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은 선비님-32화 (3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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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둡시다

거문고라, 가야금이라.

대체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이던가.

가죽으로 된 허물을 매만지기만 했는데도 벌써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군자였다.

당장이라도 이 오랜 벗들을 만나, 그 동안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구나.

···이 가죽 허물을 벗길 방법만 안다면 말이지.

다행히 군자의 팀원들은 허물 벗기기에 꽤나 능숙했다. 측면의 쇠 고리를 잡고 아래로 당기자,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악기가 눈에 들어왔다.

“오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문고였다.

선비의 소양이라는 금기서화(琴棋書畵), 그 중에서도 첫 번째에 위치한 것이 거문고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로 만든 몸통, 그 위에 얹은 여섯 줄의 두꺼운 현.

세부적인 모양새는 군자의 기억과 조금 다른 면이 있었지만, 커다란 부분은 300년 전의 거문고와 같았다.

군자는 가만히 거문고의 몸통을 만져 보았다.

표면은 싸늘했으나, 텅 빈 울림통 안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그 목소리에 홀리기라도 한 듯, 군자가 바닥에 착석하며 거문고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군자 너, 설마 거문고도 할 수 있···.”

“쉿.”

장민기가 군자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차인혁이 재빨리 막았다.

“집중하게 해 주자.”

“어, 그, 그래.”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군자가 조용히 술대(거문고를 뜯기 위해 사용하는 작은 막대)를 잡았다.

술대를 잡은 오른손은 거문고의 머리쪽에, 남은 왼손은 여섯 현 위에 살포시 얹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고결하여, 군자가 첫 음을 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둥, 두웅-.

이윽고 군자가 거문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외딴 음으로부터 시작한 거문고 산조(散調)는, 단조풍의 멜로디를 만들어 가며 악기실을 채워 나갔다.

오른손의 술대로 현을 뜯으며, 왼손으로는 굵은 현을 지그시 어르고 달래며.

군자는 마치 붕우(朋友)와 오랜만에 재회한 것 같은 감회를 느꼈다.

둥, 두웅, 둥-.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시간을 건너뛰어 오기 전엔 매일을 함께 해 오던 거문고다.

숙부 때문에 반쯤은 강제로 시작하게 된 악기였지만, 처음 현을 퉁기는 순간 군자는 거문고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음악이라면 치를 떨었던 숙부 유형원도, 거문고만큼은 선비의 기본 자질이라 하며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군자가 정해진 음율을 따르지 않고 즉흥곡을 연주할 때엔, 잡스러운 짓거리를 한다며 모진 회초리질을 하기도 했지만.

이 세상엔 그를 억압하던 숙부도, 그를 가두어 둘 뒤주도 없었다.

그러나, 군자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거문고만큼은 3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찌 흥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둥, 두둥, 두웅-.

옅은 미소와 함께 템포는 점점 빨라졌다.

진양조에서 중모리, 중중모리를 거쳐 자진모리에 이르기까지.

곡조가 심화될수록 점점 빠르기를 더해 가는 산조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연주.

군자가 현을 뜯을 때마다, 팀원들의 눈앞엔 심산유곡(深山幽谷)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낭창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는 선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저 형 진짜 정체가 뭐지?”

그러나 군자의 연주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둥, 타악, 타닥, 탁-.

술대로 현을 뜯는 대신, 그것으로 거문고의 몸통을 두드리며 마치 타악기처럼 거문고를 다룬다.

마치 현대의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들이 기타의 몸통을 두들기며 연주하는 ‘퍼커션’ 기법을 거문고에 적용한 듯.

산조의 멜로디에 경쾌한 타악기 리듬까지 합세하자 곡조에 입체감이 더해졌다.

“와아···.”

“···미쳤네 진짜.”

숙부는 잡스러운 연주법이라 하며 경을 쳤으나, 군자는 이 방법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거문고는 소중한 악기임과 동시에 그의 친구였다. 친구와 더 재미있게 놀 방법을 찾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거문고 산조는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장단은 휘모리에 도달했고, 동료들의 눈앞에 펼쳐진 심산유곡은 어느새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정점을 찍은 거문고 연주가 다시 천천히 차분함을 되찾았고.

은은한 미소와 함께, 군자가 마지막 현을 뜯은 순간.

“와아아아아악-!”

“뭐야, 뭐야? 어? 진짜 뭔데?”

“당신 정체가 뭐냐고오-.”

또 한번 우르르 몰려온 동료들의 등쌀에, 군자는 빈대떡처럼 짜부라져 버렸다.

참 희한한 친구들 아닌가.

