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사임당이 몇 개야
1티어 남자 아이돌 ‘루나틱’의 리더 리온.
몇 안 되는 군자의 전화번호 목록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오디션이 끝난 다음에도 리온과 군자는 지속적으로 연락을 이어 왔다.
[오리온 : 유군자 씨, 안녕하세요]
[오리온 : 2차 경연 때 만났던 오리온입니다]
[오리온 : 종종 연락 하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연락을 취한 것은 리온 쪽이었으나, 한번 말문이 트이자 그 뒤로는 군자가 매일 아침마다 리온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유군자 : 형님.]
[유군자 : 오늘 하루도 강녕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리온 : 고마워요]
[유군자 :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군요.]
[오리온 : 네, 나는 언제나 이 시간에 일어나서 조깅을 합니다.]
[유군자 : 오오···.]
조깅이라, 처음 듣는 단어로다. 분명 아침 조(朝) 자를 쓰는 것이겠지.
선비라면 아침의 즐거움을 알아야 하는 법. 스케쥴이 없는 날엔 오시(午時, 오전 11시 ~ 오후 1시)까지도 잠을 자는 동료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아닌가.
군자는 리온의 규칙적힌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손을 내민 것은 리온이었으나, 그 뒤로는 오히려 군자가 더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유군자 : 형님!]
[유군자 : 행복한 하루를 기원하며 보냅니다.]
[유군자 : (사진) (사진) (동영상)]
[유군자 : 새벽 산보를 나갔다가 소쩍새를 만났습니다.]
[유군자 : 요즘 들어서는 보기 힘든 새라지요.]
[유군자 : 울음 소리도 얼마나 청아하던지.]
[오리온 : 이게 소쩍새입니까?]
[오리온 : 눈썹이 참 예쁘군요.]
[유군자 : 역시.]
[유군자 : 형님께서는 심미안이 있으십니다.]
틈이 날 때마다 군자는 리온에게 이런저런 사진이나 영상을 보내며 친목을 도모했다.
리온의 절친 파엘은 두 사람의 대화창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 껀 씹고 누구랑 그렇게 신나게 톡 하나 했는데··· 유군자였어?”
“중요한 연락이라서.”
“그냥 새 얘기 아니야?”
“그냥 새가 아니야, 소쩍새다.”
“무, 뭔쩍새?”
놀랍게도 리온은 유군자가 보내 오는 것들에 꽤나 진심이었다.
[유군자 : 형님]
[유군자 : 오늘 오전의 글월을 보냅니다.]
[유군자 : (사진) (사진)]
[유군자 : 樹欲靜而風不止 (수욕정이풍부지)]
[유군자 : 효도에도 때가 있다는 뜻의 고사입니다.]
[오리온 : 글씨가 참 정갈합니다.]
[유군자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유군자 : 오후에는 모처럼 초충도(草忠圖)를 그려 볼까 하는데]
[유군자 : 혹시 좋아하는 꽃이 있으신지.]
[오리온 : 꽃이라···.]
[오리온 : 물망초도 가능합니까?]
[유군자 : 하하 형님]
[유군자 : 오늘은 푸른 염료를 사러 화방에 가야겠군요]
처음엔 뭔 이런 걸 보내나 싶었는데, 희한하게 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선비 유전자가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군자가 보내 오는 모든 것은 한없이 무해했다.
[유군자 : 오늘은 상수리나무 가지에 앉은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
[유군자 : (사진) (사진) (동영상)]
[오리온 : 고맙습니다. 영상 속 새가 참 귀엽군요.]
[유군자 : 역시 그렇지요?]
[오리온 : 하지만 딱따구리를 ‘따구리야~ 따구리야~’ 라고 부르는 건 그만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리온 : 발음 상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유군자 : 아··· 명심하겠습니다.]
너무도 무해하고 순수하여, 종종 위험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유군자 : 그런데 형님]
[유군자 : 혹 이렇게 매일 연락 드리는 것이 귀찮지는 않으신지.]
[오리온 :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유군자 :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주제는 아니라 생각하여···.]
[오리온 : 아닙니다.]
[오리온 : 얼마든지 보내도 됩니다.]
