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3장 선제(4)
“교주님, 목월방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단룡위와 독대하고 있던 몽마는 목월방주라는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월영련.
눈앞에 있는 단룡위가 마교를 재건하기 이전에 이끌던 세력.
듣기로는 정천맹의 위세를 줄여놓고자 여러 계략을 꾀하던 와중에 북해에서 마주쳤던 유진휘라는 놈에게 당해 적잖은 전력이 소실됐다고 알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놈이긴 했지.’
겉보기엔 약관을 갓 넘은 젊은 사내임에도 풍기는 기세로 봤을 때 이미 인극을 넘어 지극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사내였다.
‘놈을 마주했을 당시엔 짐짓 여유로운 척 입을 놀렸지만…….’
만약 그때 놈이 이백 구의 몽령시를 저지하러 가는 게 아닌,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면 큰 위기에 빠졌을지도 몰랐던 순간이었다.
육마 중 하나인 몽마라 불리는 자신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속으로나마 분을 삭히던 몽마는 교주전 안으로 들어서는 목월방주와 눈이 마주쳤다.
일순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기파가 피어올랐다.
전대 마교의 생존자들과 월영련의 인물이었던 자들 사이엔 여전히 괴리가 감돌고 있었던 탓이다.
육마는 전대 마교에서 교주 다음가는 지위였고 금월, 화월, 수월, 목월, 일월로 이루어진 월영련 오대세력들의 수장은 월영련주 다음 가는 지위에 올라 있던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단룡위가 재건한 마교 아래로 규합되었으나 아직 질서나 직위가 개편되지 않아 소리 없는 견제만 이어지고 상황.
폐관수련에 집중한 나머지 그 부분까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단룡위는 턱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정리가 필요하긴 하겠군.”
그 말에 목월방주와 몽마가 흠칫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송구합니다.”
단룡위는 두 사람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일월과 목월. 두 사람은 과거의 이름을 버려라.”
“그게 무슨?”
“금월, 화월, 수월이 사라진 지금 남은 건 일월과 목월. 둘 뿐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육마 쪽은 검마와 몽마. 여기도 둘이군.”
“예.”
“이후 네 사람은 동등한 지위에 올라 본좌가 이끄는 교의 재건과 중원 평정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과거의 이름은 버리란 뜻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각자 사대신마(四大新魔)의 한자리를 맡아라.”
“사대신마…….”
검마와 몽마는 그대로 별호를 계승하되 일월성주와 목월방주는 각각 일마(日魔), 목마(木魔)로서 거듭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목마는 예전에도 그랬든 총군사의 직위까지 겸임하도록.”
“명을 따르겠습니다.”
같은 사대신마가 되었으나 목마가 총군사로까지 추대된다는 말에 몽마는 못마땅한 마음이 일었다.
하나 단룡위의 결정에 토를 달 수는 없는 실정이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흘낏 목마를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반대로 목마는 옅은 조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총군사로서 우선으로 처리해야 할 부분에 대해 건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해.”
“본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지금, 슬슬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목마의 말에 단룡위는 눈을 빛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몽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로 계획이라도 있는 것이냐?”
“듣자 하니 이천구에 달하는 몽령시가 완성되어 그 성능을 시험해보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몽령시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몽마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교주님께서 노부에게 특별히 위임하신 일이지.”
“그렇습니까? 한데, 그 몽령시라는 거. 정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몽마께서는 몽령시 하나하나가 웬만한 일류고수를 웃도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던데.”
“감히 내 몽령시를 의심해? 수 대에 걸쳐 역사적으로 증명되어왔던 사실이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제 계획에 힘을 빌려주시죠.”
“흠.”
마치 부탁한다는 어조였기에 몽마는 날카로웠던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교주님의 명도 있었으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빌려주마.”
몽마의 확답에 목마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단룡위의 시선에 맞춰 지도 한 장을 펼쳐 보였다.
“현재 정천맹은 본교의 위치를 수색하고자 중원 전역으로 전력이 흩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저희로서는 그 틈을 치고 들어가기에 딱 알맞은 순간이기도 하지요.”
“하남으로 진격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몽마가 놀란 눈으로 묻자 목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천맹의 본단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정천맹 다음으로 저희에게 가장 거슬리는 존재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휙.
말과 함께 목마가 손가락으로 지도 한 곳을 가리켰다.
산서. 그리고….
“광동성?”
말없이 듣고만 있던 단룡위는 태사의에서 내려와 지도를 낚아챘다.
“유씨세가가 있는 산서와 독고세가가 있는 광동이라. 어디가 서쪽이더냐?”
성동격서의 계획임을 알아차린 단룡위의 물음에 목마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야 교주님의 결정에 따라 달라질 일 아니겠습니까?”
***
정천맹주인 독고태문과의 만남 이후 염흥방과 염혜주는 귀빈급 인사들만을 모시는 객청으로 안내되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극진한 대우 속에서 정천맹이 있는 하남 주변의 명소들을 유람하는 식의 관광을 겸하며.
‘염 장로님과 그의 손녀가 북해로 돌아가실 때까진 자네가 곁에서 수행 좀 해주게. 먼 타지에서 자네와 소룡단만이 그나마 제일 대하기 편하지 않겠나?’
그리고 묵가후는 나와 소룡단에게 두 사람을 맡겼다. 일리 있는 결정이어서 거절할 수 없었고.
