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5장 성동(2)
내가 산서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금룡문의 일대제자 경사만(慶斯萬)입니다.”
“대송파의 장문인인 복지겸(卜支謙)이오.”
“산서신가의 가주…….”
“영영문에서 온…….”
유씨세가와 성화상회의 부름 아래 산서의 무가와 문파들이 노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세력을 꾸린 것은 아니지만, 명백히 산서 무림 연합회라고 불러도 좋은 군집이었다.
각 무파와 무가에서 차출한 정예 고수들이 한데 모이자 그 숫자가 물경 수백을 넘어갔다. 아직 합류하지 않은 숫자까지 합친다면 천이라는 적의 숫자와 비등하지 않을까 예상되는 수준.
집결 장소는 성화상회에서 은밀히 마련해둔 널찍한 장원이었다.
“유씨세가주 유운호입니다.”
“성화상회주 종승재요.”
아버지와 종승재는 자연스럽게 인원들을 맞이하며 각 세력의 수장들에게 현 상황에 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교… 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단 말씀이외까?”
그들은 마교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하나같이 경악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산서 무림이 하나로 뭉치게 된 명분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침략에 대비해 자신들의 터전인 산서 땅을 수호해야 한다는 결의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 결의가 어느 정도 마교에 대한 공포를 반감시켜주는 분위기였다.
반대로 잔뜩 위축되어 공포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정천맹에서 마교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공표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까.
한데 그런 마교가 실제로 산서에 쳐들어오는 중이라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저희만으로 적들을 상대하는 게 가능한 겁니까? 마교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악랄한 마인들이란 말입니다.”
“그렇소이다. 그 마교가 쳐들어온다는데 정천맹에서는 무얼 하고 있다는 말이오?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겝니까?”
결의를 다지는 이들이 반. 공포에 물든 자들이 반. 그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백색 가면을 쓰고 천천히 장내에 등장했다.
백면공자이자 백의문주를 상징하는 가면이었다. 아마 오늘이 이 가면을 쓰는 마지막 날이 될 테지.
“백면공자…!”
내 등장에 누군가가 짧게 탄성을 내질렀고 곧이어 인원들의 이목이 쏠렸다. 적어도 산서에서만큼은 백면공자의 명성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산서제일검.
산서에서 가장 강한 인물.
“백의문주요.”
짤막한 소개에 곳곳에서 포권지례와 인사치레가 쏟아졌다.
나는 덤덤히 듣고만 있다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면을 벗으며 정체를 드러냈다.
“유씨세가의 소가주, 잠룡 유진휘라고 합니다.”
정체를 밝히자 마교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보다 더욱 커다란 놀람이 장내로 퍼져나갔다.
“자, 잠룡!”
“백의문주의 정체가 잠룡이었다니……!”
산서제일검의 정체가 실은 최근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잠룡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그 충격은 인원들의 심중에 박혀있던 결의나 공포를 모두 지워버릴 정도였다.
내 예상보다도 더욱 거센 반응이었기에 내심 당황하긴 했으나 나는 의도대로 기세를 피워올려 장내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잠시 이어지는 짧은 정적.
그 정적을 깬 것은 나를 뒤따라 모습을 드러낸 공손량이었다.
“백의문의 총관인 공손량입니다.”
백의문은 규모만 보면 중소문파이긴 하지만 산서제일검인 백면공자가 이끄는 문파여서 내심 산서를 대표하는 문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한데 그 백면공자의 정체가 잠룡이라는 게 밝혀지자 공손량을 대하는 인원들의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잠룡이라는 명성이 빚어낸 결과였고 덕분에 공손량은 손쉽게 앞으로의 계획을 공표할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모인 목적은 적들의 침공에 대비해 산서를 수호하는 게 아닌, 먼저 나서서 적들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함입니다.”
“그 말은…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이자는 뜻입니까?”
“예. 그리고 이건 이곳에 계신 저희 문주님께서 결정하신 사안이기도 합니다. 마교라고는 하지만 적들의 숫자는 고작 천. 여러분들이 함께해주신다면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전력입니다. 그리고 저희 문주님께서는 당연히 선두에 서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겁니다.”
중간에, 누군가가 그게 가당키나 하냐며 반박하려다가 내가 선두에서 함께한다는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그 외에 나머지에서는 천천히나마 계획에 동조하겠다는 기세가 터져 나왔다.
이 또한 천하십대고수라는 명성에 힘입은 결과였다.
“잠룡이 함께 한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소?”
“그렇습니다. 단신으로 권왕 대협과 승부를 가려 당당히 천하십대고수의 대열에 합류하신 분 아닙니까?”
백의문과 유씨세가 다음으로 명성이 높은 대송파의 장문인과 금룡문의 일대제자까지 나서서 목소리를 높여주니 오래지 않아 나머지 인원들도 결심을 굳혀갔다.
“좋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본인 역시 감히 산서 땅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간악한 마교도들을 저지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 수 있다는 각오요.”
마침내, 산서 무림의 의지가 나를 중심으로 규합되어가고 있었다.
***
“얼마나 남았지?”
길쭉하게 째진 눈에 백발이 뒤엉킨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의 물음에 수하 하나가 나직이 대답했다.
“이틀 정도만 더 이동하면 산서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로님.”
“이틀이라.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움직이려니 사지가 쑤셔오는 기분이로구나.”
“송구합니다.”
“그게 어디 네 탓이겠느냐? 교주님의 명령이 그런 것을. 그러니까, 유씨세가라는 가문을 산서 땅에서 지워버리면 된다는 게지?”
