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인 환생했다-141화 (141/150)

#141. 5장 성동(3)

“듣던 대로 꽤 건방진 놈이로구나.”

다소 긴장했었던 처음과 달리 원익겸은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듯한 말투였다. 전대 마교의 십장로라는 지위까지 올랐었던 고수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더불어 내가 혼자라는 점도 한몫했을 테고.

“유진휘. 잠룡이라 불린다지? 최근에는 권왕을 꺾어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던데.”

“귀가 밝네? 쥐새끼처럼 산서까지 은밀히 이동해 오는 와중에도 나에 대한 소문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걸 보면.”

가벼운 어조로 이죽거리며 도발했지만, 원익겸은 오히려 표정이 차분해졌다.

이어 그의 시선이 협곡을 둘러싸고 있는 한 쌍의 절벽을 향해 옮겨졌다.

“네놈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우리의 습격을 사전에 알아차렸다는 건데. 왜 혼자더냐?”

“…….”

그 물음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곳은 상대를 기습하기에 알맞은 최적의 장소였다.

문제는.

‘놈들이 급작스럽게 경로를 선회했습니다. 백도산이 아닌 팔천협…….’

왕삼을 비롯한 백룡각의 제자들이 은밀하게 적들을 주시하며 보고를 올리던 와중에 일어났다.

예상대로라면 놈들은 백도산을 지나쳐 산서에 당도해야 할 터였다.

그걸 노리고 백도산 일대에 산서 무림의 모든 전력을 투입했다. 유씨세가의 금검대와 백의문의 백의검대는 물론 일천에 달하는 산서 무림의 무인들까지.

백도산을 포위한 채 먹잇감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었건만 놈들은 백도산이 아닌 팔천협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 보고를 듣자마자 황급히 이곳까지 내달렸다. 일단 혼자서라도 놈들의 걸음을 붙잡아둔 뒤 지금쯤 팔천협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을 아군을 기다릴 심산이었다.

백도산에서 이곳 팔천협까지의 거리와 아군이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 본다면.

‘최소 반 시진은 놈들을 붙잡아둬야 하는 건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시간이어서 딱히 문제는 없었다.

한데 원익겸이 그런 내 낌새를 어느 정도 알아차렸는지 눈을 빛냈다.

“원군을 기다리는 게로군.”

“맞아. 좀 늦을 것 같으니 같이 기다려 보자고.”

“그때까지 네놈 혼자서 본좌와 일천이라는 내 수하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성싶으냐?”

“버틸 수 있으니 혼자서 왔겠지. 늙어서 그런가? 되도 않는 질문을…….”

말을 하는 도중, 원익겸의 뒤편에 서 있던 중년인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건방진! 이분이 누군 줄 알고 그따위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더냐!”

슬쩍 보니 이곳에서 원익겸 다음으로 지위가 높아 보이는 인물인 것 같았다. 그리고 원익겸만큼은 아니지만 중년인 역시 과거에 적잖은 명성을 날렸던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자성만마대주?”

정체를 알아보자 중년인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그걸 어떻게 알아차렸냐는 눈빛.

나는 개의치 않고 중년인의 뒤편에 늘어서 있는 놈의 수하들까지 한차례 훑어봤다.

“혈야검에 자성만마대와 수라몽령시까지.”

직접 보니 만만치 않은 전력임은 확실했다. 이 정도의 전력이 미끼가 될 정도라면.

“진짜 목표는 정천맹 본단이라도 된다는 건가?”

“…….”

떠보는 식으로 물었지만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반응을 보니 정천맹의 본단을 노리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대신 놈들은 성동격서라는 자신들의 계책을 내가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모양새였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원익겸의 눈동자마저 요동치고 있는 걸 보면.

“뭘 그리 놀라? 그따위 얕은수에 정파 세력이 흔들리기라도 할 것 같아?”

“…젊은 나이에 그저 무공만 강한 애송인 줄 알았더니. 심계 또한 상당하구나.”

그야 공손량 덕분에 알아차린 거긴 하지만 굳이 정정해줄 이유는 없겠지.

