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은 선비님-62화 (62/303)

#62

우리의 컨셉은

무대 아래의 연지는 오늘도 두 손을 모은 채 반쯤 울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위험했다. 정말로 현장 방청권을 구하지 못할 뻔 했다.

처음으로 추첨에 실패하여 좌절한 연지였다. 암표라도 구해야 하나,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런데 운이 좋은 건지 뭔지, 추가로 50개의 좌석이 더 열렸다. 그 덕에 이번에도 현장을 지킬 수 있었다.

첫 번째 무대가 시작하자 마자, 연지의 눈엔 눈물이 핑 고였다.

단조풍의 걸그룹 노래 를 보컬 위주로 편곡하다니.

그 도전적인 시도만으로도 손뼉이 닳아 없어지도록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 심지어 좋다. 고막이 살살 녹을 만큼 너무 너무 좋다.

리온이나 파엘처럼, 연지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팀 동료들이 군자의 창법을 따라하고 있다는 것을.

고도로 진화한 덕후는 전문가와 구별할 수 없다고 했다. 이미 군자의 창법이나 호흡법까지 나노 단위로 분석한 연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팀원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게 해야 이 편곡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그 계산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1절 후렴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많은 방청객들이 무대에 과몰입한 듯 코를 훌쩍이고 있었으니까.

비밀스러운 사랑이라, 어릴 땐 누구든 그런 사랑 한번쯤은 해 보잖아.

연지도 괜히 옛날 생각이 떠올라 코를 쓱 만졌다.

“그런 적도 있었지.”

그러나 과거는 어찌 됐든 괜찮았다. 이제는 군자가 있었으니까.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군자만 보아도 행복한 연지였다.

1절이 끝난 순간부터 동선 변화가 시작됐다. 나무 소품 아래로 이동한 군자의 손엔 어느새 비파가 들려 있었다.

꺄악-.

군자가 악기를 들자, 몇몇 팬들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연지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유군자가 악기를? 이건 못 참는다.

이미 <예의없는 것들>의 거문고와 가야금 연주에서 감동을 받은 연지였다. 그렇기에 비파 연주도 당연히 좋을 거라 생각했다.

다앙, 다아앙-.

알고 있었는데, 분명 예상했던 것이었는데.

당, 다앙, 다당, 다아앙—···.

생각보다도 훨씬 좋았다.

처연한 의 멜로디와 비파의 음색은 찰떡궁합을 너머 혼연일체 같았다.

사실 1절부터 음원에 포함되어 있던 비파 소리였으나, 군자의 라이브 연주로 들으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길다란 손가락이 움직이며 다섯 현을 건드릴 때마다 등골에 계속 전율이 일었다. 그 음색과 분위기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여섯 소년의 군무도 좋았다.

솔직히, 무대 위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치 이 무대가 연지를 과거의 어느 한 장면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나 진짜 미쳤나 봐···.”

나만 이렇게 좋은 건가. 팬심이 지나쳐서 무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된 건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연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두 손을 모은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에 괜히 연지의 어깨가 올라갔다. 꼭 연지 본인이 승리한 것처럼 가슴이 뿌듯했다.

이제 군자는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참가자가 된 거다.

이제 겨우 첫 번째 곡의 절반 정도가 지나갔지만, 연지는 벌써부터 아쉬웠다. 무대가 끝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좋았으니까. 그러나 노래는 순식간에 흘러갔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던 비파 연주가 끝나고, 어느덧 노래는 2절로 접어들었다. 2절의 첫 벌스는 현수의 차지였다.

하지만 1절처럼 혼자서 벌스를 온전히 소화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이번엔 섬세한 화음이 가사 곳곳을 채웠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보컬의 스펙트럼이 넓은 ‘일곱 선비들’이었기에 가능한 구성.

인혁의 탄탄한 베이스가 저음부를 채우면, 높은 목소리를 가진 유찬과 현재가 그 위에서 뛰어 놀았다.

평소엔 거친 호흡 때문에 튀었던 태웅의 보컬도, 안무 없이 노래에만 집중하니 제법 듣기 좋은 소리가 됐다.

본격적으로 화음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감정 역시 함께 고조됐다.

아카시아의 꽃말처럼 비밀스런 사랑을 노래한 지만,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화자는 비밀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더 이상 혼자서만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없다는 듯, 속삭이던 노랫소리는 커다란 외침으로 바뀐다.

‘일곱 선비들’의 노래 역시 그에 맞게 호소력을 더해 갔다.

Like Acacia,

혼자 간직한 비밀처럼-.

두번째 후렴은 더욱 강렬하게 터져 나왔다. 화음 역시 한 단계 더 쌓이며, 고조된 감정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냈다.

서로 눈과 눈을 마주치며, 손동작으로 셈여림을 맞춰 가며.

무대 위의 일곱 소년들은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나갔다.

이미 보컬로만 무대를 채워 본 적 있는 리온과 파엘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무대인지.

일곱 명의 끝음 처리하는 방식이 똑같다. 발성에 섞인 숨소리의 비율도 똑같다. 그렇기에 음이 끝나는 지점에서도 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 않는다. 숨이 풍부하게 섞인 목소리는 마찰하지 않으며 거품처럼 부드럽게 섞인다.

뭐가 두려운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 분들, 진짜 연습 귀신들이구나.”

“그렇다니까.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지독한 친구들이야.”

후렴이 고조됨과 동시에, ‘일곱 선비들’ 멤버들이 단상을 내려와 무대 앞을 향해 걸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선비들의 모습에, 방청객들의 몸도 함께 앞으로 기울었다.

이제 노래는 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브릿지에 이르렀다.

독야청청 멤버들 앞에 선 군자가, 담담하게 브릿지의 가사를 읊어 나갔다.

