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인 환생했다-143화 (143/150)

#143. 6장 격서(2)

힘겹게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방?’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와중에 몸 곳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과 피로감이 밀려들어 왔다.

팔천협에서 벌였던 혈전의 여파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을 집중하자 빠르게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혈야검 원익겸.

놈은 결국 내 검에 심장이 꿰뚫려 절명했다. 뒤따라 내공과 체력이 바닥난 나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것 같았다.

‘며칠이나 지났지? 상황은 무사히 마무리된 건가?’

의원의 보살핌을 받은 흔적이 있었기에 적어도 하루 이상은 쓰러져 있었을 터였다.

나는 빠르게 침상에서 벗어나 대충 옷가지를 챙겨 입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러자마자.

“도련님!”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왕삼이 문 앞에 선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몸은 좀 어떠세요? 어젯밤에 언 소저께서 직접 본가에 방문하여 도련님을 치료해 주셨는데 다행히 큰 상처는 없다고 하시긴 하셨거든요.”

언예령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반가움이 일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어서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데?”

“나흘이요.”

“놈들은?”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적들을 궤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게 다 도련님 덕분이죠. 그리고 그날 바로 가주님께서 정천맹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보고하셨고…….”

왕삼을 통해 지난 며칠간의 상황을 전해 들은 나는 일단 안도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산서 무림 연합회가 공식적으로 발족하기로 했고 연합회주의 자리를 아버지가 맡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산서 상인 연합회인 성화상회가 뒤를 받쳐줄 게 분명하니 산서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대신해 백의문을 이끄는 공손량 또한 아버지를 보조할 테고.

“정천맹에서 따로 연락은 없었어?”

내가 묻자 왕삼은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녀석의 품속에서 딸려 나온 건 한 장의 서찰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뜯어보면 흔적이 남게끔 굳게 밀봉된 상태.

“정천맹의 총군사님께서 보내오신 서찰입니다.”

나는 서찰을 받아 곧장 펼쳐 보였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방기광동(放棄廣東).

‘광동을 포기한다고?’

놈들의 진정한 비수는 광동을 향해 있었던 건가.

서찰엔 수천에 달하는 마인들이 검마 혁천악을 필두로 독고세가를 습격, 이를 사전에 파악했던 독고세가와 광동의 정파 무림이 맞서 싸우는 대신 광동을 포기한 채 후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었다.

‘검마는 역시 살아 있었나. 그가 나섰다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겠어.’

성동격서라는 놈들의 계책을 사전에 알아차렸다고는 하지만 검마가 모습을 드러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고 시간이 부족해 대비할 여력도 없었을 테니까.

패배가 자명하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독고세가와 광동의 정파 무림. 그 전력만으로는 놈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속절없이 죽어 나갈 바엔 후퇴하는 게 옳았다. 기세도 꺾이고 자존심도 무너져 내렸을 테지만 일단 살고 봐야지.

문제는 엄연한 정파의 영역이었던 광동이 마교의 손에 넘어갔다는 거였다.

독고세가가 무너져 내리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으나 결과적으로 초반 기세 싸움에서 밀렸다.

이는 정파 세력의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독고세가는 현 맹주인 독고태문의 가문이자 정파를 지탱하는 정파오주의 하나였다.

왕삼의 말에 따르면 이미 강호의 여론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고 했다. 마교가 부활한 것도 모자라 놈들의 기세에 밀려 광동을 손쉽게 내줬다는 여론이 대다수.

또한 광동에 존재하는 사파 세력들이 놈들에게 흡수될 가능성이 컸다. 과거에도 그랬듯, 정파를 증오하는 사파는 마교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이를 수습하고자 총군사인 묵가후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곧장 정천맹으로 복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 전에 앞서.

“염 장로님은 어디 계시지?”

염흥방과 염혜주. 그 외 북해빙궁의 무인들까지. 그들 역시 팔천협에서 적잖은 활약을 펼쳤었다.

그중 염흥방은 북해에서 한번 수라몽령시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엄청난 신위를 내보였다.

그들 덕분에 산서 무림인들의 피해가 줄어들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염 장로님과 그 일행은 먼저 정천맹으로 복귀하셨습니다. 마교의 위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아 하루빨리 이 사실을 북해빙궁에도 전해야 한다며…….”

정천맹과 동맹관계를 체결한 북해빙궁이었다. 염흥방을 통해 현 상황을 전해 듣게 된다면 빙궁 역시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려고 들 것이다.

‘광동을 빼앗긴 건 뼈아프지만, 인명피해가 크진 않으니 여론만 어떻게 잘 수습한다면…….’

묵가후라면 이미 대안을 내놓았으려나.

나는 곧장 떠날 채비를 하고자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

“뭐 하는 거야?”

적당히 가벼운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청로검과 묵마검을 챙겨 밖으로 나오자 이번엔 왕삼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니, 가로막았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화설?”

종화설. 그녀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런 몸 상태로 어딜 또 간다고?”

“…….”

왜인지 다소 격앙된 목소리여서 나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큰 상처는 없다고 하지만 최소 열흘 이상의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어. 산서에서 가장 저명한 의원이라고 알려진 언 소저의 당부야.”

내 도움으로 흑사방의 마수에서 벗어나 다시금 의원의 삶을 이어가게 된 언예령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산서 제일의 의원으로 거듭났던 것 같았다.

선우약가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녀의 의술 역시 뛰어난 편에 속해 있었으니까.

그런 언예령이 신신당부할 정도로 내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괜찮아.”

“억지야.”

