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7장 특작(3)
번쩍.
눈을 뜨자마자 나는 재빠르게 목덜미부터 더듬었다. 마교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한 탓에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인피면구는 내 얼굴에 여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정체는 아직 들키지 않은 것 같고.’
인피면구가 무사한 걸 확인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적당히 고급스럽고 적당히 규모가 큰 방 내부였는데,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객청으로 안내된 것 같았다.
침상에서 벗어난 나는 일단 방 한편에 놓여 있는 내 짐들을 챙겼다. 기절한 나를 이곳까지 옮겨놓으면서 내 짐들도 뒤져본 것 같았다.
짐이라고 해봐야 두 자루의 검과 비도 몇 자루 그리고 은자 몇 냥이 전부였으니 딱히 걱정할 부분은 없었다.
그때.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이어 안으로 들어오는 인영과 눈이 마주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야?”
철룡문주의 목소리로 거친 음성을 내뱉자 안으로 들어온 인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시비였다.
“죄송합니다. 깨어나셨는지 확인차 들른 것인데 방해가 되었다면…….”
“괜찮다. 온 김에 설명이나 해봐. 여기는 어디고 검마는 손님을 놔두고 어디로 사라졌으며 교주는 언제 만날 수 있는 건지.”
“아,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내가 탁자로 걸어가 자리를 잡자 그녀는 곧장 차를 한 잔 내왔다.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보건대, 일단 나는 엄연한 손님 대우를 받는 중이었다. 다만 내가 머무르고 있는 객청 주변으로 은밀한 인기척이 다수 느껴졌다.
손님이긴 하지만 동시에 감시를 늦출 수는 없다는 방증이겠지.
혈도도 여전히 제압당한 상태였다.
나는 시비가 내온 차를 홀짝이면서 귀는 그녀를 향했고 한편으로는 점혈해혈지법을 통해 몸 안의 혈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검마 장로님께서는 제게 귀한 손님을 모시고 온 참이니 시중을 드는 데 소홀함이 없게 하라며 당부하신 뒤로는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어디로 가신지는 저도 알 수 없고요.”
“그리고?”
“이곳에 머무시면서 여독을 풀고 계시면 장로님께서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망연히 기다리고만 있으라는 건가?”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필요는 없고.”
낌새를 보니 나를 감시하면서 철룡문주의 신변에 대한 확실한 조사를 실행할 심산인 것 같았다.
나로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번 셈이니 나름대로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알겠다. 나가봐.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 테니.”
“예.”
시비를 내보낸 나는 일단 점혈해혈지법에 집중하며 제압당했던 혈도를 모두 푸는 데 성공했다.
검마가 직접 손을 쓴 수법이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실력이 되돌아오자 건물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무인들의 인기척이 더욱 뚜렷하게 와닿았다.
‘스무 명. 전원 모두 절정고수.’
그 너머로 다시 진한 마기를 품고 있는 마인들의 숫자가 수천.
확실히 마교 내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철룡문주 장필소(壯必疏).”
마교의 총군사 직을 겸하고 있는 목마가 보고서 하나를 유심히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짧았다.
광동성 우화현 일대에 등장한 신진세력 철룡문. 그들은 등장하자마자 우화현 일대의 사파 세력들을 제거해나가며 불과 열흘 만에 주변을 장악했다.
철룡문주의 무위가 인극 고수 혹은 그 이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뒤져봐도 철룡문의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가 없었다.
알아낸 거라곤 고작 이름 하나가 다였다.
어디서 태어나 어디서 자랐으며 스승이나 사문은 누구이고 익힌 무공은 무엇인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인 양 아무런 정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입니다. 시기도 공교롭긴 마찬가지지요. 검마가 직접 검을 겨뤄봤다고 하니 실력은 확실하겠으나, 아무래도…….”
결국 목마가 부정적인 목소리로 보고서를 내려놨다. 그런 목마의 앞에는 교주 단룡위가 태사의에 팔을 괸 채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정천맹 측에서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수작이란 말에 단룡위의 입꼬리가 밀려 올라갔다.
“근거는?”
“최근 본교의 위치를 찾겠다며 천하 각지로 흩어졌던 정천맹의 전력들이 빠르게 하남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하오주의 무인들과 북해빙궁 쪽에서도 이천에 달하는 무인들을 중원으로 파견한 상황입니다.”
“묘하긴 하군. 전력이 한군데로 뭉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놈들이 집결하기 시작한 시점과 검마가 철룡문주를 데려온 시점이 맞물립니다.”
“…….”
목마의 말에 단룡위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안광이 번뜩이는 그 눈동자엔 진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본교의 위치가 드러났다는 뜻이로군.”
“정확하진 않지만, 대비는 해두어야 할 듯싶습니다. 여차하면 남해를 벗어나 이번엔 서장 쪽으로…….”
순간 목마가 입을 다물었다.
단룡위에게서 뻗어 나온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본거지를 옮기자. 그 말은 본좌로 하여금 도망이라도 치라는 말이더냐?”
“그런 의미가 아니오라…….”
“그래. 아니겠지. 감히 본좌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내뱉으라고 총군사 자리에 앉혀놓은 게 아니니까.”
“예.”
