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은 선비님-72화 (72/303)

#72

교수가 거짓말?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마자 군자는 자리를 떴다.

목적은 단 하나, 이 그림을 가져온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림의 진위 여부를 두고 논쟁을 하며, 군자의 가설은 확신이 됐다. 원균상 교수는 의도적으로 이 그림의 가치를 낮추려 하고 있다.

정말 물건의 가치를 못 알아본 것이었다면 당황하는 기색이라도 보였겠지.

그러나 원균상은 조급해 보였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다는 듯, 초조한 기색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군자에게도 이 물건이 진품이라는 것을 증명해 낼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물론 더 많은 석학들이 감정에 도움을 준다면 진위를 밝혀낼 수 있을 테지.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이 곳은 원균상 교수의 안방 아니던가.

같은 높이에서 논쟁을 한다면 사람들은 결국 원균상 교수의 손을 들어 줄 터. 아무리 그럴싸한 근거를 들이댄다 해도, 원균상의 권위가 모든 것을 찍어 누를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보다 단순하고 자극적인 제안이 필요했다. 물론, 의뢰인의 동의가 있다면.

그렇기에 군자는 의뢰인부터 찾았다.

“선생님, 가져오신 그림은 현재 심사정의 그림이 확실합니다.”

“저, 정말입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네?”

“녹화가 재개된다면,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어, 어떤 제안을···.”

“그 그림을 불태우자는 제안입니다.”

“—!?”

군자의 제안은 간단했다. 그림이 가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불태워 보자.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군자는 믿었다. 교수 원균상이 가진 학자로서의 마지막 양심을.

그도 그 그림이 진품임을 안다면, 그것이 가진 학술적인 가치를 안다면 불을 지르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터.

가짜 그림에 불 한번 질러 봅시다.

화통한 제안에, 원균상은 예상대로 우물쭈물했다. 처음 반박을 받았을 때보다 열 배는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 반응은 군자의 확신에 더 큰 힘을 실어 주었다.

“그, 가, 가짜라도 불을 지르는 것은 의뢰인께도 실례 되는···.”

“아뇨, 의뢰인 분께서도 이미 동의하셨습니다.”

“!”

“만약 가품일 경우, 그림을 그대로 소각해 버려도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스튜디오의 분위기 역시 묘하게 흘러갔다. 모두 원균상 교수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코너에 몰린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다시 한번 면밀히 검토해 주시겠습니까?”

“···.”

“아니면 그냥 여기서 소각해 버려도 괜찮겠습니까?”

“···!”

원균상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며 진땀만 흘렸다.

물론, 군자의 예상이 모두 들어맞은 것은 아니었다.

원균상에게 남은 학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믿은 군자였으나, 이미 원균상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대신 ‘현재 심사정의 습작 하나를 중국으로 가져가겠다’는 약속만이 있었을 뿐.

벌써 몇 차례나 서화(書畵)의 가격을 후려쳐 싸게 매입, 어둠의 경로를 통해 외국으로 팔아먹은 경험이 있는 원균상이었다. 비운의 천재 화가 심사정의 그림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이거 한 장에 걸린 돈과 인맥이 얼마인데 불을 지르자니.

설마 저 젊은 놈이 그런 미친 짓을 할까 싶은 원균상이었으나, 군자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공포감이 일었다.

저 맑고 초롱초롱한 눈, 저건 진짜 광기다.

일단은 한 발 물러서기로 한 원균상이었다. 잠시 감정을 보류해 두었다가, 인맥을 동원하여 유리한 쪽으로 재감정하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당장 자존심 지키자고 맞서기엔 원균상 쪽이 잃을 것이 더 많았다.

“하하, 구,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의뢰인께서 동의하셨으니 못할 것도 없지요.”

“우리 유군자 군은 아이돌이라고 들었는데, 말하는 것만 보면 유물 대법관이 따로 없습니다그려. 허허, 허허허헛-.”

말을 마친 원균상이 크게 웃었으나 그 누구도 그를 따라 웃지 않았다.

‘방화 제안’ 이후로 분위기는 완전히 군자 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심지어 한구헌 PD 역시 군자의 편이 된 것 같았다.

이제 원균상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이 물건은 추후 재감정하는 것으로 합시다.”

“!”

“뭐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숨막히는 대치 상황은 원균상의 후퇴로 일단락됐다. 분위기가 풀리자, 한구헌 PD는 다시 한번 촬영을 잠시 중단시켰다.

“휴우, 딱 10분만 더 쉬고 다시 시작할까요?”