“상황이 이러니 억지로라도 움직여야지.”

“하지만…….”

“열흘. 열흘이면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어. 정마대전은 이미 시작됐으니까.”

“그러는 너는?”

“나?”

“그래. 새롭게 부활한 마교의 위세가 전대 마교에 비할 정도라는데. 그런 몸 상태로 마교와 맞서겠다고?”

전대 마교에 비할 바라. 광동에 무혈입성한 덕분인지 현 마교의 위상이 크게 높아져 있는 상황인 듯싶었다.

상인인 종화설마저 크게 불안해하고 있을 정도로.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과장된 소문이야. 놈들은 결코 전대 마교만큼 강하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알아?”

“전대 마교와도 싸워봤으니까.”

천영검대주로서.

물론 유진휘는.

“소룡단원으로서.”

내 말에 이번에는 종화설이 입을 다물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그녀의 불안을 어느 정도 덜어주었던 것 같다.

“…정말 괜찮은 거지?”

“물론. 이래 봬도 천하십대고수잖아.”

짐짓 거드름 피우는 시늉을 보이자 마침내 종화설의 얼굴에도 미소가 서렸다.

“그러네. 천하십대고수였지.”

종화설은 그 미소와 함께 내게 한걸음 다가와 팔을 뻗었다. 이어 그녀의 손길이 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묵마검으로 향했다.

그녀가 잠시 꼼지락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묵마검의 손잡이에 적색 수실이 달렸다. 청로검에 달린 청색 수실과 한 쌍을 이루는.

“무사히 돌아와야 해. 기다릴게. 저번처럼.”

“그래.”

종화설과 잠시 시선을 맞춘 나는 이내 몸을 날렸다.

***

“당장 광동을 탈환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놈들의 기습적인 습격에 당해 후퇴했다고는 하지만, 광동은 오랫동안 정파의 땅이었던 지역입니다. 게다가 맹주님의 가문인 독고세가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듣자 하니 놈들이 독고세가의 현판을 일찌감치 반으로 쪼개 불태웠다고 합니다. 이 치욕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한 문파나 가문의 현판이 지니는 상징성은 그 세력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정파오주의 하나인 독고세가의 현판이었다.

명예와 자긍심을 중요시하는 정파인들로서는 깊이 분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

회의실의 상석에 앉아 있는 독고태문이나 그 옆에 시립해 있는 묵가후라고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맹주이자 독고세가의 가주인 독고태문의 속은 이미 넝마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독고태문은 그 심정을 숨기고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사안이 아니오.”

맹주의 진중한 음성에 열변을 토로하던 정천맹의 장로들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단번에 정리되자 묵가후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광동을 빼앗겨 정파 무림의 기세가 침체하긴 했지만, 반대로 저희 역시 산서에서 크나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크나큰 성과라면 어떤……?”

“혈야검. 과거 마교의 십장로 중 하나였던 혈야검 원익겸이 산서의 팔천협에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혈야검!”

“그자가 살아 있었단 말입니까?”

“혈야검뿐만 아니라 그가 이끌었던 자성만마대와 수라몽령시 역시…….”

묵가후는 산서에서 날아든 서찰에 적힌 보고를 토대로 유진휘와 산서 무림이 거둔 성과를 늘어놓았다.

이에 대한 소문은 곧 천하 각지로도 뻗어 나갈 것이다.

잠룡 유진휘. 그가 세운 공로 덕분에 광동을 빼앗겨 잃은 기세를 어느 정도 되찾아올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또한 북해빙궁의 궁주께서 저희를 위해 이천에 달하는 정예 고수들을 파견해 주기로 하셨습니다. 이는 강호의 평화를 위한 원조이자 동맹의 의지를 확고히 표명하는…….”

잠룡의 활약. 북해빙궁의 원조.

분노만이 가득했던 장내가 조금은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뿐. 중요한 건 앞으로의 계획이었다.

광동을 탈환하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전면전을 불사하느냐. 혹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중을 기울이느냐.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그중 가장 크게 거론되는 부분은 역시나.

“검마. 그자를 대체 누가 상대한단 말입니까?”

과거에 검신 백도천과의 대결에서도 비록 팔 하나가 잘려 나가긴 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인물이었다.

또한 과거에도 그랬듯 명실상부 현 마교의 이인자.

더하여 마교에는 몽마가 있었고 미처 파악하진 못했으나 그에 준하는 존재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정파 무림도 물론 동악검선이나 권왕 같은 고수를 보유하고 있지만, 검마를 상대한다고 전력이 광동에 집중되는 사이 또 다른 지역이 위기에 빠질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었다.

마교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만 있으면 놈들의 일부 전력이 광동에 상주하고 있는 지금 역으로 반격해 들어갔을 터인데.

‘전략적으로도 상황이 불리하다.’

교주 단룡위. 그의 곁에도 필시 자신에 버금가는 책사가 붙어 있을 거라는 게 묵가후의 판단이었다.

결국 회의가 내일까지 미뤄졌다.

뚜렷한 대안이나 결과가 마련될 때까진 계속 이어질 회의기도 했다.

이윽고 장로들 모두가 회의실을 빠져나가 장내에 독고태문과 묵가후 둘만이 남게 됐을 때였다.

천장의 어둠 속에서 신형 하나가 내려앉았다.

“회의에 함께 참석하지 그랬나?”

독고태문의 시선을 건네받은 나는 굳이,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참석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회의는 아니었잖습니까?”

내 말에 동의하듯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있었다. 물론 이 한 수가 뾰족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할 테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