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5장 성동(1)
정천맹이 있는 하남을 떠나 산서로 출발한 지 이틀.
염흥방과 염혜주, 그리고 북해빙궁의 무인 이십 명을 대동한 나는 전력으로 내달려 마침내 산서에 도착했다.
이어 가장 먼저 걸음을 옮긴 장소는 백의문. 백룡각이 산서로 쳐들어오려는 적들에 대해 추가로 파악한 정보가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문주님!”
백의문의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역시나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반겼다.
백의검대가 먼저였고 이후 차례대로 백의검대주 이자청과 일장로 홍야, 마지막엔 공손량까지.
나는 그들에게 둘러싸인 채 잠시 반가움의 회포를 풀었다. 대부분의 대화는 내 명성에 대한 주제가 주를 이뤘다.
“축하드립니다, 문주님!”
“우리 문주님이 권왕을 꺾고 당당히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르시다니.”
“당연히 그랬어야 할 일이지만 막상 실현되고 나니까 뭔가…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문주님이 천하십대고수가 되신 건데 왜 네가 가슴이 벅차?”
“그런 문주님이 바로 우리 백의문의 주인이라는 거잖아.”
“그, 그렇네. 듣고 보니 엄청난 일이네.”
감격한 얼굴로 내게 한마디씩 던져오던 백의검대원들은 이내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온갖 야단법석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천하십대고수가 이끄는 문파의 제자가 된 셈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만나기 전의 녀석들은 끽해 봐야 산서 노주의 뒷골목을 전전하던 사파인들이었으니까.
그런 녀석들의 선두에 서 있던 이자청 역시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런 이자청을 마주 바라봤다.
“왜? 새삼 존경심이라도 피어오르냐?”
“새삼이라뇨? 전 문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항상 존경해 왔었습니다. 지금은 그 존경심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아진 것뿐이고요.”
“존경은 무슨. 그저 살고 싶어서 날 따랐던 거잖아.”
노주의 뒷골목을 주름잡던 흑사방.
그곳의 간부였던 녀석이 지금은 마치 꿈에 그리던 영웅을 만난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게 썩 우스꽝스러워 재차 웃자 이자청이 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맞죠. 그래도 그때 고개를 숙이고 문주님을 따르기로 했던 결정이 제 인생의 분기점이었습니다. 문주님이 거둬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실없는 소리 말고 비켜.”
“네.”
내 말에 이자청은 멋쩍은 얼굴로 두어 걸음 물러섰고 뒤따라 백의검대원들도 좌우로 갈라져 길을 텄다.
그 사이로 내가 앞장서자 염흥방과 염혜주가 따라붙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으로서는 정천맹 소룡단에 소속되어 있는 내가 문주님이라고 불리고 있는 현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곳은 대체……. 유 공자님은 유씨세가라는 가문의 자제분이었던 게 아니었나요?”
와중에 염혜주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맞아요. 유씨세가의 소가주. 백의문은 그런 제가 개인적으로 창설한 문파고요.”
“그럼 저들이 모두 유 공자님의 수하들이라는 건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염혜주는 놀란 눈으로 백의검대원들을 둘러봤다.
그녀가 놀라는 이유는 이자청을 비롯한 녀석들의 무위가 범상치 않다는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로서도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샌가 백의검대원들 전원이 일류의 경지를 뛰어넘을 정도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자청은 더 나아가 절정의 초입을 벗어나 완연한 절정고수로 거듭난 상태.
내가 없는 새에 녀석들이 홍야의 가르침 밑에서 지독한 수련을 쌓아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홍야를 마주하는 내 얼굴에 기꺼운 표정이 서렸다.
“애들을 얼마나 들들 볶아먹은 거야?”
내가 묻자 홍야는 뿌듯한 얼굴과 함께 대답했다.
“그때 말하지 않았나? 백룡각의 제자들이 백의검대원들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걸릴 거라고.”
그의 목소리에서는 자신이 가르친 백의검대원들을 향한 자부심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백룡각을 창설할 때 홍야는 내게 호승심을 내비쳤던 적이 있었다.
자신이 가르친 백의검대원들과 내가 직접 창안한 무공인 백룡풍린검을 익힌 백룡각의 제자들을 사이에 두고.
“그러고 보니 그때 내기도 했었지, 아마? 백룡각의 제자들이 백의검대원들의 무위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내기의 결과야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되겠지?”
홍야의 말대로 당장은 백의검대원이 백룡각의 제자들보다 한 수, 아니, 적어도 몇 수는 위의 실력이었다.
그야 내가 백의문에 머무른 기간이 짧았고 그 이후엔 다시 정천맹으로 복귀해 백룡각 제자들을 살펴볼 기회가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그 내기는 잠시 보류하자고. 언젠가 내게도 백룡각 제자들을 살펴볼 여유가 생길 때까진.”
“그러지. 그래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하하.”
이걸로 홍야는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백의검대원들을 담금질할 게 분명했기에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홍야를 지나쳐 공손량과 마주 섰다.
한데 나와 마주 선 공손량의 표정은 다른 이들과 달리 다소 진중해져 있었다.
아마도 내가 더 이상 백색 가면을 착용하지 않고 있어서이겠지.
“이제 백면공자 행세는 그만두시는 겁니까?”
공손량의 말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굳이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될 테니까.”
