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6장 격서(3)
“불허한다.”
독고태문이 눈에 불을 켰다. 그 옆에 서 있는 묵가후 역시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 계획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어째서요?”
이유를 묻자 독고태문이 그걸 몰라서 묻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너무 위험해. 불길 속에 뛰어드는 부나방 꼴이 될 게 뻔하다.”
“위험이야 당연히 감수해야죠. 상대가 다름 아닌 마교잖습니까.”
“그 위험을 왜 네가 홀로 감수한단 말이냐? 매번 이런 식이다. 마교는 분명 처단해야 할 적이지. 하지만 정천맹과 정파 무림이 다 함께 상대해야 할 적이야. 네가 혼자 짊어질 짐이 아니란 뜻이다.”
독고태문에 이어 묵가후 역시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지난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자네를 보면 천 대주가 떠오른다고. 천 대주는 마교를 향한 복수심과 증오심 때문에 주변은 물론 그 스스로마저 돌보지 못했어. 전대 맹주님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로 마교에 집착했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즉시 이해했다.
천영검대주 천우혁.
전생의 내가 바로 천우혁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확실히 그때의 나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내심 정천맹과 천영검대마저 복수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을 수도 있었다.
천마를 죽이고 마교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는 듯 앞뒤 가릴 것 없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결국 천마를 죽였고 정마대전은 정천맹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나 역시 목숨을 잃었다.
만족한 삶이었나 묻는다면.
‘모르겠군.’
지금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지만 내 손에 남은 건 허무함뿐이었다. 복수에 성공했다는 보람을 느낄 새도 없이 눈을 감아야 했으니 더욱 그랬다.
다만 죽지 않고 삶을 이어갔더라도 별반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유진휘로서의 삶은 썩 만족스러웠다.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며 걱정해주는 가족이 있었고 문주라며 나를 신뢰하고 따르는 수하들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 역시 그들을 의지하며 신뢰했다.
전생과 달리 주변의 소중함을 느꼈고 감사함을 느꼈다.
영문 모를 현상으로 유진휘의 몸에 깃들게 됐고, 그저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던 유진휘라는 사내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능하다면 남들보단 조금 빛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노력해왔을 뿐인데.
어느샌가 유진휘의 삶이 내 삶이 되었다.
그에게 소중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소중해졌다.
그랬기에 지금의 나는 전생과는 달랐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미쳐 날뛰는 천우혁이 아닌, 소중한 이들과 내 삶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든 감수할 만하지.
“광동으로 가겠습니다.”
“불허한다고 했다. 맹주로서의 명령이야.”
“지난 정마대전처럼 전쟁이 길어지면 강호 또한 또다시 큰 피해를 보게 될 겁니다. 수천. 수만. 어쩌면 그 이상이 죽어 나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독고태문이나 묵가후라고 그걸 모르겠는가.
장장 칠 년이었다.
칠 년 동안 이어졌던 지난 정마대전으로 인해 수많은 무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넋을 기리며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또다시 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피해를 보게 된다면 정파 무림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게 뻔했다.
유씨세가와 백의문. 성화상회를 비롯한 산서 무림까지 생각한다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교주 단룡위. 놈과 마교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닙니까?”
묵가후에게 의견을 물었다. 정천맹의 총군사로서 분명 나보다 뛰어난 혜안을 보유하고 있을 터였다.
“…부정하진 않겠네.”
그래. 그 역시 깨닫고 있을 것이다.
마교의 교주인 단룡위는 아직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본거지에 숨은 채로 계속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산서와 광동을 향한 성동격서의 계책은 그저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충분한 힘을 비축하고자 정파 무림의 혼란을 유도하는 한 수.
독고세가가 무너져 정파 무림이 혼란에 휩싸이고 어영부영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휘둘리는 사이, 놈들은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힘을 길러갈 것이다.
전대 마교의 생존자들을 끌어 모으고 수라몽령시의 숫자를 늘려가며 가능하다면 과거에도 그랬듯이 사파 무림마저 흡수하겠지.
내가 노리는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사파의 고수를 연기하며 마교 놈들에게 스며들 수만 있다면 확실히 그 내부에서 놈들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겠지. 하지만…….”
묵가후가 역시나 염려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발각될 경우, 자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네.”
해서 나는 옅게 웃었다.
“제가 쉽게 죽을 놈처럼 보이십니까?”
결국 묵가후가 백기를 들었다. 독고태문도 한숨과 함께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거란 걸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겠다는 건지 그 상세한 계획이나 먼저 들어보자.”
독고태문의 말에 나는 차근차근 속내의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다음 날에 곧장 특작부대가 꾸려졌다.
특작부대라고는 했지만 실상 그 인원 모두가 소룡단원들이었다.
소룡단주인 남지학을 비롯해 장진악은 물론이고 나와 함께 북해까지 다녀왔던 소룡단원 전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녀석들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광동으로 간다.”
검마 혁천악과 함께 수천에 달하는 마인들이 광동을 집어삼킨 마당이었다. 그런 광동으로 간다는 말에 녀석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희의 임무가 대체 뭡니까, 형님?”