언젠간 내 기척이 들릴 수 있게.

그대가 내 향기를 느낄 수 있게.

마음을 전달하듯 내뱉은 가사가 관객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코러스를 담당한 인혁, 태웅의 풍부한 저음이 아래에 깔리는 동안, 현재와 유찬 역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군자 옆에 나란히 선 유찬과 현재가 마이크를 꽉 쥐었다.

그런 날이 온다면-.

마침내 터져 나오는 노래의 최고음.

Like Acacia—!

깔끔하고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군자의 정음, 그 3도 아래에 유찬이 감미로운 화음을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쌓은 현재의 초고음 화음. 3옥타브에 이르는 하이 노트에도 현재의 보컬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아아—···.

시작점부터 바이브레이션의 펄스(주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끝음 처리 역시 어긋남이 없었다.

음 끌기를 마친 순간, 고음을 담당한 세 사람은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마침내 완벽한 호흡을 만들어 낸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마약 같은 쾌감.

절정부를 깔끔하게 처리한 군자, 유찬, 현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세 사람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해냈다, 그것도 이렇게 완벽하게.

그러나 무대 아래의 팬들은 웃을 여유도 없어 보였다.

이미 ‘일곱 선비들’을 응원하는 팬들 중 절반 이상이 눈물범벅이었다. 짜릿한 고음의 절정부는 감동 이상의 것을 선물했다.

단순히 고음만 지르는 성대 차력쇼가 아니다. 노래의 감성을 해치지 않으며, 담백한 호흡으로 만들어 낸 절정이다. 팬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흐흑···.”

“군자야, 현재야···.”

“나 진짜 어떡해-.”

브릿지까지 완벽하게 해낸 일곱 선비들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이젠 팬들 역시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Like Acacia,

혼자 했던 그 다짐처럼-.

모두가 소리 높여 후렴을 합창했다. 관객석에 앉은 원곡자 ‘포니타’ 멤버들도, 군자와 일곱 선비들의 팬도, 심지어 상대 팀을 응원하러 온 관객들까지도.

나 두렵지 않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이 숨겨진 명곡의 후렴을 따라 불렀다.

목소리에 목소리가 더해지자 무대는 자연스레 웅장해졌다. ‘포니타’ 멤버들은 감격에 눈물, 콧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최악의 발매 시기 때문에 묻혀 버린 비운의 노래 가, 일곱 선비들의 목소리를 통해 완벽하게 되살아났다.

“흑흑, 우리, 사장님이, 좋아하시겠다, 그치이-.”

“···흐엉, 언니, 나 너무 좋아···.”

연지를 비롯한 군자의 팬들은 이미 과몰입을 넘어선 초 과몰입 상태였다.

목청 높여 후렴을 제창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이젠 자랑스러운 감정을 넘어서, 노래 속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에 질투마저 날 지경이었다.

의 화자는 누군가를 비밀스럽게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그 마음을 숨기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 노래의 절정부.

너무도 뛰어난 호소력 덕분에, 는 마치 일곱 선비들의 자전적 이야기처럼 들렸다.

대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이가 누굴까.

후렴이 반복될수록 그 호기심 역시 함께 커졌다. 터무니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과몰입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어느덧 비파 소리로 이루어진 의 메인 멜로디가 사라지고, 반주엔 둥둥 울리는 타악기만이 남았다.

그 텅 빈 공간을, 일곱 선비들의 아카펠라와 관객들의 떼창이 가득 메웠다.

Like Acacia,

혼자 했던 그 다짐처럼-.

나 두렵지 않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반주가 사라졌음에도 소년들의 합창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수많은 관객들의 제창이 일곱 개의 목소리를 뒷받침했다.

그렇게 마지막 후렴까지 아카펠라로 멋지게 마무리한 뒤.

두웅, 두웅-.

이제 무대 위에는 낮게 울리는 북 소리만이 남았다.

가 관객들의 마음을 쥐고 흔들어 놓았다. 호소력으로 똘똘 뭉친 무대는 군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관객마저 눈물을 찔끔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군자와 일곱 선비들의 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의 심장은, 마치 이 큰북소리처럼 고막 안쪽을 울려 댔다.

두웅, 두웅-.

안쪽에선 심장 박동, 밖에선 큰북 소리.

팬들의 몸은 안팎에서 둥둥 울렸다. 어느덧 심박은 큰북 소리와 합세하여 더 큰 울림이 됐다.

두웅, 두웅, 두우웅—···.

첫 번째 공연이 끝났음에도, 큰북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울려 퍼지며 무대 전체를 장악해 나갔다.

마치 이 무대를 본 팬들의 심장 소리를 표현하듯.

혹은 아직도 심박이 솟구칠 만한 장면들이 남아 있다는 듯.

“···뭐야, 뭐야?”

“아직 안 끝난 건가?”

“두 번째 곡도 있다고 했는데···.”

“끊고 가는 거 아니었어?”

그 순간.

무대 전체가 암전되며, 큰북 소리에 태평소 소리가 더해졌다.

“—!!”

마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한, 길게 쭉 뻗는 태평소 소리.

동시에 무대 후방의 LED가 밝아지며, ‘일곱 선비들’의 두 번째 창작곡 제목이 공개됐다.

[Concept : 忠]

“커, 컨셉충!?”

동시에, 무대 위에 피 같이 붉은 조명이 떨어졌다. 어느새, 무대 위엔 거대한 깃발을 꼬나든 관군 복장의 댄서들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깃발의 길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일곱 선비들.

커다란 깃발엔 모두 ‘충성 충(忠)’ 자가 쓰여 있었고.

“그래, 우리 컨셉은 충!”

경례와 함께 군자가 내뱉은 첫 가사에, 주하성의 눈이 새하얗게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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