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7장 특작(1)
“너, 넘기겠습니다.”
“저희가 졌습니다.”
“인정하오. 미양상단 운영권의 권리를 철룡문에…….”
적호방을 시작으로 우화현 일대의 크고 작은 사파 세력들을 정리해 나갔다.
대략 열흘. 열흘 만에 대부분이 꼬리를 말고 사업체를 넘기거나 끝까지 대항하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이 정도면 충분히 놈들의 눈에 띌 만한데요, 형님.”
현재는 중년인의 얼굴로 철룡문의 총관직을 겸하고 있는 장진악이 눈을 빛냈다. 총관인 주제에 사파 세력들을 정리해 나가는 동안 두 주먹으로 수백에 가까운 사파 무인들을 피떡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어느샌가 우화현에서는 그를 혈권(血拳)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덕분에 철룡문과 철룡문주인 내 명성도 뒤따라 상승하고 있었다.
한편 남지학은.
“금고에 벌써 수만 냥에 달하는 거금이…….”
객잔. 기루. 상단. 도박장. 하나둘씩 늘어나는 사업체에 사파 놈들에게서 몰수한 재산까지.
철룡문에 재물이 쌓여가기 시작하자 그는 몇몇 소룡단원을 데리고 밤낮 없는 경계를 자처했다.
“날뛰는 건 이쯤하고, 슬슬 기다리자고.”
“뭘 말입니까?”
“조만간 마교 놈들이 접촉해올 거야.”
지난 열흘간 사파 세력들을 정리해 나가면서 그 대부분이 이미 마교 놈들에게 굴복했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검마 혁천악 때문이었다. 검마의 위명은 정사를 막론하고 모두가 두려워 마지않을 정도이지 않던가.
게다가 마교 놈들은 사파 세력들을 흡수해 나가면서 필요시에 전쟁에 참여하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요구를 들먹이지 않았다고 했다.
정파라면 이를 가는 사파 놈들이 그 권유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터.
“부족한 전력을 메꿔줄 무인들. 마교 놈들이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그 전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반길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철룡문은 놈들의 목적에 딱 알맞은 먹잇감일 터였다.
“검마가 등장한다면 좋겠는데.”
나는 철룡문의 장원 중앙에 선 채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
“철룡문?”
독고세가의 장원이 있던 자리. 지금은 마교의 광동 지부로 탈바꿈된 그 건물 안에서 검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최근 우화현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문파라고 합니다. 한데 그 위세가 심상치 않아…….”
“위세가 어느 정도이길래?”
검마의 의아함이 더욱 커졌다.
웬만한 세력들은 아랫선에서 차례차례 흡수해 나가고 있지 않던가.
머지않아 광동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사파 세력들이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될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광동 지부의 지부장으로 채택된 염랑대주가 직접 보고서를 손에 쥐고 찾아왔다.
“철룡문은 등장한 지 고작 열흘 만에 우화현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적호방. 구광파. 혈비문 등. 우화현을 주름잡고 있던 사파 세력들조차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고요.”
다른 곳은 몰라도 적호방만큼은 검마도 익히 알고 있는 세력이었다.
적호방주 벽도필(碧刀筆)은 젊었을 적에 백대악인에도 속한 적이 있는 사파의 고수 중 하나였으니까.
현재는 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은 인극 고수이나 광동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던 독고세가의 기세에 눌려 숨을 죽이고 있던 자였다.
“적호방마저 집어삼켰다?”
“예. 소문에 따르면 적호방주는 철룡문주에게 별다른 대항조차 못 하고 일수에 압도되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
검마가 순간 입을 앙다물었다.
인극 고수를 일수에 제압해?
검마인 자신조차 적호방주를 일수에 제압하려면 나름대로 전력을 내보여야 할 수준이거늘.
“그런 실력자가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고?”
“그자 역시 독고세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흠.”
하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천하오주로 불리는 독고세가가 버티고 있는 광동에서 날뛰지는 못했겠지.
“그래서. 노부에게까지 보고가 올라온 이유는?”
철룡문주가 상당한 고수라는 건 알겠으나, 어쨌든 이 역시 아랫선에서 처리하면 그만인 문제였다.
한데 염랑대주의 표정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철룡문을 회유하고자 전령과 함께 염랑대원 오십 명을 보냈었는데… 놈들은 본교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령 하나만을 돌려보냈습니다.”
“미친 게로군.”
“해서 제가 직접 우화현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그전에 장로님께서도 알고 계셔야 할 사안인 것 같아…….”
현재 광동은 엄연히 마교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정파 세력은 모조리 사라졌고 마교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파 세력들이 활개를 치는 상황.
그런 마당에 자신들에게 굴복하길 거절했다는 건.
“노부가 직접 가지.”
“장, 장로님께서 말입니까?”
“거둘 수 있으면 거두고 아니라면…….”
순간 검마의 전신에서 은근한 살기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
“크으.”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술맛에 감탄한 장진악이 눈을 치떴다.
“이건 또 무슨 술이야?”
“몰라. 여기저기서 온갖 술을 사들여왔으니까.”
대답하는 남지학 역시 한 손엔 술병을, 한 손엔 안줏거리를 집어 든 채 희희낙락 휘청거렸다.
벌써 사 일째였다. 철룡문의 장원에선 매일같이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게 철룡문이 사파 문파임을 증명하기 위한 연극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군.’
내가 보기엔 한낱 촌극에 불과했지만.
공명정대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남지학과 술이라곤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마셔본 적이 없는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바로 소룡단이었다.
탁기를 배제하는 정종 무예를 익힌 덕에 식단에도 꾸준한 신경을 써야 했을 테니까.
