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6장 격서(1)
촤악!
베고.
촤악!
또 베고.
푸욱!
마지막으로 검을 찔러넣자 가슴이 꿰뚫린 적 하나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하아.”
빠르게 검을 회수한 나는 핏물로 범벅된 안면을 한차례 쓸어내렸다. 안개가 걷히듯 밝아지는 시야엔 여전히 개떼처럼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수백의 적이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이제는 몇 놈을 죽였는지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검을 휘둘러왔건만.
‘진짜 숨 쉴 틈조차 없네.’
콰득!
나는 우측에서 날아든 수라몽령시의 목을 낚아채 힘주어 꺾었다. 놈은 한차례 몸을 떨다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걸로 또 한 놈.
수백이 넘어가는 시체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그에 비례하여 나 역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적의 피와 내 상처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핏물이 한데 뒤엉켜 이미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고 단전에는 이제 일갑자에서 조금 모자란 내공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일천이라는 숫자의 적을 상대하는 건 전생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쉽진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흥! 슬슬 네놈도 지쳐가는구나. 본좌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이걸로 끝이다.”
혈전이 벌어지는 내내 끈질기게 나를 뒤쫓으며 검을 휘둘러왔던 원익겸이 내 정면으로 내려앉아 조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
“이제야 당신 차례가 왔을 뿐이야.”
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식 웃자 원익겸은 여유롭게 검을 들어 올려 나를 가리켰다.
“곧 죽을 마당에도 그 오만함은 부러지질 않는구나. 그래도… 인정은 해주마. 네놈의 무위가 상당하다는 것을.”
원익겸은 나를 주시하고 있는 와중에 힐끗하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는 주변의 전장은 말 그대로 한 폭의 지옥도와 다를 바 없었다. 그 광경을 둘러보고 있는 원익겸의 얼굴에 경외심과 망설임이라는 감정이 깃들었다.
한낱 인간이 단신으로 수백에 달하는 일류 및 절정고수 그리고 수라몽령시를 상대로 이만한 위용을 뽐내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봤기에 피어오른 자연스러운 감정일 터였다.
“왜? 막상 덤비려니 엄두가 나질 않나?”
나는 그런 원익겸의 심중을 파고들어 도발했다. 몸 상태가 온전치 않으니 놈의 평정심이라도 긁어놔야지.
“같잖은 수작은 집어치워라.”
물론 원익겸이 이런 얕은수에 넘어올 인물은 아니었다.
동시에.
핑!
원익겸이 혈야검이라 불리게 된 이유를 증명해주는 검법이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줄기 섬광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게 짓쳐들어오더니.
피피핑!
연이어 그의 검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섬광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방의 모든 것을 뒤덮는 거대한 그물과도 같은 초식이었다. 게다가 그 섬광 하나하나가 검강이었기에 섣불리 막아내다간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초식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오직 시체와 핏물밖에 남지 않는다고 해서 혈야검이었다.
“흡!”
나는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천일백야검법의 제육초식 천신참망을 펼쳐냈다.
파라라락!
내 검 끝에서 피어오른 검강의 소용돌이가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원익겸의 모든 공격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물 샐 틈 없이 촘촘한 그물 같은 초식이어도 사방을 찢어발기는 소용돌이를 버텨낼 수는 없는 법.
쾅! 콰콰쾅!
서로의 초식이 격돌하며 일구어낸 충격의 여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가자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며 장내를 뒤덮었다.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수백의 적들이 주춤주춤 몇 걸음이나 물러날 정도였다.
그때.
“큭!”
원익겸의 입에서 고통을 참아내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초식 대 초식 싸움에서 패배하여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있는 걸 발견한 나는 곧장 신형을 쏘았다.
이어 원익겸의 목을 향해 검을 뻗었고.
터-엉!
그는 가까스로 제 검을 들어 올려 내 공격을 막아냈다.
나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놈을 몰아붙였다. 조금 전 펼쳐 보인 초식으로 또다시 한 움큼의 내공이 빠져나간 만큼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파파파팡!
검과 검이 수십 차례 격돌하면서 원익겸은 계속해서 뒤쪽으로, 반대로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놈이 절벽까지 밀려나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파앗!
“읍!”
마침내 원익겸의 오른쪽 어깨에 검상을 욱여넣을 수 있었다.
어깨가 베여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할 수 없으니 그의 수비 또한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 빈틈 덕에 어깨에 이어 놈의 가슴과 허벅지에 기다란 상처가 새겨졌다.
“크아아!”
그 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혹은 패배를 직감한 분노 때문인지 원익겸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귀 아프니까 이만 죽어라.”
원익겸을 향해 마지막 일검을 내리그었다.
그 순간.
“장로님-!”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존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촤아악!
자성만마대주 혁상.
원래라면 놈이 끼어들 것까지 염두에 두었을 테지만 지금은 나 또한 크게 지친 상태. 그로 인해 내 마지막 일검이 원익겸 대신 혁상의 왼팔을 베어내는 데 그쳤다.
원익겸을 지키고자 끼어든 혁상은 왼팔의 상처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왔다.
카가강!
그 역시 만만치 않은 고수였기에 나는 하릴없이 놈의 공격을 쳐내면서 뒤로 훌쩍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수백의 무인들과 수라몽령시가 다시금 나를 덮쳐왔다.
‘하…….’
나도 모르게 절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주님!”
“진휘야!”
“유 소협!”
반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며 내 귓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참 빨리도 왔네.”
***
“문주님!”
“진휘야!”
