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은 선비님-63화 (63/303)

#63

주립(朱笠)

첫 번째 무대 가 끝나자 마자 모든 조명은 완전히 암전됐다.

남은 것은 둥둥 울리는 큰북 소리 뿐.

웅장한 큰북 소리가 무대 전환의 복선이었다.

첫 번째 곡과 두 번째 곡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무대를 연출하기로 한 ‘일곱 선비들’이었다.

그러나 대책 없이 무대 두개를 이어 붙이기만 한다고 연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발라드 곡에서 강렬한 비트의 힙합 베이스 곡으로.

이 급격한 전환을 자연스레 연결하기 위해선, 무대와 무대 사이에도 무대가 필요했다.

“흐음, 이 사이에 뭘 좀 넣었으면 좋겠는데···.”

“수문장 교대식을 모티브로 해 보는 건 어떨까?”

“수문장 교대식?”

“어. 유튜브에서 봤는데, 꽤 멋지더라고.”

그 때, 태웅이 낸 아이디어가 바로 ‘수문장 교대식’.

조선시대의 수문장 교대를 재현하여 아직까지도 경복궁 등 궁궐 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 의례(儀禮)는, 그 동양적인 분위기 덕에 외국인들에게도 꽤나 인기가 있었다.

물론 군자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이 살던 시대의 행사를 재현해 보자는 것이니.

어린 시절의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수문장 교대식을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 있도록 자문 역할도 수행했다.

그 결과, 그냥 날림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인터미션(막간)이 화려하게 살아났다.

애절한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으며 강렬한 기대감만이 남았다. 수문장을 교대하듯, 무대 위 퍼포먼스도 자연스레 교체됐다.

두웅, 두우웅-.

심장소리처럼 쿵쿵 울리는 북소리, 비장미 넘치는 깃발의 행렬.

그 사이로 걸어 나오는 일곱 선비들은, 어느새 하얀 슬랙스와 셔츠를 벗고 검푸른 융복(조선시대 군관들이 평상시 입던 간략화된 군복) 차림으로 환복했다.

웅대하고 화려한 수문장 교대식 덕에 옷을 갈아입을 시간까지 번 거다.

뒤이어 후방 LED에 크게 떠오른 창작곡의 제목, .

평소 주하성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여겼던 군자였으나, 이것만큼은 그에게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를 컨셉충이라 불러 주었다.

컨셉충이라, 컨셉 = 충이라.

이 얼마나 명료하고 훌륭한 주제의식인가.

필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위해, 주형이 대놓고 해답을 제시해 준 것이다.

분명 지금도 흐뭇하게 웃으며 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겠지.

주형, 보고 있습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주하성은 무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허옇게 돌아간 눈알로는 초점을 맞출 수 없었으니까.

이미 이성을 상실한 주하성이었다. 비난을 저런 식으로 받아치다니. 평생 이런 굴욕감과 수치심은 처음이었다.

그 와중에 무대가 눈에 보일 리 없다. 보인다 해도 두 눈을 찔러 버렸을 거다.

그럼에도 쩌렁쩌렁한 군자의 발성만은 주하성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그래 우리 컨셉은 충, 팬들에게 경례!

그들이 우리의 주군, 임금을 향한 경배!

군자가 내뱉는 후렴에 맞춰 일곱 선비들이 자로 잰 듯한 군무를 선보였다.

칼각 경례를 포인트로 한 후렴 안무는, 검푸른 관군 복장과 찰떡처럼 어울렸다.

배신은 곧 불충, 언제나 당신들과 연대!

성공으로 가는 중, 팬들의 눈동자에 건배!

첫 번째 곡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으나,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큰북과 태평소로 시작한 ‘수문장 교대식’이 첫 무대의 인상을 지우고 두 번째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려 놨으니까.

연지를 비롯한 팬들은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무대 위의 군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반짝 빛났다. 어째서인지, 3차 무대보다 훨씬 더 잘생겨진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정말로 잘생겨진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달라진 군자의 비주얼보다도 그가 뱉는 노랫말이 더 큰 감동이었다.

를 들으며, 그 비밀스러운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 궁금한 팬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무대에서 팬들을 향한 경례와 경배라니.

그 사랑의 대상이 다름아닌 자신들이었다니!