검무 때도 그랬지만, 거문고야말로 선비의 기본 자질일진대.

거문고 연주 좀 했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모처럼 신나게 거문고를 갖고 놀았지만 군자의 마음 속엔 아직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저기 세워진 저것이 가야금이라고 했었지.

‘선비의 악기’라는 별칭처럼, 거문고는 300년 전의 선비들에게 널리 사랑받던 악기였다.

그러나 가야금은 조금 달랐다. 일반적으로는 기루(妓樓)의 기생들이 양반을 위해 연주하는 악기라는 인식이 강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가야금을 즐겼던 선비들이 종종 있었으나, 숙부 유형원이 군자에게 그런 일탈을 허용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군자는 숙부의 눈을 피해 틈틈이 가야금을 익혔다. 기생들에게 시조를 가르쳐 주고, 대신 가야금 뜯는 법을 배웠다.

청아하고 나긋하며 때로는 구슬프기까지 한 가야금 소리는, 낮고 강직한 거문고와 또다른 매력이 있었다.

“이것도 한번-.”

“너 가야금도 할 줄 알아?”

“열어 줘···.”

군자의 간절한 부탁에 동료들이 허겁지겁 가야금 케이스를 열어 그의 앞에 악기를 대령했다.

가죽 케이스 안에서 가야금이 튀어나오자, 군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 주저앉아 가야금을 뜯기 시작했다.

둥, 두웅, 다앙-.

“우와-.”

“소리 너무 좋은데.”

가야금은 확실히 거문고와 다른 소리가 났다. 훨씬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속성의 소리. 거문고 소리가 소나무 같았다면, 가야금은 마치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를 떠오르게 했다.

소리 뿐만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는 군자의 모습도 조금 달랐다.

술대로 강인하게 현을 내려치던 모습은 씻은 듯 사라졌으며, 대신 빈 손이 된 오른손이 열두 개의 현을 어르고 달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동료들은 모두 그 아름답고 구슬픈 소리에 몸을 맡겼다. 특히 지현수는 아예 눈까지 반쯤 풀린 채 군자의 모습에 완전히 몰입한 것 같았다.

“···아름다워···.”

군자 역시 가야금 연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거문고가 오랜 친구였다면, 가야금은 운명의 방해로 만날 수 없었던 연인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마음이 너무도 크기에, 이렇게 재회를 할 때마다 기어코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행복하구나, 이 악기들이 현대에도 남아 있다니!

어느새 가야금까지 한 곡조 뽑아내고 난 뒤.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동료들이 모두 턱을 괸 채 군자의 연주에 몰입해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너무 아름다워···.”

지현수는 거의 정신이 나간 것 같았고.

차인혁은 살짝 눈물까지 흘린 듯 빨개진 코를 거세게 비벼 대고 있었다.

괜히 민망해진 군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지현수에게 말을 걸었다.

“그, 뭐··· 영감은 조금 떠올랐는지.”

“너무.”

“음?”

“너무, 너무, 너무 많이 떠올라 버렸어.”

참으로 부담스러운 눈빛이지만, 그래도 영감을 떠올리는 데에 도움이 됐다니 다행 아닌가. 군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힌 혈도가 뚫리기라도 한 듯, 의견 교환이 다시 활발해졌다.

가장 먼저 지현수가 입을 열었다.

“먼저 거문고 소리를 듣고 느낀 건데,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라고 하잖아. 그치?”

“그래, 맞다.”

“그래서 그랬는진 모르겠는데··· 스스로의 품행을 점검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정갈함이 느껴졌거든.”

“!”

이번엔 지현수의 통찰력에 군자가 놀랐다.

현수의 말은 정답에 가까웠다. 거문고를 뜯으며, 그 소리를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정갈하게 하는 것이 선비의 일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거문고가 꼭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더라고.”

“말을 건다라?”

“응. 너 임마, 똑바로 살고 있는 거 맞아? 젊은 친구, 예의 있게 행동해! 이런 식으로. 소리가 너무 정갈하니까, 나 스스로가 좀 뜨끔하게 되는 기분이랄까···.”

“이상하네, 분명 이상한 말인데 왜 알 것 같지?”

“그치? 현재 너도 그렇게 느꼈지?”

“넵, 난 완전 공감이요.”

현재가 동조를 표했고, 인혁과 민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느꼈던 그 느낌을 아예 곡의 주제로 가져가면 어떨까?”

“주제로요? 어떻게요?”

지현수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이트보드를 향해 갔다.

“이런 식으로···.”

보드마카를 꺼내 든 지현수는 화이트보드 위에 자신의 생각을 크게 적어 넣었다.

