마교를 부활시키려는 단룡위보다 확실한 우위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진정한 천하제일인이 누구인지 가려지지 않을까 싶었다.
‘유진휘의 몸으로 환생한 이후에 다시 천마와 겨루게 될 줄은.’
어쩌면 이것 때문이었나. 죽어야만 했던 내가 환생한 이유가.
운명인지 우연인지, 이제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어서 나는 피식 웃어넘겼다.
“그럼 너도 천하제일인을 목표로 하는 거네?”
내 말에 장진악은 순간이나마 눈이 반짝였다. 어느 강호인이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바라마지 않겠는가.
“형님이 있으니까 두 번째로 하죠. 뭐.”
목표의 기준을 허물라고 했더니 또다시 벽을 세우는 장진악에게 재차 설명해 주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래.
천하에서 두 번째로 강한 고수 역시 충분한 목표였다.
***
소룡단이 물러간 뒤 맹주전에는 나와 총군사 묵가후만이 남아 독고태문과 마주했다.
소룡단 다음으로는 북해빙궁의 사절단으로서 정천맹에 방문한 염흥방과 염혜주 차례였다.
맹주전을 지키는 무인 하나가 두 사람을 모시러 객청으로 향한 사이 독고태문은 내게 지긋한 시선을 보내왔다.
“어째 볼 때마다 더 강해지는 것 같구나.”
“맹주님께서 원로원 어르신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신 이후 불철주야 그분들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노력했을 뿐입니다.”
“말솜씨도 늘었고.”
“그렇습니까?”
“물론. 첫 만남 때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말에 한기가 가득했었잖느냐.”
그때야 독고태문이 행여나 월영련과 손을 잡았을까에 대해 의심하고 있기도 했었고 검신 영감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맹주로 모시는 게 익숙하지 않았었기 때문일 터였다.
내색하진 않았었지만, 그 심정을 온전히 숨길 수는 없었나 보다 싶었다.
“마치 북해에 가서 그 한기를 전부 털어버리고 온 것 같구나. 하하.”
홀로 대소를 터뜨리고, 묵가후는 옆에서 어색한 미소를 머금는 걸 보아 독고태문은 종종 이런 농을 일삼는 게 취향인 듯 보였다.
“…….”
나야 농 같지도 않은 헛소리에 웃어줄 이유는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독고태문은 머쓱한 표정과 함께 화제를 전환했다.
“듣자 하니 북해에 몽마가 나타났었다고?”
“예. 몽령시도 함께였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반란을 일으켰던 대장로를 돕는 대가로 상당한 양의 만녕빙정을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보고를 전해 듣긴 했지만 정말 몽령시가 맞더냐? 게다가 이백 구였다고?”
독고태문 역시 정마대전 당시 몽마와 그가 부리는 몽령시를 마주한 적이 있던 만큼 이백 구라는 숫자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만한 마기와 위용을 내뿜는 강시는 천하에 몽령시뿐이었다.
“보고서에 적힌 특징이 정확하다면 몽령시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맹주님.”
묵가후까지 확신하고 나서자 짐짓 부드러웠던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마 두 사람 역시 깨닫고 있을 터였다.
북해에서나 이백이었지, 마교의 이름 아래 다시 나타나게 될 몽마는 과연 몇 구나 되는 몽령시를 거느리고 있을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수라몽령시. 놈이 제 입으로 그렇게 명명했습니다. 어쩌면 만년빙정이 그러한 몽령시들을 제작하는 재료로 사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수라몽령시…….”
내 설명에 그 이름을 되뇌던 독고태문은 묵가후를 응시했다.
“그런 마물이 다시금 태어나게 할 수는 없지.”
“그렇습니다. 해서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몽령시의 제작 과정을 토대로 몽마의 움직임이나 위치를 빠르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정마대전을 통해 마교를 궤멸시키는 과정에서 놈들에 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정천맹이었다.
몽령시의 제작 과정 역시 그중 하나.
듣기로 몽령시는 죽기 직전이나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체가 최소한의 요구 조건이었고 생전의 무공 성취가 최소 일류 이상에 달하는 경지와 정신력을 가져야만 제대로 된 몽령시로 태어날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만한 조건을 지닌 시체가 흔하진 않았으니 몽마를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 실마리를 쫓아 마교의 본거지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창 대화를 나누는 와중.
“문주님.”
맹주전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독고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라 전해라.”
***
“북해빙궁의 일장로 염흥방이오.”
맹주전에 들어선 염흥방과 염혜주는 상석에 앉아 있는 독고태문을 향해 정중한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소녀는 북해빙궁의 구현각(具顯閣)을 이끄는 염혜주라고 합니다. 일장로님의 손녀이기도 하고요.”
구현각은 북해빙궁의 젊은 무인들, 즉 북해의 전력이 될 후기지수들을 선발하고 수련시키는 집단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인 염혜주는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구현각주가 된 여인이었고.
