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8장 멸마(2)
적의 행동과 반응. 심리. 몸의 움직임과 내공의 흐름까지. 싸우는 도중에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한 수 앞을 내다본다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싸움의 구도 자체를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재림 만마앙복!”
그래. 날 에워싸고 있던 삼백 명의 마인들이 검마의 죽음에도 기죽지 않고 잔뜩 흉악한 기세를 내뿜으며 덤벼들 것까지 모조리 예상한 바였다.
“죽어라!”
쉭!
슬쩍 고개를 젖히자 눈앞으로 검날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검날을 통해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쳐흘렀다.
이 또한 좌측에서 적의 검이 날아들 것을 진즉에 알아차렸던 탓이다.
나는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검날 위의 내 얼굴을 마주 쳐다보다가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그 궤적을 뒤따라온 검 한 자루가 날 공격했던 놈의 뒤통수에 꽂혔다.
푸확!
동시에 몸을 휘돌리며 이기어검의 수로 허공에 떠 있던 검 한 자루를 쏘아 보냈다.
“마도천하의 첫 희…….”
그 공격은 이제 막 내게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잡아가던 마인 하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주먹만 한 관통상과 함께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시체를 바라보면서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뭐냐. 이 빌어먹을 감각은 대체.’
지극을 벗어나 천극의 경지에 도달한 건가 싶다가도 이렇게 느닷없이 다음 경지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건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또한.
‘천극의 경지가 맞긴 한 건가?’
천극의 경지는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천극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알려진 무인들은 기나긴 강호 역사 속에서도 몇 없다고 알려져 있었고 그조차 흔히 대종사라 불리는 먼 과거의 인물들뿐.
그렇기에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각이 천극에 도달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맞는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극의 경지는 벗어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솔직히 말해 이젠 누구와 싸워도 질 자신이 없었다. 상대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어떤 수를 내보이려는지, 어떻게 행동할지가 뻔히 보이는데 질 수가 있나.
마교의 이인자라는 검마마저 내 의도대로 움직여주다가 목이 잘려 나갔다.
만약 이러한 경지마저도 천극이 아니라면, 도리어 좌절감이 느껴지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촤악!
“컥!”
푹!
“크악!”
콰득!
“끄륵!”
속으로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나는 사방에서 쇄도해 들어오는 적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한걸음에 한 놈씩.
일검에 한 놈씩.
베고. 베고. 또 베고.
종국에는 이기어검은 물론 아무런 초식의 사용도 없이 순전히 검 한 자루만으로 적들을 상대해 내갔다.
내공도 마찬가지였다.
적들이나 나나 무림인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죽이는 데는 검 한 자루면 충분했다.
…적의 숫자가 많으니 두 자루로 할까.
나는 왼손엔 청로검을 오른손엔 묵마검을 움켜쥔 채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적의 진영 속으로 몸을 날렸다.
***
“이,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마지막 남은 적 하나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놈의 눈동자엔 나를 비롯해 내 뒤편에 깔린 삼백구의 시체가 비치고 있었다. 그 시체들 사이엔 검마의 시체까지 섞여 있을 터였다.
덕분인지 놈의 눈빛에 절망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마교의 마인들이 이러한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다. 전생을 통틀어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 앞에 주저앉아 몸을 떨어대고 있는 놈은 여실히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뭐가 두렵지?”
나직이 묻자, 놈은 점점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잠깐의 침묵 끝에.
“…네놈은 결코 교주님을 당해낼 수 없다.”
눈빛에 물들어 있는 감정과 상반되는 대답이 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놈일세.”
“닥쳐라. 교주님 또한 이미 네놈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셨다.”
“그래?”
단룡위 역시 마침내 지극의 경지를 벗어났다는 건가. 마교를 재건하여 스스로 천마가 되고자 하는 놈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놈은 자연의 섭리마저 거스르고 수백 년의 삶을 유지해오던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놈을 교주로 떠받들고 있는 마인들 입장에선 천마를 넘어 마신(魔神)이 재림했다고 여기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두려운 거겠지.
눈앞에 서 있는 내가 그 마신에게 대항할 만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검마와 함께 저세상에 가 있으면 머지않아 교주도 너희를 뒤따라갈 거다.”
“…….”
“그토록 꿈에 그리는 마도천하는 저세상에서 이루라고.”
푸욱!
나는 조소와 함께 마지막 한 놈의 목까지 베어낸 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
검마와 삼백 마인의 시체를 뒤로하고 객청을 빠져나오자 마교의 본거지인 성채 내부가 눈앞에 드리웠다.
이곳에 도착한 지는 벌써 보름이었지만 그동안 객청에 갇혀 지낸다고 밖으로 나와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그래도 본단이라고 규모가 방대했다.
다만 검마가 말했던 대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전력이 출전한 상황이라 주변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날 생각으로 신형을 날리려다가 문득 눈에 띄는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줄지어 늘어선 건물들 사이에 홀로 우뚝 솟아 지나치게 화려함을 뽐내고 있는 건물.
‘교주전인가?’
일견하기에도 교주전임이 확실한 그 건물을 바라보다가, 나는 곧장 신형을 쏘았다.
