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은 선비님-68화 (68/303)

#68

학술적 가치

군자는 똑똑했다. 가끔 어리버리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지능지수는 몹시 높았다.

세계관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古)조선도 건국 설화가 있다. 고구려나 신라, 백제도 모두 비슷한 것이 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탄생 설화는 흥미를 유발하고 나라에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또한, 그 나라의 국민들은 탄생 설화를 배우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 그룹의 탄생 설화 같은 것을 만들면 된다는 말이렷다.

모두 이 일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군자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300년 전 조선에 살던 군자가 현대에 온 것 자체가 설화적인 일 아니던가.

처음엔 그 전모를 들킬까 걱정했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하루는 너무도 답답하여 유찬과 태웅에게만 그의 정체를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태웅아, 유찬아. 사실 나는 300년 전에서 왔다.”

“뭐?”

“내가 조선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컨셉이 아니란 말이다.”

“···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우리 문원 유씨 가문엔 유전병이 하나 있었는데···.”

큰 마음을 먹고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태웅과 유찬은 군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후우, 군자야.”

“음?”

“알았어. 이제 컨셉 잡는다고 뭐라고 안 할게.”

“···.”

“뭘 그런 거짓말까지 하고 그러냐, 사람 미안하게.”

“···군자 형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아니, 그게 아닌-.”

“알았어 알았어 임마,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사실을 이야기해도 믿어 주지 않으니 들킬 염려 또한 없었다. 사실 군자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시간을 건너뛰어 온 친우라니, 너무도 비현실적인 일 아닌가.

마침, 그 세계관이라는 것엔 비현실적인 설정이 들어가면 좋다고 했다. 그렇다면 굳이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찾을 필요가 없다.

군자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놓자,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선비의 시대인 조선을 배경으로 한 디테일하며 환상적인 스토리는 모두를 순식간에 몰입시켰다.

처음엔 군자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직원들이, 이젠 먼저 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군자야, 그래서 그 병은 어떤 병이야?”

“상태창(常太瘡)이라는 병증입니다.”

“응? 상태창? 그건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거 아닌가?”

“그것과는 한자 표기가 조금 다릅니다.”

“한자 표기도 따로 있어?”

“예, 어떻게 쓰냐면···.”

품 안의 붓펜을 꺼내 한자까지 써 가며, 군자는 자신의 안에 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누구보다 춤과 노래를 좋아했으나 가문의 박해로 가무를 금지당한 어린 선비.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가무를 즐기는 것만이 이 병증을 해결할 방법임을.

답을 찾고 저주를 해결하려던 순간, 의붓아버지에게 잡힌 선비는 뒤주에 갇혀 버리고.

이대로 죽어야 하는 것인가. 절망에 빠졌으나 바로 그 때 상태창이 눈앞에서 빛을 냈다.

이야기가 지속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몰입해 갔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시간을 뛰어넘어 전송된 혼백은, 우연히도 동명(同名) 소년의 몸에 깃들었습니다.”

“빙의한 거구나?”

“그리고 그 소년은 알게 됩니다. 이 시대에선 가무를 잘하는 자들이 사랑받으며 산다는 것을요.”

“그래서 아이돌이 되기로 한 거고, 그래서 오디션에 나왔다?”

“네.”

“···그럴싸한데?”

기획팀 직원들은 놀란 눈치였다. 특히 팀장인 서은우는 군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꽤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같이 브레인스토밍이라도 해보면 답이 나올까 싶어서 불러들인 건데, 이 정도로 구체적인 스토리가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이 이야기는 유군자 씨 본인이 직접 생각해 낸 건가요?”

“네. 실화를 바탕으로, 약간의 허구를 가미하였습니다.”

실화라는 말에 몇몇 직원이 살짝 웃음을 터뜨렸지만 서은우는 웃지 않았다. 대신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세계관에 몰입해 있군.’

아이돌은 그 누구보다 세계관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아이돌이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기껏 공들여 만든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팬들의 과몰입을 유도하려면 일단 멤버부터 과몰입해야 하는 법.

물론 아직은 공식 세계관이 아닌 멤버 한 명의 아이디어일 뿐이었으나, 서은우 팀장은 만족스러웠다. 행동은 꼭 조선의 선비 같은데, 세계관을 대하는 마인드는 완벽한 4세대 아이돌 아닌가.

“난 유군자 씨 아이디어 마음에 들어요.”

“저도요, 팀장님.”

“참신하고 그럴싸해서 좋은데요?”

“그럼, 그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디벨롭 해 볼까요.”

팀원들 역시 서은우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웠던 회의실 분위기가 밝아지는 것을 보며 군자도 환하게 웃었다.

나의 의견이 도움이 되었나 보구나!

그러나 본격적인 브레인스토밍은 이제 시작이었다.