“유 소협!”
백도산에서부터 전력을 다해 달려온 백의검대주 이자청과 홍야. 유씨세가주 유운호에 산서 무림의 무인들을 이끌기로 한 대송파의 장문인인 복지겸까지.
네 사람은 팔천협의 절벽 끝에 도달하자마자 가장 먼저 유진휘를 찾았다.
그러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절벽 사이의 협곡에 펼쳐져 있는 광경 때문이었다.
일천에 달하는 숫자라던 적들은 그 반 이상이 시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일견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고수임을 짐작할 수 있는 적들의 수장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다시 그 맞은 편에는 유진휘가 남아 있는 적들에게 에워싸인 채 여전히 검을 휘두르며 시체의 숫자를 차근차근 늘려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이게 대체…….”
“이 많은 숫자를 상대로 혼자서 저런 신위를 내보이다니.”
유진휘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일찍이 파악하고 있던 이자청이나 홍야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순간.
두 사람이 그럴진대 나머지는 너무 놀라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 유운호는 제 자식의 무위를 향한 감탄과 벅찬 희열. 동시에 피칠갑을 한 유진휘의 몸 상태를 향한 근심과 안타까움 등. 여러 감정이 뒤엉켜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진휘야-!”
그래서인지 절벽 밑으로 가장 먼저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 유운호를 뒤따라 홍야와 이자청 그리고 복지겸이 신형을 쏘았다.
네 사람을 시작으로 백의검대원들을 비롯한 산서 무림의 무인들 역시 재빨리 절벽 밑으로 내려앉아 포위망을 형성했다.
천을 넘어가는 그들의 등장에 유진휘만을 상대하고 있던 적들은 일순 혼란에 빠졌다.
“이런!”
원익겸을 부축하기 바쁘던 혁상 역시 절망감에 얼굴이 와락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만한 전력이 고작 저 어린놈 하나에게 발이 묶여 낭패를 보다니…….’
잠룡 유진휘.
마교주인 단룡위마저 경계하는 존재.
그런 존재를 업신여긴 대가이던가.
“큭큭. 설마 정말로 이곳이 본좌의 무덤이 될 줄이야.”
혁상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원익겸은 체념이라도 한 듯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자세를 바로잡았다.
비틀거리면서도 꼿꼿이 몸을 세워 검을 들어 올리는 그를 향해 혁상이 입을 놀렸다.
“후퇴하시죠, 장로님. 제가 퇴로를 뚫겠습니다.”
“후퇴? 후퇴 따윈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애초에 놈이 기다리던 원군이 나타난 이상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임무에 실패한 이상 교주님을 뵐 면목도 없고. 그러니…….”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원익겸의 시선은 오롯이 유진휘를 향해 있었다.
***
“후우.”
기다리던 아군의 등장으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던 나는 차분히 전세를 살폈다.
승기가 완전히 기울었음에도 여전히 맹렬한 기세를 뽐내고 있는 적들은 산서 무림의 무인들이 펼친 포위망에 둘러싸여 차근차근 정리되어가는 중이었다.
그 선두엔 이자청과 홍야. 그런 두 사람을 뒤따르는 백의검대원과.
‘아버지. 위 대주님.’
유운호와 금검대주 위사평이 유씨세가의 정예인 금검대를 이끌고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러가고 있었다.
아군 모두에게 수라몽령시를 상대하는 방법을 미리 일러두었던 만큼 별다른 문제 없이 적들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진득한 살기 하나가 나를 향해 쏘아졌다.
혈야검 원익겸.
미처 끝내지 못한 승부를 보자는 듯 그는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어마어마한 투기를 발산했다.
혈전을 이어가던 적아의 무인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줄 정도의 투기여서 나와 원익겸은 금방 서로 마주 설 수 있었다.
“말했지? 여기가 그쪽 무덤이 될 거라고.”
내가 픽 웃자 원익겸 역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냐. 기꺼이 죽어주마. 대신.”
쉬익!
순간 원익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내 눈앞까지 짓쳐들어와 검을 휘둘러왔다.
쩡!
검과 검이 달라붙으며 힘겨루기가 이어졌고.
“본교와 교주님을 위해서라도 네놈의 팔 한 짝 정도는 가져가야겠다.”
“해봐. 할 수 있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남아있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렸다.
***
“염랑대주가 검마를 뵙습니다.”
“환영비마대주가 검마를 뵙습니다.”
“수라마대주가 검마를 뵙습니다.”
세 중년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각자 대주급 지위에 오른 인극 고수들이었음에도 한 자루의 검을 쥔 채 오연히 서 있는 검마 앞에서는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전부 도착한 것인가?”
검마의 물음에 중년인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염랑대 천. 환영비마대 천. 수라마대가 천오백. 그리고 몽마 장로님께 위임받은 수라몽령시 팔백구까지. 전부 집결해있는 상황입니다.”
마교가 지닌 전력의 삼분지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숫자.
이 정도면 독고세가는 물론이고 아예 광동 무림을 모조리 집어삼킬 수 있는 숫자이기도 했다.
“가자. 노부가 앞장서마.”
검마의 명령에 세 명의 대주는 영광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마 혁천악(奕天樂).
실상 현 마교에서 교주인 단룡위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닌 이가 바로 그였다.
아니, 전대 마교의 생존자로서 현 마교에 합류한 이들인 세 명의 대주로서는 더더욱 혁천악을 향한 충성심이 높았다.
“충-!”
그런 세 사람을 위시한 검마가 마침내 독고세가의 장원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