그로 인해 겉보기엔 술에 잔뜩 취해 흥청망청하고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술이 들어가자마자 취기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그사이에 섞여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배를 채웠다.
이미 마교 놈들이 한차례 접촉해 왔다가 되돌아간 후였다.
자신들에게 굴복해 정마대전에서 공을 세우면 그에 걸맞은 보상을 내리겠다는 말에 조소와 함께 오십 명에 달하는 마인들의 목을 베었다.
‘염랑대의 복장이었었지.’
염랑대.
과거에도 전장에서 적잖은 명성을 떨쳤던 마교의 무력부대.
그 염랑대원 오십 명을 죽여 놓았으니 이다음은 어쩌면 염랑대주가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십이 아니라 그 몇 배에 달하는 전력을 이끈 채로.
‘이쯤에서 적당히 권유를 받아들일까.’
손에 쥔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며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온다.”
담벼락 너머. 저 먼 곳에서부터 날카로운 기세가 쏘아져 왔다. 대놓고 기세를 발산하는 존재 하나가 천천히 철룡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기세를 알아차린 소룡단 녀석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혀, 형님.”
장진악 역시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검마가 나설 줄이야.”
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사이, 반대로 소룡단 녀석들은 긴장감에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
번쩍!
한줄기 섬광이 터져 나왔다.
뒤따라 철룡문의 정문이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양쪽 기둥마저 두 동강 난 그 너머엔 외팔이 노인 하나가 검을 쥔 채 오롯이 서 있었다.
“왔으면 그냥 들어올 것이지. 왜 엄한 문을 부수고 지랄이야?”
나는 최대한 거칠고도 험악한 어조를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최상급 인피면구답게 그 표정 역시 자연스러웠다.
겉보기엔 험상궂은 얼굴의 중년인이자 철룡문주일 수밖에 없는 나와 눈이 마주친 검마는 말없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왔다.
뭉그적뭉그적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손에 쥔 술병을 앞으로 내밀었다.
“술 한 잔 얻어먹으러 오셨나?”
내가 씩 웃자 검마 또한 픽, 웃음을 흘리며 장원 안으로 걸어들어 왔다.
“노부의 수하들이 실례가 많았다더군.”
“아. 그 건방진 놈들이 영감의 수하셨수?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머리를 숙이라기에 화를 참지 못하고 죽여버렸는데.”
인피면구로 정체를 가렸고 내공을 이용해 목소리 또한 변조시켰다. 자연스럽게 피워 올린 기세에 최대한 흉포함과 살기를 담았다.
아무리 검마라도 지금의 나를 보고 유진휘를 떠올릴 순 없을 거라 장담한다.
“…확실히 건방질 말한 실력이긴 하구나.”
예상대로 검마는 나를 그저 느닷없이 등장한 사파의 고수로서 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뒤쪽에 포진하고 있는 소룡단 녀석들, 그러니까 철룡문의 제자들을 향해 꽂혔다.
“문파의 규모가 크진 않군.”
“내 문파에 쭉정이 따위는 필요 없거든.”
“흠.”
내 말에 검마는 마치 품평회에라도 나온 것처럼 인원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낌새를 보니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초리였다.
이어 그가 찬찬히 입을 놀렸다.
“어째서 본교의 제안을 거절했느냐?”
“말했잖아? 다짜고짜 찾아와서 머리를 숙이라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따를 놈이 어딨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니지.”
“노부의 수하들이 썩 고까웠나 보군. 내가 대신 사과하지.”
“…….”
검마의 입에서 사과라는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내심 당황했다.
“표정을 보니 노부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검마를 모를 리가 있나.”
“그렇다면 대화가 쉽겠군. 정식으로 제안하마. 본교를 따르거라. 단순한 칼받이 정도가 아니라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조해주마.”
“충성을 맹세하라?”
“물론 그 충성은 노부가 아닌 본교의 교주님을 향해야 하겠지.”
“얼굴도 본 적 없는 놈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니. 개소리 말고…….”
말을 이어가던 중.
쉭!
흐릿한 잔상이 허공을 가르는 게 보였다.
“읍!”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수비했고 이내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캉!
가공할 만한 한 수였다.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은 단순한 베기에 불과할 터인데, 상대를 벤다는 기준에서는 완전무결함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일검.
그 일검을 휘두른 검마가 어느새 내 코앞에 당도해 눈을 부라렸다.
“노부에겐 건방져도 되지만 교주님은 아니지. 다시금 방금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면 네놈은 물론이고 네 수하 놈들의 목숨까지 거둬가겠다.”
“영감 실력으로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물론 나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네놈이 정녕…….”
나와 검을 맞댄 채로 분노와 살기를 일으키던 검마가 순간 흠칫 얼어붙었다.
“이제야 알아차렸나?”
사락.
손바닥 크기로 잘려 나간 검마의 옷소매가 소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검을 휘둘러올 즘에 나 역시 검을 뽑아 한 차례 반격을 가했었으니까.
결국 장내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말없이 나와 눈빛을 교환한 검마는 천천히 검을 거둬들였다.
“원하는 게 뭔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검마를 따라 검을 회수한 나는 덤덤히 목적을 털어놨다.
“교주를 만나고 싶다. 그자가 충성을 맹세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기꺼이 따르지.”
“…….”
내 제안에 검마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신중히 고민하는 중일 터였다. 내 실력이 상당함을 알아차렸기에 더욱 고민이 될 테지.
그리고 마침내.
“나흘 뒤에 노부를 찾아오거라.”
“그러지.”
원하는 대답을 들은 나는 속으로나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