“그렇습니다. 유씨세가를 공격해 강호와 정천맹의 이목을 저희 쪽으로 집중시키는 게 저희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유씨세가의 소가주가 산서에 나타날 가능성이 크니 마주한다면 굳이 맞상대하지 말고 충돌을 피하라는 총군사님의 경고가…….”
수하의 말에 순간 노인이 진득한 분노를 뿜어냈다.
“그건 또 처음 듣는 말이로구나. 충돌을 피하라?”
“예. 저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파 세력의 이목을 끄는 미끼일 뿐이니 유씨세가를 공격하는 선에서 임무를 마무리하라는…….”
“큭. 크하하하!”
분노가 깃든 대소가 터지자 말을 하던 수하가 움찔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이어 노인의 웃음이 뚝 끊기더니 살기 가득한 안광이 터져 나왔다.
“감히 마교의 십장로였던 본좌를 상대로 충돌을 피하라? 총군사가 정녕 그따위 말을 씨불였다는 게냐?”
현재 마교의 총군사는 교주인 단룡위가 이끌던 월영련이라는 세력 밑에서 큰 신임을 받았던 목월방주, 현재는 목마라 불리고 있는 인물이 역임하고 있었다.
전대 마교의 십장로 중 하나였던 노인으로서는 탐탁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감히 혈야검(血野劍)이라 불리는 자신을 고작 미끼로 사용하겠다고 하니 기가 찰 수밖에.
혈야검 원익겸(元益謙).
과거 정마대전 당시 자신의 검에 죽어나간 정파 세력 무인들의 숫자가 몇이던가.
“유씨세가의 소가주. 유진휘라고 했던가?”
교주인 단룡위마저 경계하는 인물이라고 듣긴 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명령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원인겸은 차라리 놈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주길 바랐다.
유씨세가와 함께 그놈까지 처리하게 된다면 교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커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동시에 자신을 무시한 총군사에게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원익겸의 기세를 알아차린 수하가 조심스레 충언했다.
“못마땅하시겠지만 교주님의 언질도 있었다고 하니 이번만큼은 총군사님의 명성을 따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닥쳐라.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상대로 꼬리를 말아본 적이 없는 게 본좌다. 그런 본좌가 약관의 나이를 갓 넘어선 어린놈을 상대로 도망을 치라고?”
“하지만….”
“입 다물고 진군 속도나 높이거라. 이틀이 아니라 하루. 내일까지 산서에 당도해야 할 것이다.”
“…예.”
원익겸의 명령에 수하는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자신을 뒤따르는 무인들을 이끌었다.
오백에 달하는 수라몽령시와 다시 그만큼의 숫자로 이루어진 일류 및 절정고수들.
사실 수하 역시 이 정도 전력에 원익겸이 함께 한다면 유씨세가는 물론 유진휘라는 놈까지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기는 했다.
자신 또한 전대 마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주급 지위에 올라 있던 인물 아니던가.
거기다 자신이 이끄는 자염만마대(紫焰輓魔隊)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핵심 전력이기도 했다.
혈야검.
수라몽령시.
자염만마대.
단순히 미끼로 치부하기엔 과한 전력.
‘유진휘라는 놈이 정녕 산서에 나타날지는 모르겠으나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어느새 자염만마대주 혁상(爀狀)도 원익겸의 영향 덕분인지 자신감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은 날이 어스름해질 즘에 맞춰 팔천협(八泉峡)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쌍의 절벽 사이에 갈지(之)자 형태로 이루어진 협곡.
“이 협곡만 지나면 곧장 산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원래라면 팔천협이 아니라 백도산(白道山)을 지나쳐 산서에 진입할 계획이었으나 진군 속도를 높이라는 원익겸의 명령에 따라 경로가 변경된 것이었다.
협곡이라는 특성상 혹시나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치명적이겠으나 지금껏 은밀하게 이동해 왔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라는 판단과 함께.
“곧장 이동하지.”
“예.”
그렇게 원익겸과 혁상은 산서로 향하는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대략 두 시진 정도 흘렀을까.
하늘이 완연한 어둠에 물들고 인원들이 팔천협의 중간지점을 지나칠 때였다.
“잠깐.”
원익겸이 가늘게 뜬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휘-잉!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밤바람이 한차례 협곡을 휩쓸고 지나갔고.
“왜 그러십…….”
갑자기 멈춰선 원익겸에게 이유를 물으려던 혁상도 황급히 고개를 꺾어 어둠 너머의 전방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폐부마저 자극하는 묘한 기운이 그곳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현 마교의 교주인 단룡위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저벅.
순간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서 인영 하나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원익겸과 혁상은 느닷없이 나타난 그 인영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물론이고 자신들을 뒤따르는, 천에 달하는 수하들과 수라몽령시 역시 몸이라도 얼어붙은 것처럼 제자리에 못이 박혔다.
고작 길을 가로막은 한 사람 덕분에.
그리고 원익겸과 혁상은 그 존재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진휘….”
나직이 새어 나오는 그 한마디에,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를 아나?”
내가 묻자 대답 대신 살기 가득한 눈빛이 쏘아 져왔다. 저들이 나를 알든 모르든, 나로서는 저들의 눈길이 매우 익숙했다.
더군다나 그중 하나는 십장로 중 하나였던 혈야검. 전생에 수없이 들어왔던 별호였다.
아쉽게도 천영검대주였을 당시엔 마주친 적이 없던 인물이었다. 하긴. 그러니 지금껏 살아 있었던 거겠지만.
대신 현생에서 이렇게 마주쳤으니…….
“혈야검의 무덤으로 딱 어울리는 장소야. 그쪽도 마음에 들지?”
내가 조소를 피워올리자 원익겸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