“오늘은 여기가 좋겠습니다, 형님.”
하남장가의 후계자인지라 하남 지역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걸 꿰뚫고 있는 장진악 덕에 별다른 어려움도 없을 거라 판단했다.
“네가 알아서 해라.”
“예.”
예상대로 장진악은 능숙하게 일행들을 이끌었다. 하남의 명소란 명소를 죄다 둘러보고 가격이 만만찮아 보이는 객잔에 들러 끼니를 챙겼다.
그건 나로서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단룡위가 마교를 재건한 마당에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전생에도 천영검대주로서 정천맹에 속해있었다지만 그때는 하남을 벗어난 전장의 최전방이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하다못해 정천맹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 중 하나인 운대산 수유봉에 올라 보는 것도 오늘이 처음.
“산수(山水)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어떻습니까?”
장진악이 눈 앞에 펼쳐진 절경을 가리키자 인원들이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음이 아닌 소룡단원들도 그럴진대, 중원을 방문한 게 처음인 염흥방과 염혜주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북해의 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인가 싶기도 하고.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에요. 그렇죠, 할아버지?”
“그렇구나.”
두 사람의 감탄과 함께 나 또한 절경을 눈에 담으며 기분 좋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그런 내 머릿속으로 순간 묵가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 대주의 유지를 이어서인가? 자네를 볼 때면 항상 그가 떠올라. 마교라는 이름을 향한 증오심 역시 그에 못지않고. 해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네.’
‘어떤….’
‘그가 걸어간 길을 따르지 말게.’
묵가후의 눈에 비쳤던 천영검대주 천우혁의 삶은 어땠기에 그런 말을 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여유를 느껴보라고 염흥방과 염혜주의 수행을 내게 맡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들었다.
‘…저는 이미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속으로나마 묵가후에게 대답을 건넨 내가 조금 더 경치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푸드득!
산새가 날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무시할 수 없는 기세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
“자네도 느꼈나?”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묻는 염흥방에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예사롭지 않은 고수야. 누구인지 짐작이 가나?”
하남은 명백히 정천맹과 하남장가가 있는 정파의 영역. 그런 만큼 정천맹 소속인 나와 소룡단에게 뭔가 예상가는 바가 없는지 묻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기세를 품고 있는 고수라면 맹주인 독고태문 말고 또 누가…….
잠시 고심했던 나는 시선을 돌려 장진악을 쳐다봤다. 정체 모를 고수의 기세는 확실히 녀석의 기세와 닮아 있었다.
“알고 있었냐?”
내가 묻자 장진악이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연히 몰랐습니다.”
몰랐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장진악은 나와 염흥방 사이로 한걸음 나서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 아버지입니다.”
장진악의 말에 소룡단원들이 움찔 놀라는 게 보였다. 녀석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하남장가주 권왕이었으니까.
염흥방 역시 어느 정도 중원 무림의 정세를 알아가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하남장가가 어떤 세력이고 권왕이 어떤 인물인지는 인지하고 있었다.
“자네의 아버지라면 천하십대고수라는 권왕?”
“예.”
“허.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만나보고 싶기는 했으나 이런 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북해빙궁의 일장로이기 전에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환생한 이후 권왕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여전히 곰 같은 인상에 우락부락한 육체를 자랑하고 있으려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무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전부 장진악과 비슷한 형식의 옷차림이었다. 그 선두에는 양소매가 없는 특이한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나와 일행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팔의 근육이 마치 단단한 바위를 연상케 하는 그가…….
“네가 유진휘로구나-!”
…그가 느닷없이 일갈과 함께 나를 향해 주먹을 뻗어왔다.
주먹에 담긴 내력이나 기세는 확실히 전생에 봤던 권왕의 주먹과 똑같았다. 아니, 시간이 꽤 흘렀으니 전보다도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문제는 그런 권왕의 공격이 전력을 다한 공격이라는 거였다.
천하십대고수가 전력으로 내지르는 일권.
쿠구궁!
단순히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천둥과도 같았고.
가만히 눈 뜨고 당하고만 있을 수 없던 나 역시 빠르게 내공을 끌어올려 마주 주먹을 뻗었다.
꽈-앙!
중앙에서 충돌한 두 주먹을 중심으로 태풍과도 같은 여파가 터져 나왔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난데없는 상황에 경악하면서도 황급히 몇 걸음씩 물러날 정도의 여파였다.
그러는 사이 나와 주먹을 맞댄 권왕이 험상궂은 얼굴 위로 미소를 머금었다.
“이야. 권왕인 나를 상대로 주먹을 써? 듣던 대로 난놈이구나.”
“뭘 어떻게 들어야 만나자마자 주먹을 휘두르는 겁니까?”
“일전에 내 자식놈이 좋아하는 여자애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웬 놈에게 두들겨 맞고 돌아왔다고 듣기는 했지.”
장진악과의 첫 만남을 거론하기에 내가 피식 웃자 권왕의 입꼬리도 더욱 밀려 올라갔다.
“두들겨 맞고 돌아와서는 그놈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고까지 하기에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감히 하남장가의 후계자를 아우로 둔 놈이 어떤 놈인가 하고.”
“그래서. 궁금증은 좀 풀리셨습니까?”
내가 묻자 권왕이 한걸음 물러나 우두둑, 몸을 풀다가 자세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 풀어봐야 하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