단룡위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목마가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그 틈에 단룡위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놈들이 정녕 본교를 향해 쳐들어오고자 힘을 한데 모으고 있는 거라면…….”
쿵!
자리에서 일어난 단룡위가 기세를 피워올리자 교주전이 한차례 진동을 일으켰다.
“하나로 모인 정파 세력을 이참에 짓밟아버리면 되겠구나. 중원으로 향하는 길목을 놈들의 피와 시체로 물들이겠다.”
정천맹과 전면전이 벌어져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룡위의 결심에 목마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남해가 확실합니다.”
확신에 가득 찬 묵가후의 목소리에 독고태문이 눈을 빛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교의 본거지였다.
“진휘의 신변은?”
본거지의 위치도 위치지만 독고태문은 유진휘의 신변이 염려스러웠다. 인피면구와 만리추종향을 뒤집어쓴 채 아무런 대안도 없이 적진 한복판으로 끌려간 상황이지 않은가.
묵가후의 심정도 독고태문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비선당의 무인들이 만리추종향을 추적하여 남해 인근까지는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만, 자칫 마교 놈들에게 발각될 우려가 있어 그 이상 뒤쫓고 있지는 못하는 상황입니다.”
“하면…….”
“당장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둘러 전력을 이끌고 남하하는 것뿐입니다.”
유진휘가 목숨까지 걸고 방향을 인도해주었다.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곧장 마교를 향해 진격하는 것뿐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맹주령을 발동하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정천맹의 모든 전력과 정천맹에 속해있는 정파 세력 모두에게 고한다. 마교를 향한 총공세를 펼치기 위해 남해로 향할 것이며 이번 싸움을 통해 정마대전의 종지부를 찍겠다.”
***
‘분위기가 묘한데.’
마교에 도착해 객청 안에 갇혀 지낸 지도 벌써 보름이었다.
보름째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찾아오는 이도 없이 나는 소향(小香)이라는 이름을 지닌 시비의 시중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오늘따라 건물 밖의 분위기가 유달리 부산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당장 나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스무 명의 절정고수들도 왜인지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침상 위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며 몸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
다시 한 시진 정도 흐르자 저녁 시간에 맞춰 소향이 식사를 내왔다.
한데 내 앞에 밥상을 내려놓는 소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걸 발견했다.
지난 보름간 내 말동무가 되어줄 사람이 그녀밖에 없어서 제법 친분을 쌓았던 터라 나는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예?”
“왜 잔뜩 굳어 있냐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어?”
“아뇨? 아닙니다.”
황급히 부정하며 손사래를 치는 모습마저 어색해 보였지만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니라면 됐고. 그보다, 검마나 교주에게선 아직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거야?”
“예. 아직 아무런 말씀도…….”
그 대답을 끝으로 소향은 한걸음 물러서서 내가 식사를 시작하길 기다렸다.
나는 덤덤히 밥상을 향해 시선을 옮겼고 찬 하나를 집어 들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딱 그 순간에 맞춰 소향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꿀꺽.
‘독인가?’
겉보기엔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음식이었는데 뱃속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특한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극의 경지에 도달한 내게 독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만독불침은 이미 수개월 전에 이루었다.
나는 묵묵히 밥상을 먹어 치운 뒤 소향을 쳐다봤다.
“소향아.”
“예.”
“너로선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른 거였겠지?”
“…….”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인피면구를 잡아 뜯었다. 철룡문주의 얼굴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원래의 내 모습이 자리를 잡았다.
소향은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뽑아내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
나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검을 뽑았고, 그대로 내리그었다.
반듯하게 잘려 나간 소향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걸 시작으로.
쾅!
객청의 정문이 부서지며 진한 마기를 머금은 무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건물 밖으로도 어느새 몇 겹의 포위망이 펼쳐진 채였다. 이내 마지막으로 내 앞에 내려앉은 인물은 다름 아닌 검마였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검마를 향해 조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알아차렸지?”
“본교의 총군사가 제법 현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네.”
맞네. 묵가후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마교에도 뛰어난 책사가 한 명 붙어 있는 것 같다고.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사이, 검마가 서늘한 살기를 풍겨왔다.
“반대로 노부는 일평생 검만 휘둘러왔기에 네놈의 계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실수를 범했지. 그러니 그 실수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그건 그렇다 치고. 교주는 어디에 있어? 이왕 정체가 들통난 김에 교주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불허한다. 정천맹의 전력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볼 심산인가 본데…….”
스릉!
검마가 뽑아낸 검이 서슬 퍼런 기운을 머금었다.
“네놈은 영영 교주님을 영접할 수 없을 게다. 게다가 교주님께선 이미 정천맹의 습격에 대비하고자 본교를 벗어났지. 교주님뿐만 아니라 본교의 모든 전력이 나섰으니 정천맹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라 장담한다.”
“…….”
계획이 들통났으니 남은 건 전면전뿐인가.
하지만 마교 놈들이 습격에 대비하며 함정 따위를 파놓기 시작한다면 시작부터 전세가 불리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챙!
나 역시 검을 뽑아 검마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엔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당신뿐이라는 거지?”
검마만 처리하면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는 데 무리가 없을 거란 판단에 나는 곧장 내공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