“그래서 진짜는 어디야? 태산? 섬서? 광동? 청해? 그도 아니면…….”

정천맹이 있는 하남이 아니라면 역시나 정파오주의 세력 중 하나이겠거니 싶어 계속 떠봤으나 원익겸은 슬슬 살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논쟁은 그만두겠다. 이 또한 시간을 끌려는 수작일 테니까. 그렇지 않더냐?”

“빨리도 알아차렸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사이.

스릉!

원익겸의 검이 서슬 퍼런 기운과 함께 뽑혀 나왔다.

***

“성동격서라니…….”

묵가후는 착잡한 표정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서찰을 와락 움켜쥐었다. 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자괴감이 물씬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흥분하지 말게.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독고태문의 차분한 목소리에 묵가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송구합니다, 맹주님.”

“그래서. 진휘는 어쩌고 있다던가? 대비책은?”

그 물음에 묵가후는 서찰에 적혀 있던 내용을 토대로 설명을 이어갔다.

“산서로 진격해 오는 적들은 자신이 처리할 테니, 저희는 마교의 진정한 목표와 의도가 어디고 무엇인지 조사하는 것에만 집중해 달라고 합니다. 이미 산서로 파견을 보냈던 천군지사대와 복룡추호대, 그리고 백팔벽검대까지 전부 복귀한 상황입니다.”

“…전부?”

산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왔다지만 혹시나 하는 근심이 깃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빠르게 근심을 털어냈다. 유진휘는 줄곧 내뱉은 말을 몸소 실천해온 인물이었다.

그가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는 건 그만한 확신도 함께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산서에는 유진휘가 이끄는 백의문에 그의 가문인 유씨세가가 함께하고 있지 않던가. 유씨세가가 성화상회와 함께 산서 무림을 주름잡고 있다는 건 익히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진휘가 그리 말했다면 그 말을 따라야지. 산서는 진휘에게 맡기고, 총군사는 지금 당장 대비책을 마련해 오게.”

“예. 산서를 미끼로 놈들이 실제 목표로 할 만한 곳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입니다.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놈들은 아마도…….”

휘영청한 보름달처럼 맹주전의 집무실 역시 새벽녘까지 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

같은 시각.

“혈야검이 산서성 영역 내에 들어섰나?”

은은히 새어 나오는 기세조차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검마였다.

검마의 뒤편에 시립해 있던 중년인은 같은 편임에도 그 기세에 주눅이 들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예. 보고에 따르면 몇 시진 내로 산서에 당도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겠구나.”

혈야검이 산서로 향하는 동안 검마는 수하 하나만을 대동한 채 유유히 홀로 광동에 도착해 있었다.

물론 나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수천에 달하는 마교의 무인들과 수라몽령시가 뒤따라오고 있는 상황.

“독고세가라. 쉽지 않은 상대임은 분명하지.”

검마는 자신이 머무는 객잔의 창가 너머로 독고세가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정파오주의 하나이자 광동성의 패자이며 검법으로는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가문. 거기다 현 맹주가 독고세가주 독고태문이었다.

문파나 가문으로만 놓고 비교하자면 명실상부 현 강호의 정점이라 할 수도 있는 게 독고세가라는 뜻.

그런 가문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게 된다니 검마는 생각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지난 정마대전은 마교의 패배였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결의와 흥분으로 고양된 모양새였다.

“검신만 아니었더라면 독고세가의 검법이 천하에 우뚝 솟았을 터. 부디 그 명성에 걸맞은 위용을 보여주길 바라마.”

검마는 한차례 안광과 함께 천천히 창가 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

번쩍!

한차례 섬광이 허공을 가르자.

콰쾅!

뒤늦게 터져 나온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혈야검이 자랑하는 혈세마정검(血世魔頂劍)이 검강을 뿜어낸 것이다.

물론 나는 이미 원익겸의 공격을 피해낸 뒤였고 내가 서 있던 자리만이 검강에 휩쓸려 터져나갔을 뿐이었다.

동시에.

촤악!

“커억!”

나는 괘월선보를 밟아 빛살처럼 원익겸을 지나쳐 후미에 자리 잡고 있던 그의 수하들을 노렸다.