고작 이 인원으로 광동을 습격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장진악은 그런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대답 대신 차례대로 남지학과 장진악. 그리고 나머지 소룡단원들에게 굳게 밀봉되어 있는 목함 하나씩을 전해주었다.
전날에 미리 묵가후로부터 보급받은 목함들이었다.
“열어봐.”
짧게 명령하자 녀석들이 하나둘씩 목함을 열어봤다. 그리고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인피면구? 그것도 최상급…….”
장인의 손길을 빌어야만 제작되는 인피면구는 그 가치가 수만 냥에서 수십만 냥까지 다양했다.
그중 최상급의 인피면구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묵가후의 말로는 정천맹의 보고를 탈탈 털어서 간신히 마련한 인피면구들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깨달아서였는지 소룡단원 녀석들의 얼굴이 잔뜩 진중해졌다. 이번 임무가 무척 중요하면서도 위험하다는 걸 인지했으리라.
“임무가 무엇인지 말하기에 앞서 물러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맹주님과 총군사님도 동의하신 일이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빠지고 싶은 사람은 지금 빠져. 아무도 탓하지 않으니까.”
임무에서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앞두게 되자 잠시 웅성거림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임무가 뭔지나 설명해줘.”
남지학이 담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머지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쓸데없는 권유였나?”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손에 들려 있는 인피면구를 천천히 뒤집어썼다.
***
광동의 패자였던 독고세가는 물론 광동에 자리 잡고 있던 정파 무림의 세력들이 모조리 사라진 상황이었다.
덕분에 그들의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사파 무림의 세력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광동성 우화현.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파 무림의 세력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업체를 점유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분란이 일어났다.
정파의 비호 아래 사업을 이어 나가고 있던 상인들로서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독고세가와 연이 닿아 우화현에서 가장 큰 객잔을 일으킬 수 있었던 홍관수(泓觀樹) 역시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매달 이윤의 칠할을 가져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대신 우화현에서 계속해서 객잔을 운영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니까?”
적호방(赤虎房).
현재 우화현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쳐가고 있는 사파 세력. 악독하기 그지없는 놈들의 마수가 홍관수와 우화객잔을 덮쳐온 것이다.
“칠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야. 거절해도 상관없다. 대신 거절하는 순간 밖에 대기하고 있는 애들이 어떤 짓을 벌일지는…….”
적호방주의 협박에 홍관수는 치를 떨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며 자기 삶에 만족하고 살아가던 홍관수였다.
한데 마교 놈들 덕분에 그 삶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들리는 말로는 사파 세력이 이미 마교 놈들에게 굴종했다고 했다. 즉, 적호방의 뒤에 마교가 있다는 뜻이었다.
‘왜 하필 광동이란 말이냐.’
홍관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적호방주가 내민 계약서를 끌어당겼다.
이대로 서명하면 노예 같은 삶을 살아갈게 불 보듯 뻔한 일이나, 서명하지 않으면 목이 달아날 판국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라 홍관수는 결국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마지막 한 글자를 남겨둔 시점에.
쾅!
굉음이 한차례 터져 나왔고.
“컥!”
고통에 겨운 비명이 뒤를 따랐다.
객잔의 입구에서부터 들려온 소란이었다.
삼 층 자리에 적호방주와 마주 앉아 있던 홍관수는 깜짝 놀라며 난간 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호방주 역시 마찬가지.
그런 두 사람의 시선에 웬 무리 하나가 객잔 일 층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적호방의 무인들을 때려눕히고 있는 게 보였다.
“웬 놈들이냐!”
적호방주는 크게 분노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에게서 진득한 살기와 기세가 단숨에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자 적호방의 무인들이 모조리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이게 뭔…….’
반대로 느닷없이 습격해온 무리는 옷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선 채 태산 같은 기개를 뿜어냈다.
대략 스무 명 남짓한 인원들이었다.
우화현에 저런 놈들이 존재하고 있었던가. 적호방주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인원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듯한 사내 하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사내와 눈이 마주친 적호방주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괴, 괴물.’
저런 기세를 지닌 존재는 일평생 만나본 적이 없다. 광동을 집어삼킨 마교의 인물과 마주했을 때도 주눅 들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한데 지금은 사지가 속박된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지도 못했다.
그리고.
“내려와. 목 아프니까.”
사내의 명령에 적호방주는 몸이 저절로 움직이듯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일 층에 내려앉자마자 곧장 시선을 내리깔았다.
“누, 누구십니까?”
그런 적호방주가 조심스레 묻자 사내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누구긴?”
바로 나였다.
아니, 지금은…….
“철룡문주.”
철룡문. 나와 소룡단 녀석들이 사파인임을 연기하기 위해 일으킨 문파.
“철룡문……?”
물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터였다. 마지막으로 듣게 될 이름이기도 했다.
콱!
“컥!”
나는 적호방주의 목을 움켜쥔 뒤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화객잔은 우리가 차지한다.”
“커, 커억!”
“불만은?”
“어, 없습니… 끄윽!”
손아귀에 힘을 주자 적호방주가 아등바등 발악하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우화현 일대에 철룡문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