다시 쉬는 시간이 생기자 솔라시스템의 이용중 실장이 황급히 군자를 찾았다. 군자가 불 이야기를 꺼낸 다음부터, 이용중은 내내 소화기를 옆구리에 낀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군자! 어쩌려고 그랬어—!?”

“아, 혹시 재미가 없었습니까?”

“재미야 있었지! 너무 재미있어서 문제였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니이, 재미없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실장님, 제가 지금 누구를 만나뵈어야 해서···.”

“으응? 또 누구를?”

“꾸중은 이따가 듣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용중 실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군자는 황급히 휴게 장소를 향해 뛰어갔다. 이번엔 의뢰인이 아닌 강윤성 교수를 만나기 위해.

듣기로는, 그를 <명품진품>에 섭외한 것이 강윤성 교수라 했다.

자문 교수를 맡을 만큼의 석학이면서, 군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 지금 군자가 기댈 언덕은 강윤성 교수밖에 없었다.

“강윤성 교수님!”

“아, 유군자 씨. 나도 마침 찾고 있었어요.”

살가운 인사 뒤, 강윤성 교수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내가 그림 전문가는 아니지만, 조선 후기 회화에는 관심이 많아서 조금 공부했어요. <무예도보통지>에 그려진 그림도 결국 회화나 다름없으니까.”

“예.”

“나도 유군자 씨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림은 현재 심사정 선생의 필치가 분명히 묻어 있어요. 물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재검증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

“원 교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도 대충 알겠고.”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예, 그래야죠.”

짧은 대화였지만 군자와 강윤성 교수는 순식간에 의사를 교환했다. 원균상이 다시 한번 감정단을 조직하기 전에 먼저 그림을 감정해 내야 한다.

다행히, 강윤성 교수에겐 그를 도울 만한 좋은 인맥이 많았다.

“촬영이 끝나자 마자,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감정사들을 섭외할 겁니다. 원 교수에게 맡겼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무슨 말씀을. 오히려 내가 더 고맙죠.”

강윤성 교수가 감정단을 꾸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 군자였다. 의뢰인 역시 이제는 원균상보다는 강윤성 교수를 더욱 신뢰할 것이다.

그렇게 스튜디오로 돌아온 군자는,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채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이용중 실장 앞에 섰다.

“···실장님···.”

“뭠마.”

“···혼나러 왔습니다···.”

그 모습에 이미 화는 눈 녹듯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이용중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군자를 다그쳤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좋아. 하지만 교수님이랑 싸우면 어떡하니.”

“···죄송합니다···.”

“후우, 뭐 어쩌겠냐. 이미 끝난 일이고, 한 PD님은 마음에 드신 것 같으니까 다행이지.”

“···그래도 재미는 있었던···.”

“어허, 재미가 다가 아니라고 임마아.”

그렇게 말하며 이용중이 군자의 이마에 꿀밤을 꽁 때렸다. 꽤나 매서운 꿀밤이었던지라, 군자의 눈가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으으···.”

“앗, 아팠니? 미안.”

“···너무하십니다···.”

생각보다 강하게 나간 꿀밤에 당황하던 이용중이, 급하게 스튜디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래! 오늘 네 붓글씨도 보여 주기로 했었지.”

붓글씨라는 말에 군자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면, 촬영 전에 보았던 그 고급 벼루와 붓을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저기 보니까 준비된 것 같은데?”

“오오!”

“가라, 명필 유군자! 가서 보여주고 와!”

“넵!”

자리로 향하는 군자의 발걸음에 억울함은 없었다. 매콤한 꿀밤은 어느새 없는 일이 된 것 같았다.

“그, 이마에 빨간 것 좀 가리실게요.”

메이크업 팀이 꿀밤 흔적까지 가볍게 손본 뒤, 다시 촬영이 재개됐다. 군자의 자리엔 어느새 백지와 붓, 벼루, 먹이 놓여 있었다.

“자, 이제 오늘 감정품들은 모두 살펴보았는데요. 우리 군자 씨는 오늘 촬영 어떠셨는지,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또 나오고 싶습니다.”

“하하, 우리야 너무 좋죠. 원 교수님만 괜찮으시다면? 하핫, 하하핫-.”

모두가 웃었지만 원균상은 웃지 못했다. 군자에게 보기 좋게 엿을 먹은 뒤, 원균상의 표정은 계속해서 일그러져 있었다.

군자 역시 그런 원균상을 바라보았다.

속임수로 이 명품을 헐값에 득하려 한 것도 모자라, 그 비열한 속내가 들통났음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심술이나 부리다니.