“좋아, 군자 설정은 일단 그렇게 두고. 다른 멤버들도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군자야. 너 설정에만 너무 공 들인 거 아니니?”

“···아뿔싸.”

한 직원의 말에 군자는 이마를 탁 치며 찰지게 아뿔싸를 내뱉었다.

그래, 다같이 데뷔하는 팀인데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세계관이란 분명 모든 동료를 포괄하는 허구적 설정일 터. 내게 배경이 있다면 동료들에게도 비슷한 것을 주어야 할 테다.

“흐음-.”

군자는 침음하며 동료들을 스윽 살폈다. 사실 예전부터 동료들을 과거 자신이 알던 인간군상과 대입해 보곤 했던 군자였다.

가로로 움직이던 군자의 시선이 유찬에게서 멈추었다.

“유찬이는 꼭 성균관 유생 같습니다.”

유찬은 ‘내, 내가?’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군자의 눈에는 선히 보였다.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사서오경을 읊는 백면서생의 모습. 화랑 같이 희고 고운 얼굴, 경전을 읽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는 틀림없이 유찬과 찹쌀떡처럼 잘 붙었다.

“성균관 유생?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또 그렇네?”

“네. 경서를 읊을 때의 목청은 낭랑하고, 여리여리한 몸으로 검법도 제법 잘 구사하며, 항상 동기들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내지만 기루(妓樓)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에 내심 관심을 갖는 백면서생입니다.”

“그럼 공부가 지겨워서 300년을 건너뛰어 온 건가?”

“그럴 수도 있겠지요.”

“기루는 기생들 있는 곳 말하는 거지?”

“예. 실제로, 유찬이가 음란한 것에 꽤나 관심이 많답니다.”

군자의 말에 유찬이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나섰다.

“···무, 무, 무슨! 군자 혀엉!”

“푸하핫, 맞아. 생각해 보니까 3차 때 군자랑 태웅이 벗긴 것도 유찬이 아이디어였지?”

“그, 그건 그게 아니라-!”

“괜찮아, 유찬아. 그럴 나이야.”

“아, 아니, 으···.”

“군자야, 다른 애들도 해 주라!”

“예.”

군자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평소 생각해 오던 것을 그저 풀어내기만 하면 됐으니까.

인혁이 형님은 꼭 무과에 합격한 대장군 같았다. 저 장대한 기골은 평시보다 전시에 빛나리라.

그러나 무인이라고 음악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자유롭고 호쾌한 몸의 움직임, 낮고 웅장한 목청, 덩치과 상반된 풍부한 감수성은 가무에도 최적화된 재능이다.

현재와 현수는 아마도 유찬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를 했을 것이다. 매일 놀아도 유찬과 버금가는 성적을 내는 현재는, 친우가 많고 풍류를 좋아하여 땅보다 배 위에서 더 많이 산다. 아마 현재는 300년 전에도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겠지.

작곡가 현수는 그 시절에도 제례악(祭禮樂) 작곡에 푹 빠져 건강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을 테다. 아마 도성 최고 거부(巨富)의 아들인 시우가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친구들의 건강을 챙겨 주었을 거다. 은근히 어머니처럼 동료들을 잘 챙기는 친구니까.

기획팀 직원들과 멤버들은 어느새 군자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서은우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유군자, 스토리텔링에도 재능이 있었구나.’

이제야 군자의 무대에 매번 기승전결이 확실했던 이유를 깨달은 서은우 팀장이었다.

군자는 뛰어난 퍼포머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똑같은 무대를 해도, 그저 연습한 노래와 춤을 보여줄 뿐인 아티스트가 있는가 하면 그걸 절묘하게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아티스트가 있다. 군자는 아마도 후자 쪽일 것이다.

이제 어느새 태웅의 차례. 태웅은 은근히 군자의 ‘선비화’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군자야, 그래서 난 뭔데? 응?”

“끄흐음-.”

그러나 군자에겐 꽤나 어려운 과제였다. 태웅이가 조선으로···.

가슴이 두툼하고 힘이 세니, 유씨 본가에서 마당을 쓸고 꼴을 베던 삼식이가 생각나기도 하고. 넉살이 좋고 목소리가 괄괄하니, 사흘에 한 번씩 저잣거리를 찾던 장돌뱅이 방가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선비, 선비라면 좀···.

한참 침음하던 군자는 고개를 푹 떨구며 입을 열었다.

“어어···.”

“뭔데, 뭔데에.”

“···이 정도면 제 도리는 다 한 것 같으니, 나머지는 기획자 여러분들이···.”

“야! 유군자!”

태웅은 자신도 선비 시켜 달라며 고래고래 징징댔지만 군자는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그 괄괄한 목소리를 들으니 더 방가가 생각났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넵.”