내가 백색 가면을 쓰고 백면공자이자 백의문주라는 제이의 인물을 행세한 까닭은 유진휘가 평범한 유씨세가의 소가주라는 사실을 유지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백면공자의 이름을 빌리면 내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하나 유진휘가 잠룡이라는 별호와 함께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만큼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공손량은 그런 내 심중을 예상했다는 듯 옅은 미소와 함께 외원의 건물 하나를 바라봤다.
“그러실 줄 알고…….”
공손량의 음성에 맞춰 건물의 문이 열렸다.
이어 그 안에서 성화상회의 회주이자 산서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종승재와 그의 여식인 종화설, 마지막으로 유씨세가의 가주이자 내 아버지인 유운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종승재나 종화설은 차치하더라도 아버지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예상도 못 했기에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순간 어디서부터 설명해 드려야 하나 당황하고 있던 내게 아버지는 마치 애초부터 전부 깨닫고 있었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녀왔느냐.”
“…예.”
***
“결국 회주님께서 오래전에 이미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셨단 말씀이군요.”
내 말에 종승재는 한차례 헛기침과 함께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밀을 엄수해 주겠다던 말과 달리 아버지에게 전부 이실직고한 셈이었다.
“적어도 네 아버지에게만큼은 네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을 숨겨둘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기도 했고.”
종승재의 변명에 아버지가 말을 얹었다.
“그래. 사실 우리 가문이 흑사방, 그리고 마협문과 마찰을 빚었을 때, 느닷없이 백의문이라는 세력이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말에 남몰래 백의문을 조사한 적이 있었지. 그때부터 어느 정도 눈치를 챈 상황이었다.”
“그렇군요.”
“네가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눈길에서 자식을 향한 대견함과 배려심이 느껴졌기에 나는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지만 반대로 부모 이기는 자식 역시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이에 따라 산서 무림을 대표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성화상회와 유씨세가. 그리고 백의문.
각 세력을 이끄는 인물들과 함께 염흥방까지 백의문의 집무실 중앙에 둘러앉았고 그런 우리 앞에 공손량이 여러 보고서들을 펼쳐 보였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마교의 세력으로 추정되는 집단이 현재 산서로 진격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놈들의 목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유씨세가. 나아가서는 산서 무림을 장악하고 마지막으로 문주님까지 노릴 가능성이 큽니다.”
백룡각의 조사를 바탕으로 작금의 상황을 명백히 추려낸 공손량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적들의 숫자는 대략 천. 그중에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진격 속도를 볼 때 열흘 이내로 산서에 진입할 것이며…….”
공손량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장내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 또한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마교의 침공. 즉, 이곳 산서에서부터 또다시 정마대전의 서막이 오른다는 뜻이었다.
현 강호인들에게 있어서 정마대전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는 만큼 종승재와 아버지가 느끼고 있을 부담은 상당할 게 분명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넌지시 너무 염려 말라는 눈빛을 건넸다.
내 기세를 알아차렸는지 두 사람은 보고를 듣는 와중에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한데 이건 제 조심스러운 추측입니다만…….”
공손량이 눈을 빛내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놈들의 비수가 사실은 산서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산서가 아닌 다른 곳?”
내가 묻자 공손량은 산서 무림의 세력 구도를 정리한 서류 한 장을 내보였다.
“산서 무림은 현재 유씨세가와 성화상회를 필두로 유례없는 단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지역을 대표하는 무가와 상가가 힘을 합쳤으니 자연히 그 밑의 세력들까지 하나로 뭉치고 있는 실정인데, 그런 산서엔 적들로서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백의문까지 존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거기다 이제는 천하십대고수의 자리에 오른 잠룡까지. 아무리 마교라고 해도 고작 천이라는 숫자로는 승리라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을 게 분명합니다. 저희가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공손량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적들의 숫자가 산서를 집어삼키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놈들이 수라몽령시를 이끌고 온 상황이란 걸 고려해 봐도.
분명 위협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위화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성동격서?”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공손량이 크게 반응했다.
“예. 문주님의 말대로라면 며칠 내로 정천맹에서 파견한 무력 부대까지 산서로 집결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적들의 습격에 미리 대비하여 확실한 승리를 쟁취하고자 독고태문은 천군지사대와 복룡추호대, 그리고 백팔벽검대까지 산서로 파견시킨 상태였다.
나는 염흥방과 염혜주와 함께 그들보다 앞서서 산서에 도착한 상황이고.
“마교라는 이름과 놈들의 기습적인 습격이라는 데에 초점을 두어 과잉 대비를 한 모양새로군.”
“물론 말씀드렸듯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입니다.”
공손량이 재차 추측이라는 걸 강조했지만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나무만 보다가 숲을 파악하지 못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으로 공손량의 혜안에 감복하면서 그에게 명령했다.
“사람을 보내 산서로 오고 있을 정천맹의 무력 부대를 전부 복귀시키고 이 사실을 총군사에게도 전할 수 있도록 조치해. 그리고…….”
나는 탁자 중앙에 올려진 지도를 잠시 살핀 뒤에 말을 이었다.
“적들의 이동 경로 중에서 기습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해봐.”
“…수비가 아니라 도리어 선공을 취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낫겠어.”
놈들이 성동격서의 계책으로 산서가 아닌 다른 목표를 노리고 있는 거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산서로 향하는 습격을 잠재운 뒤 어디로 향할지 모를 그 비수마저 부러트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자신의 추측만 듣고 이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내게 공손량은 주춤하는 낌새를 보이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가 공손량을 신뢰하는 만큼 그 역시 나를 신뢰한다는 태도와 함께.
“명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