원익겸과의 정면 승부보다는 적의 숫자를 줄여 전력을 갉아먹을 심산이었다.

“네 이놈! 본좌와 검을 섞는 게 그리도 두렵더냐!”

그 때문인지 원익겸은 뒤쪽에서 나를 향해 어마어마한 살기와 분노를 쏘아내고 있었다.

촤악!

“컥!”

서걱!

“끄윽!”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천에 달하는 자성만마대의 무인들과 수라몽령시 사이를 헤집으며 검을 휘둘렀다.

애초에 원익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있던 탓이기도 했다.

그가 직접 나와 대결을 벌여 내 발을 묶어두는 사이 자성만마대주가 제 수하들을 이끌고 계획대로 산서로 진격할 심산이었으리라.

하지만 나 역시 이들을 전부 이곳에 붙잡아둬야 했다.

슁-!

고개를 뒤로 꺾자 검기 서린 검날이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파앙!

이어 검날을 피한 자세 그대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자 또 한 자루의 검이 텅 빈 허공을 갈랐다.

천 대 일이라는 싸움인 만큼 사방에서 반격이 쇄도해오고 있었다.

이런 싸움을 반시진이나 이어가야 하는 만큼 나는 최소한의 내공과 움직임만으로 놈들을 상대했다.

콰악!

피하기만 하던 내가 순간 검을 내질렀던 놈의 팔을 움켜쥐어 힘껏 꺾자 고통에 겨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놈의 목을 단숨에 검으로 벤 뒤 허물어지는 시체를 밟고 튀어 오른 나는 공중에 멈춰 섰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내 검이 수십 개의 궤적을 그렸고.

촤자자자작!

뒤따르는 검기 다발이 발아래로 쏟아져 내리며 나를 에워싸고 있던 적들의 일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대략 서른 명이 시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게 되는 순간이었다.

보통 이 정도만 되어도 적들은 내 기세에 압도되어 잔뜩 긴장한 채 움츠러들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마교의 마인들에게는 공포심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놈들이 공포를 느끼는 존재는 오로지 마교의 주인인 천마뿐이라는 듯 움직였다. 그게 마교라는 세력의 무서움이고 위력이었다.

그런 놈들이 멈추어 설 때는 오직 죽음을 맞이할 때가 전부였다.

즉, 이곳 팔천협에서 천에 달하는 적들을 말살시켜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는 무리였다.

당장 적들의 숫자를 수십 정도 줄여놓은 사이 어느새 원익겸이 내 곁으로 짓쳐들어와 검을 그어내고 있었으니까.

터-엉!

검을 막아낸 내가 주르륵 밀려나는 반동을 이용해 훌쩍 거리를 벌리자 원익겸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또다시 정면승부를 피하는 나를 향한 분노가 극에 달한 듯싶었다.

“이 개 후레잡놈의 새끼가-!”

뒤따라 자성만마대주 혁상까지 나를 뒤쫓기에 바빴다.

물론 나는 끈질기게 놈들과의 충돌을 회피하며 오직 놈들의 수하만을 베고 또 베었다.

두 사람은 몰라도 자성만마대의 무인들이나 수라몽령시들은 내 일검을 받아내기에도 벅찰 터.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대략 이백에 달하는 시체가 협곡 사이에 산을 이루었다.

‘후. 슬슬 지치긴 하네.’

내공과 체력을 조절한다고는 했지만 적을 벨 때나 원익겸의 공격을 피할 때만큼은 나름의 전력을 내보여야 했기에 단전의 내공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이백에 가까운 숫자를 줄여두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인해(人海)가 여전히 나를 에워싼 채 기세를 높여갔다.

“고작 한 놈이다! 쉬지 말고 몰아붙여라! 놈도 인간인 이상 지칠 수밖에…….”

그중 누군가가 고함을 질러 자신들의 사기를 북돋으려 하기에.

콰득!

나는 몸을 날려 놈의 벌어진 입에 검을 쑤셔 박은 뒤 도리어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래. 계속해 보자고.”

그 상태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내게 다시금 사방에서 공격이 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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