“아, 권 실장. 친구들 데리고 오마카세 다녀와요.”

“우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고맙지.”

뿌루퉁해 있던 태웅도 오마카세라는 말에 내적 비명을 지르며 군자를 잡고 흔들었다.

“앗싸, 오마카세에!”

방금까지 삐져 있다가 또 금방 풀린 태웅을 보며 군자는 흡족하게 웃었다. 참으로 단순한 친구 아닌가. 이것도 장돌뱅이 방가를 꼭 닮았다.

그렇게 멤버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난 뒤, 서은우 팀장은 팀원들과 남아서 회의를 정리했다.

서은우 팀장으로서는 소기의 목적 이상의 것을 얻은 회의였다.

그저 아이디어의 파편 정도를 얻고자 부른 멤버들이었는데, 군자의 입에서 세계관의 기반이 통째로 튀어 나왔으니까.

그의 팀원들도 오늘의 회의에 대만족한 표정이었다.

“헤헤, 팀장님. 이거 너무 날먹 아닙니까?”

“날먹?”

“앗···.”

그러나 서은우 팀장은 군자의 발상에 얹혀 갈 생각은 없었다.

“이런 세계관 설정은 디테일이 생명입니다. 대충대충 일할 생각 마시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하세요.”

“네에-.”

아이디어는 어디까지나 아이디어일 뿐. 아이돌이 춤과 노래의 전문가라면 솔라시스템 기획팀원들은 기획의 전문가다.

직원이기 이전에 한 명의 파트너로서, 또 팬으로서.

서은우 팀장은 그 누구보다 똑바로 일할 생각이었다.

“세계관은 오늘 회의한 내용 바탕으로 다시 빌드업 하기로 하고, 다음 안건 봅시다.”

“넵.”

“멤버들 방송 출연, 오늘 스케쥴링 하기로 했었죠?”

“네 팀장님.”

“섭외 목록 먼저 볼까요.”

서은우 팀장의 말에, 팀원 중 한명이 모니터에 문서를 띄웠다.

문서의 스크롤바는 한없이 길었다. 미친 화제성을 자랑했던 프로그램인 만큼, 모든 방송국이 ‘7IN’을 섭외하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러나 방송 출연이야말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영역이다. 방송으로 데뷔했다지만 아직은 카메라 앞이 낯선 아이들이니.

“흐음-.”

이건 쳐내고, 저것도 쳐내고.

순식간에 목록을 정리해 나가던 서은우의 눈에, 뜻밖의 프로그램 이름 두어 개가 들어왔다.

[TV쇼 명품진품]

“···음?”

베테랑인 서은우 팀장마저 당황시킬 만한 목록이었다. 아니, 무슨 이런 프로그램에서 신인 아이돌을?

“잠깐 스크롤 좀 멈춰 볼까요.”

“네? 아, 네.”

“TV쇼 명품진품, 저 쪽에서도 정말 섭외 요청이 들어왔습니까?”

“네. 근데 단가가 좀···.”

“돈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명분부터 들어 볼까요.”

“네?”

“저 프로그램에서 왜 ‘7IN’을 섭외하고 싶다고 했나요?”

서은우의 질문에, 가장 끝에 있던 직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게··· 신기하게, 프로그램 자문 교수님께서 직접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교수님이요?”

“네. 결승전 무대가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예?”

* * *

강윤성 교수가 ‘그 영상’을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여느 때처럼 저녁 늦은 시각까지 연구를 하다가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딸 윤아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목소리로만 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윤아야, 아빠한테 가서 인사 해야지.”

“알았어, 이것만 좀 보구.”

아내는 그런 딸을 다그쳤지만, 그녀 역시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허허, 뭐길래 아빠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괜히 티 내기 싫어서 손발부터 씻고 소파에 앉았다. 무슨 영상이기에 가장의 권위를 이렇게 땅으로 떨어뜨리는 것인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TV 속 소년들을 본 순간.

“어어?”

강윤성 교수 역시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됐다.

“···윤아야.”

“응 아빠. 쟤네 멋있지?”

“저 친구들, 누구니?”

“아육시라는 오디션 나온 연습생들이야. 가운데 쟤가 유군자인데···.”

이후 윤아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강윤성 교수는 도저히 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화면 속 아이돌들의 복식은, 그가 지금까지 TV에서 봤던 그 어떤 의상보다 완벽하게 고증되어 있었으니까.

업무의 고단함도 잊은 채, 강윤성 교수는 영상에 푹 빠져들었다.

“아빠도 푹 빠졌네! 우리 선비들 멋지지? 응?”

“···응, 멋지구나.”

“아, 군자 오빠 만나고 싶다.”

“그러게, 한번 만나 봐야겠네.”

조선백자를 만지며 뿅간 표정의 군자와 함께, 이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4주 후의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