[예의없는 것들]

“예의없는 것들?”

“응, 세상에 예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 그냥 보고만 있어도 열받게 만드는.”

“그건 맞지.”

“힙합이라고 무조건 엄한 데에 분노를 쏟지 말고, 진짜 화 나는 사람들한테 화를 내 보자는 거야. 사람들도 그런 가사에 더 공감할 걸?”

이번엔 군자도 동의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현대로 건너오며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유교 사상이 많이 희석된 것이야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할 만큼 황당한 경우도 꽤나 겪었으니까.

“얼마 전, 편의점에서 점원에게 천 원 짜리 지폐를 던지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와, 그거 열 받지. 왜 계산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해?”

“그래, 어떻게 퇴계 선생님의 초상화를 그렇게 집어 던질 수가 있는 건지···.”

“···군자 형은 좀 다른 포인트에서 화가 난 것 같네요?”

모두의 의견이 순조롭게 하나로 모였다. 예의 없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도 너무 많았으니까.

그런데 그 때, 잠자코 있던 인혁이 입을 열었다.

“현수.”

“넵, 형.”

“그런데 저 주제는 예의, 예의··· 푸훕-.”

“···?”

“아, 미안.”

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던 차인혁이, 다시 호흡을 고르며 말을 이어 갔다.

“‘예의, 예의, 예의가 없구나’의 연장선상이다.”

“···.”

“확실히 재미는 있어. 공감도 되고.”

“···.”

“하지만, 이미 했던 이야기를 똑같은 방식으로 또 하는 건 난 반대야.”

군자가 듣기에도 인혁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똑같은 것을 두 번 한다면 그만큼 신선도는 떨어질 테니까.

그러나 지현수는 이미 이런 반론을 예상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아요.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는 건 나도 절대 반대예요. 그러니까 방식을 바꿔야죠.”

“어떻게···.”

“방금 군자의 연주, 그걸 샘플링해서 비트를 찍어 볼 생각이에요.”

“거문고랑 가야금을 샘플링해서 힙합 비트를 만든다고?”

“네.”

“‘작두’나 ‘응 프리스타일’처럼 말이지?”

“오, 그건 신선할 것 같은데.”

“그냥 비트만 국악기로 찍는 게 아니라, 아예 라이브 연주까지 하는 거예요. 루프 스테이션을 이용하면, 거문고랑 가야금 세션만 군자가 라이브로 직접 연주하는 퍼포먼스도 가능하니까.”

“와, 무대 위에서 루프 스테이션까지 쓴다고?”

“그건 진짜 멋지겠는데?”

잠시 어두웠던 동료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샘플링이니, 루프 스테이션이니···.

군자에겐 알아듣기 힘든 말들 투성이였으나 그냥 적당히 분위기에 맞춰서 웃었다. 어쨌거나 뭔가 잘 풀려 가고 있는 분위기였으니까.

“헤헤, 이게 다 군자 덕분이죠.”

“하하, 내 덕분은 무슨.”

“헤헤, 아냐. 네가 나한테 영감을 줬어.”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덕담이 오갔다. 이대로라면 이번 미션도 잘 풀리려나 싶은 군자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지현수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꺼냈다.

“그럼 이제 스튜디오로 가 볼까?”

“스, 스튜디오?”

“응, 샘플링 하려면 일단 가녹음부터 해야 하니까.”

스튜디오라는 말에 군자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스튜디오라면 분명 영은채 트레이너님이 날 가둬 두겠다고 했던 그 곳인데?

“그, 서, 설마 날 가두려는 건···.”

“어? 어떻게 알았어?”

“—!?”

“흐흐, 만족스런 샘플 나올 때까지 안 풀어 줄 거야.”

“···나는 그건 싫은···.”

“왜 이래, 빨리 가자아.”

“아, 안 된다—!!”

후다닥 도망치려던 군자를 차인혁이 잡아 어깨에 번쩍 짊어졌다.

“으으, 제발 뒤주만큼은···!”

발버둥을 쳐 봐야 소용없었다. 이제 꼼짝없이 스튜디오라는 뒤주에 갇히게 생겼구나!

그렇게 도착한 뒤주엔, 아니나다를까 영은채 트레이너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흐흐··· 뭐··· 녹음··· 하러··· 오셨나 봐요···.”

“넵, 거문고랑 가야금 좀 녹음하려고요.”

“···거문고··· 가야금··· 설마··· 군자 님이···?”

“헤헤, 넵.”

“···빨리··· 빨리 가둡시다···.”

“좋죠.”

그렇게, 두 명의 미친 작곡가가 군자를 스튜디오 안에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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