독고태문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짐짓 놀랍다는 표정으로 염혜주를 바라봤다.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구나. 그만큼 기세 역시 남다르고. 거기다 미모까지 빼어나다니.”
“과찬이십니다.”
“우리 정천맹에도 그런 아이가 하나 있는데. 이미 구면일 테지?”
독고태문은 왜인지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 쳐다봤다. 묘하게 거슬리는 시선이었으나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이렇게 놓고 보니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소이까?”
독고태문이 넌지시 묻자, 염흥방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의 얼굴엔 비스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맹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요.”
…저 표정을 보니 염흥방이 구태여 제 손녀를 함께 데려온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보아하니 염혜주도 이제야 그걸 깨달았는지 얼굴이 다소 붉어진 채였다.
그사이 염흥방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독고태문과 눈을 마주했다.
“맹주님의 혜안으로 소룡단과 유 소협이 북해에 파견된바, 그 덕에 본궁은 크나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궁주님께서는 당장에라도 중원으로 달려와 그 은혜에 대한 감사를 직접 전하고 싶어 하셨으나 상황이 여의찮아 일장로인 저를 대신 보내는 점에 대해 크게 아쉬워하셨소.”
“북해빙궁의 상황이 어떤지는 일찍이 전해 들어 알고 있소이다. 반란은 진압 이후의 행보가 더욱 중요할 터인데, 그런 상황에서도 빙궁의 일장로께서 직접 본맹까지 찾아주셨으니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될 부분이오. 오히려 명성으로만 전해 들었던 북해의 고수를 마주하게 되어 영광이외다.”
초반부터 짝이 잘 맞던 두 사람이었는지라 이후 오가는 대화 역시 자연스럽고 훈훈한 분위기였다.
이어 염흥방은 직접적으로 나를 은인이라 거론하며 북해빙궁은 나뿐만 아니라 소룡단과 나아가 정천맹에게 크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서 향후 좋은 관계를 이어가길 원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 뜻은 물론 궁주인 봉우의 의지가 시발점이었다.
“궁주님께서 정천맹주께 직접 전해달라 부탁하신 거요.”
염흥방은 그 말과 함께 품속에서 비도 한 자루를 꺼내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실전에서 사용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의 극치.
“북해빙궁의 신물 중 하나인 빙왕구천비도(氷王勾踐飛刀)요.”
“빙왕……!”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는지 독고태문과 묵가후가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두 사람과 달리 내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빙궁의 초대 궁주님께서 빙왕이라 불리셨어요.”
염혜주가 옆에서 슬며시 설명을 전해주었다.
“그렇습니까?”
신물이라 불릴 만한 물건이네.
나는 화려한 빛을 머금은 비도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 독고태문을 바라보면서 정천맹과 북해빙궁의 관계가 동맹이라는 방향으로 확고히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
크기만으로 사람을 압도할 만한 기세와 규모의 건물 안.
은은한 마기와 어둠이 내리깔린 그곳의 문이 천천히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걸어들어 왔다.
좌우에 늘어선 기둥을 지나쳐 중앙에 도달한 인영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존재를 마주하자 즉각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을 알현합니다.”
공손함이 배어 있는 칼칼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몽마였다.
그런 몽마를 맞이한 단룡위가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북해까지 다녀와 지금껏 쉬지도 못했다지? 고생이 많았겠군.”
단순한 한마디에서조차 항거할 수 없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는지라 몽마는 고개를 숙인 채 움찔거렸다.
‘월영련주로서 처음 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몽마가 단룡위를 만난 건 그가 폐관수련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때에도 이미 충분히 절대자의 면모를 내뿜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아득히 넘어서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치 전대 천마를 마주하는 수준.
듣자 하니 육마의 최고수인 검마마저 일검으로 꺾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침을 꿀꺽 삼킨 몽마는 한껏 더 고개를 조아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서. 결과는 어떠하던가?”
단룡위의 물음에 몽마는 자신감이 내비치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교주님의 눈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수라몽령시라고 했지?”
“예. 대략 이천 구 정도의 수라몽령시가 완성됐고 그 숫자는 차차 늘어날 겁니다. 그걸 위해 북해의 만년빙정을 쓸어온 게지요.”
단룡위의 의지로 부활하게 된 현 마교는 옛 마교의 생존자들을 끌어 모으며 빠르게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월영련 역시 이미 마교의 이름으로 규합된 상황.
하지만 십만마도를 자랑하던 그때와는 아직 전력 차이가 존재했다.
그걸 메꾸고자 몽마가 고안한 게 수천에 달하는 수라몽령시.
단룡위의 신임과 지원으로 북해까지 다녀온 몽마는 그 목표를 일정 수준 달성한 상황이었다.
“또한 수라몽령시뿐만 아니라…….”
몽마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한동안 보고를 올리기에 바빴고 단룡위는 한참의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밌군. 어디 한번 강호에 내놓아 보거라. 만들었으니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은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