과몰입에 의한 과대망상일지라도 지금은 상관없었다.

그 절절한 사랑의 서사가 팬들에게 이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들떴다.

목청 높여 일곱 선비들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첫 번째 후렴이 끝나고 벌스 1의 주인공인 태웅이 전방으로 튀어나왔다. 노래엔 아직도 큰 자신이 없어 보였던 태웅이었으나 랩이라면 달랐다.

차렷, 경례! 열중쉬어, 말씀을 경청!

팬들이 내 은인, 마음 속 다섯 개의 별점!

탈락했다면 아마도 갔겠지 병무청!

권태웅 떡상, 나 아닌 팬들의 결정!

수많은 결점, 그러나 가진 건 열정!

오늘은 가슴, 삼두 루틴을 열 번!

열정과 익살이 가득 담긴 태웅의 가사에 팬들은 환호했다.

마치 군가를 부르듯 쭉쭉 뻗어 나가는 발성. 팬들 역시 해병대 박수로 화답하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권태우우웅—!!”

“병무청 가지 마아아—!!”

“데뷔 해야지이이—!!”

멋지게 벌스를 마친 권태웅이 직업군인 같은 경례와 함께 돌아서고, 그 다음으로 깃발의 행렬을 지나 전방에 선 것은 지현수.

새로운 멤버가 무대 앞에 설 때마다 댄서들은 깃발을 이용한 안무를 선보이며 무대를 수놓았다.

척, 처억, 파바박-.

마치 승전보를 알리러 가는 관군의 행렬처럼 움직임은 당당하며 질서정연했다. 단단한 군화 발이 무대를 때리는 소리까지 정교하게 박자를 지켰다.

매번 참가자들로만 무대를 채웠지만 이번엔 달랐다.

평소엔 검소해도 곳간을 열 때는 화끈하게 여는 것이 진짜 양반의 태도.

이제 코인을 모을 이유도 없으니, 남은 돈을 모두 무대에 투자한 일곱 선비들이었다.

그 결과 무대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며 화려했다.

현수의 벌스가 끝난 뒤엔 다시 군자의 후렴.

그래 우리 컨셉은 충, 팬들에게 경례!

그들이 우리의 주군, 임금을 향한 경배!

군자의 선창에 멤버들의 더블링이 가세하여 한층 더 격렬해진 후렴구.

팬들 역시 새로운 후렴과 포인트 안무가 슬슬 익숙해졌다는 듯, 멤버들이 경례를 할 때마다 함께 경례를 하며 후렴 가사를 부르짖었다.

배신은 곧 불충, 언제나 당신들과 연대!

성공으로 가는 중, 팬들의 눈동자에 건배!

이미 새로운 것으로 충만한 무대였으나, 은 이제 겨우 1절이 끝났을 뿐이었다.

두 번째 후렴이 끝난 직후엔 베이스의 볼륨이 올라가며 비트가 다시 한번 변주됐다.

프로듀서 지현수가 준비한 비장의 댄스 브레이크 구간.

쿠웅-.

강렬한 베이스 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어느새 V 대형으로 늘어선 일곱 선비들이 등에 메고 있던 주립(朱笠, 붉은 갓)을 꺼내 착용했다.

고위직 관군의 상징이었던 주립, 양 측면엔 공작새 깃털까지 달아 그 위세를 더했다.

쿠웅, 쿠웅-.

붉은 갓을 쓴 조선의 군세가, 강렬한 베이스 리듬에 맞춰 완벽한 군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도저히 환호성을 참을 수 없는 압도적인 무대였다.

‘달맞이패’로 시작하여 ‘정면돌파’에서 레벨업한 칼군무는, ‘일곱 선비들’에서 완벽하게 완성된 듯 했다.

붉은 갓에 얹은 손, 플로어 위를 미끄러지는 스텝의 각도, 강하게 떨어지는 베이스에 맞춰 튀어 오르는 가슴의 움직임, 심지어 갓 아래로 언뜻 보이는 표정까지.

일곱 선비들은 마치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는 듯, 서로의 거울이자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여덟 마디가 지나고.

쿠우우웅, 쿠우우우우웅-.

이번엔 베이스에 긴박감 넘치는 대고(大鼓) 소리가 얹혔다.