과연, 배운 자라고 모두 선하고 현명한 것은 아니로구나.

허어, 다시 보아도 참 불쾌한 관상이다.

원균상이라는 왜적스러운 이름에 더러운 관상의 조합이라. 명리학적으로는 아주 끔찍한 혼종이구나.

겉과 속이 다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과거 조선을 침략했던 왜적(倭敵) 같기도 하고.

군자가 원균상의 관상을 보며 감탄하는 사이, MC 손석우가 말을 이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유군자 씨, 재주가 아주 많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붓글씨를 참 좋아하고 잘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매일 오전, 서예를 통해 마음을 정돈하고 있습니다.”

“와하핫, 정말 요즘 아이돌답지 않게 선비스러운 모습이 인상적인데요. 그럼 여기서 한번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예, 물론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품질의 지필묵이다. 잡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하구나.

스윽, 스윽-.

먹을 벼루에 갈며, 군자는 오늘의 시제(詩題)를 떠올렸다.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으나, 역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저 자와의 언쟁이다.

문득 한시 경연을 펼치던 지난날이 떠오른 군자였다. 그 땐 상대하기 싫은 자들과 상대해야 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원균상 교수, 아마 당신이라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있겠지.

먹물을 듬뿍 머금은 붓머리로, 군자가 백지 위를 일필휘지(一筆揮之)해 나갔다.

원균상파가야로 (猿均償把假耶勞)

원숭이는 균등한 보상을 위해 거짓을 고한다지만,

교수가구라쟁이 (驕獸假口喇爭利)

이 교만한 짐승은 주둥이만 벌리면 거짓으로 이득을 추구하는구나.

구리고구린행실 (咎理睾嶇躪行實)

그 허물을 다스리려면 고환을 잔혹하게 짓밟아야 마땅할진대.

관상부터안조음 (觀傷腐攄安釣音)

썩어빠진 모습을 보았더니,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면 낚시와 노래를 좀 해야겠구나.

군자의 붓놀림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걸 보던 원균상의 표정은 점점 흙빛으로 굳어 갔다.

“이, 이런 미친···.”

그러나 원균상과 강윤성 교수 외엔 그 누구도 그 한시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다. 강윤성 교수는 아까부터 웃음을 참느라 거의 관우 같은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마침내 시를 완성한 군자가, 원균상을 향해 백지를 들어올려 보였다.

내 그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외다.

부끄러운 줄 아셨다면, 앞으로는 행실을 고쳐 보는 게 어떠할지.

마지막 순간까지, 군자는 해사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 * *

그렇게, ‘7IN’ 유군자의 첫 번째 예능 촬영은 다사다난하게 마무리됐다.

[7IN 유군자, 첫 번째 예능 촬영 완료!]

[‘선비돌’ 다운 행보? <명품진품> 출연 결정의 비화.]

[<명품진품>, 2년 반 만의 아이돌 출연에 시청률 대폭 상승 예상···.]

촬영이 끝나자 보도자료들이 배포되기 시작했다. 7IN의 팬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군자의 첫 예능 방영을 기댜렸다.

[ㅋㅋㅋ아니 무슨 아이돌이 명품진품이얔ㅋㅋㅋㅋㅋ]

[컨셉에 찰떡이긴 함]

[그건 맞는뎈ㅋㅋㅋ좀 아이돌스러운 방송 좀 나와주지;ㅠㅠㅠ]

[그런건 나중에 당연히 나가겟지ㅇㅇ리얼리티 계약도 했잖음ㅋㅋ]

[난 색달라서 좋은뎈ㅋㅋㅋㅋㅋ]

[ㅇㅈㅇㅈ그리고 일단 군자가 신나할것 가틈ㅋㅋㅋㅋㅋ]

[백자 끌어안고 엉엉우는 유군자 나만 기대중??ㅋㅋㅋㅋ]

[그건맞는데 말실수할까바그러지]

[아;]

[초좀치지맠ㅋ]

[근데 틀린말은 아님··· 역사관련 개소리 했다가 나락간 애들 한둘임?]

[군자가 알아서 조심하겟지]

[솔시가 개ㅈ소 기획사도 아니고 그정도 관리도 안하겟음?]

[일단 사고만 안 쳐도 기본은 하는거]

[얼굴이 걍 재밌자낰ㅋㅋㅋ]

물론, 그 중에서 군자의 활약상을 제대로 예측해 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주 뒤, 유군자 편 방영일.

오디션이 끝난 뒤 잠시 잠잠했던 온라인이 다시 한번 시끌벅적하게 뒤집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