혹시나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떠나기 전에 한번 살펴볼 심산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나들며 빠르게 교주전 앞에 도착한 나는 기감을 확장해 먼저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교주전을 지키는 무인들이 거미줄처럼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나는 덤덤히 잠행술을 펼쳐 놈들의 경계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교주전 안에 진입했다.
뒤이어 펼쳐진 광경에선 별다른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넓고, 화려하지만, 어둠이 짙게 깔려 있고 그 끝엔 단룡위가 앉아있었을 태사의가 자리 잡은 채였다.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태사의 앞에 도달한 나는 딱히 아쉬울 건 없다는 심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는 찰나.
휭-
미세한 바람 소리가 귓가를 사로잡았다.
기감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지 않았다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미세한 소리였다. 나는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사의 뒤편 너머의 벽면.
그 앞으로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자 벽면 너머에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탁. 탁탁.
무슨 장치가 있을까 싶어 벽면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두드려보기도 하다가 마침내 숨겨진 입구를 개방시킬 수 있었다.
드륵.
벽면 일부가 반쯤 회전하다가 멈춰 섰고 나는 다시 그 어둠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자 공간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언가를 보관하기 위한 공간. 딱 그 정도 수준의 크기.
내공을 끌어올리자 어둠이 걷히며 공간 내부에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곧바로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반쯤 타다 만 한 권의 비급이었다.
천마의 무공이겠거니 싶어 그것을 주워들었다가 나는 흠칫 놀랐다.
역천이혼대법(逆天移魂大法).
‘그래. 이 대법 덕분에 본좌는 무한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놈이 제 입으로 털어놓았던 대법. 그 대법의 비급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을 줄은.
다만 반쯤 불에 타버린 덕분인지 내용이 반쯤 소실된 상태였다. 그래도 한번 살펴보긴 해야겠다 싶어 책장을 넘겼다.
대체 무슨 대법이기에 자연의 섭리마저 거스를 수 있게 해준단 말인가. 이딴 걸 창안해낸 원작자의 의도나 심리가 뭔지도 궁금했고.
그리고 그런 내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전진파(全眞派)?’
강호 역사에 문외한이던 나로서도 익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한때는 천하제일문으로 불리기도 했다던 도가 계열의 문파. 전진파의 제자들은 무인이라기보단 도인에 가까웠다는 말도 들었었다.
때문인지 그들은 천하제일문으로 불렸음에도 웬만해서는 강호의 일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신선 사상을 추구하는 수양에만 몰두하며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다가서고자 했는데 어째서인지 전진파가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들었다.
수백 년 전의 역사이니만큼 나로서는 그런 일이 벌어졌었구나, 여기고 있던 게 전부였다.
한데 역천이혼대법이 바로 그 전진파에서 파생된 대법이라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낱 인간에게 허락된 수명은 길어봐야 백 년.
그것만으로는 우화등선에 도달할 만한 수행을 쌓을 수 없다는 심정을 느낀 전진파의 도사 하나가 ‘이혼대법’을 창안한 것이다.
하지만 비급 말미에는 뒤늦게 그릇됨을 깨닫고 이혼대법을 봉인해두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잘못을 깨달은 순간 봉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애버렸어야 했음이다. 이 비급의 존재를 깨달은 제자 하나가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이 또한 내가…….]
불에 탄 흔적으로 내용이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단룡위.
헛된 욕망에 사로잡혔다던 전진파의 제자가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청루산맥입니다.”
천군지사대를 비롯한 정천맹의 모든 무력 부대와 천하 각지의 서른여덟 개 지부에서 차출한 무인들이 맹주인 독고태문을 위시한 채 청루산맥 초입에 도달했다.
“이곳만 넘으면 곧장 남해에 진입할 수 있다. 속도를 올릴 테니 다들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도록.”
산맥을 한차례 둘러보던 독고태문의 명령이 뒤따르는 전력들에까지 전해지자.
“충-!”
일만 명의 가까운 인원들이 한데 입을 모아 소리쳤다. 의기충천한 기세에 산맥 전체가 한차례 지진을 일으켰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리고 이내, 모든 전력이 초입을 지나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맥을 둘러싼 봉우리 중에서 그나마 길이 평탄하고 최대한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영루봉.
부챗살처럼 뻗어나가는 일만의 무인들이 그 영루봉을 뒤덮었다.
이대로 산을 넘어 내려가는데 이틀. 그 뒤로 남해까지는 다시 하루.
고작 사흘 뒤에는 마교를 향한 총공세를 펼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모두의 표정에 굳건한 결의가 깃든 채였다.
그런 그들이 한참을 내달려 영루봉 정상에 도착했을 때였다.
뒤편으로 뻗어있는 늦은 오후 날의 하늘을 풍경 삼아 웬 사내 하나가 홀로 정상의 중심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젊은 사내였다.
겉모습은 그랬지만.
“왔군.”
그 짧은 한마디에 담겨 있는 기세는 차원이 달랐다.
일만 명의 무인들이 한 사내에게 가로막혀 전진을 멈추었을 정도로.
순간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 천마.”
그 중얼거림에 사내의 입꼬리가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그래. 내가 천마다.”
천마 단룡위.
그가 미소를 짓자 하늘에 서서히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