부우우우—···.

전쟁의 시작을 알리듯 길게 울려퍼지는 뿔피리가 울려 퍼지자, 일곱 선비들은 동시에 붉은 갓을 벗어 왼손에 잡아 들었다.

파바밧-!

순간, 갓에 마련해 둔 특수 장치가 작동하며 챙이 두 배 이상 넓어졌다. 확대된 갓은 마치 붉은 원형 방패 같았다.

왼손엔 방패, 오른손엔 곤봉.

두 번째 댄스 브레이크는 조선군의 제식(制式)이었다.

척, 파밧, 후우웅-.

일제히 발을 옮기며 각도를 바꾸고, 둥그런 방패를 펼쳐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고, 무대의 끄트머리에서 곤봉을 휘둘렀다.

꺄아아아아아-.

팬들은 마치 곤봉으로 심장을 두들겨 맞은 듯 목청을 높였다. 도저히 차분하게 앉아서 볼 수 없는 무대였다. 선비들은 언제나 팬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새로움을 들고 나왔으니까.

마치 군대처럼 정제된 ‘제식 안무’는, 아이돌 오디션은 물론 연차 높은 파엘이나 리온도 본 적 없는 신선한 것이었다.

“···저런 안무는 대체 누가 만드는 거지?”

사실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300년 전 조선에서 갓 건져 온 군인의 움직임이니. 군자에게는 익숙한 모든 것이, 이 땅의 사람들에겐 생소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 군자에게는 생소했고.

그러나 군자는 그 생소함을 즐겼다. 새로운 것을 배워 나가며 극도의 쾌감을 느꼈다.

가장 즐거운 순간은 그가 알던 문화가 현대의 것과 합쳐지는 순간이었다.

조선 군인의 제식훈련과 현대의 군무를 합친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이 순간처럼.

붉은 갓과 곤봉을 이용한 댄스 브레이크 구간이 끝나 갈 무렵.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베이스 리듬에 맞춰, 일곱 선비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쿠우웅-.

바닥에 찍은 곤봉 소리마저 완벽하게 일치했다. 동시에, 선비들은 갓에 꽂힌 공작새 깃털을 뽑아 관객석에 던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깃털을 잡기 위해 팬들이 팔을 뻗었다. 그 모습이 걱정되면서도 뿌듯한 군자였다.

이들은 진정 나의 모든 것을 원하고 있구나.

마찬가지로, 군자 역시 이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댄스 브레이크 구간이 끝난 뒤, 이젠 현재와 시우가 나섰다. 특히 10대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여리여리한 꽃미남 둘이 전방에 서니, 하이톤의 환호성이 천장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현시우우우우—···.”

“현재야! 여기 좀 봐 줘-!”

두 사람의 장기는 감미로운 목소리. 그에 맞추어, 전자 비파에 씌워진 이펙터가 줄어들며 어쿠스틱한 사운드로 돌아갔다.

프로듀서 지현수의 세심한 배려에, 보컬들의 청량한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공연장에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의 벌스가 끝나고 난 뒤, 다음 차례는 태산 같은 체격의 차인혁.

단순히 관군의 복장을 입고 있을 뿐인데, 마치 대군을 이끄는 장수 같은 비주얼은 2030 여성들의 리액션을 이끌어 냈다.

“차인혁-! 차인혁-!”

“인혁이 피지컬 미쳤다—!!”

그렇게 차인혁의 벌스까지 끝나고, 이제는 군자의 차례가 왔다.

인혁의 벌스가 끝나자 마자 선비들은 다시금 갓을 펼쳐 한 데 모았다.

육각형으로 모인 방패가 커다란 가림막을 형성한 가운데, 그 뒤에는 군자가 숨어 있었다.

쿵, 쿵, 쿠웅-.

베이스 리듬이 한 번, 두 번, 세 번···.

쿠우우웅-.

마침내 군자의 벌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베이스가 떨어지자 마자.

“흐으읍-!”

최후방의 인혁이 군자를 번쩍 들어 앞으로 내던졌다.

동시에 여섯 방패는 사방으로 갈라지며 군자에게 길을 터 주었고.

허공을 날아 멋들어지게 착지한 군자가, 마이크를 꼬나들고 관객들을 바라보며 신들린 듯 가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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