[오리온 : 요즘 나도 아침마다 붓글씨를 쓴답니다.]
[유군자 : 헉]
[유군자 : 감사합니다 형님!]
어쨌거나, 새로 생긴 동생이 퍽 마음에 든 리온이었다.
“뭔 맨날 톡질이야. 연애 하니?”
파엘은 그런 리온을 보며 웃었지만, 리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애는 안 돼.”
“야, 장난이야. 정색을 하고 그러냐. 그리고 너네 둘 다 남자잖아.”
“남자끼리도 얼마든지 연애 할 수 있지.”
“맞네, 내가 아직 편견을 못 버렸네.”
“그리고 이건 연애감정 같은 게 아니야. 동료의식이다.”
“아, 그러니?”
파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리온은 언제나처럼 진지했다.
<예의없는 것들> 무대를 본 순간 리온은 직감했다. 이 친구들은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에 능히 영향력을 미칠 만한 재목이다.
군자를 처음 만난 날, 리온이 했던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한국 아이돌 음악의 위상을 높인다. 그것이 ‘루나틱’ 리더 리온의 대의(大義)였다.
그 주역이 ‘루나틱’이든, 아니면 ‘7IN’이든.
마침 리온에게는 그가 직접 사들인 <예의없는 것들>의 판권이 있었다. BET의 우경훈 이사는 아마 이걸 편곡하여 BET 소속 아이돌에게 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리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곡을 ‘7IN’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리온이 처음으로 7IN을 작업실로 초대한 날, 멤버들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이용중 실장이 모는 밴에 올랐다.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과 근사한 만찬을 기대한 멤버들이었으나, 그들을 맞이한 건 저승사자처럼 시커먼 옷차림의 리온이었다.
“서, 선배임!”
“아, 안녕하심까!”
절로 바짝 군기가 든 7IN 멤버들이 나란히 도열했고, 리온은 그 앞을 지나며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반가워요. 보고 싶었습니다.”
일부러 똥폼을 잡지 않아도 리온에게서는 후광이 뿜어져 나왔다.
지옥 같은 세대를 뚫고 천장을 찍은 1티어 아이돌. 수많은 풍파를 이겨 내고 기어이 팀을 하나로 만든 참 리더.
모두가 아는 그의 업적이 만든 아우라였다.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은, 언뜻 광기가 비쳐 보일 정도였다.
모든 멤버들과 악수를 나눈 뒤, 작업실 쇼파에 앉은 리온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네 선배님.”
“여러분은 꿈이 무엇입니까?”
“예?”
“내 꿈은 대한민국의 아이돌 음악이 세계 음악 시장의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
그저 멋진 형아네 작업실에 놀러 온 줄로만 알았던 멤버들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상상도 하지 못한 거국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어 버렸으니까.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군자만큼은 국뽕에 한껏 취한 표정으로 리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참으로 멋진 형님이구나.
“전 세계 대중음악의 주류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문화. 그게 K-아이돌이었으면 합니다.”
“···.”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그 선두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주류··· 소비···.”
뭔가 엄청난 것을 들었다는 듯 유찬은 말을 더듬었지만, 리온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망설임 없이 커다란 아이스박스로 걸어간 리온이 뚜껑을 열어젖혔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그 안엔 커다란 얼음과 함께 냉각된 캔맥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먼저 주류부터 소비해 볼까요.”
* * *
그로부터 딱 두 시간 뒤.
7IN의 미성년자 기유찬, 하현재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얼근히 취해 버리고 말았다.
“형, 리온이 혀엉.”
“왜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벌써 부른 거 아닙니까아.”
“에이 혀엉, 말 편하게 하세요옹.”
“그래, 그러자! 다 편하게 하자!”
“오 예-!”
역시 친해지는 데엔 술 만한 것이 없었다. 문제는 술잔을 쥔 여섯 명 중 현시우를 빼면 술에 강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었지만.
“아하하핫, 다들 취했나 봐~”
“으헤헤, 헤헷.”
“아, 기분 좋네. 내가 언제 온이 형이랑 이렇게 술을 다 마시거.”
곳곳에서 웃음 소리와 혀 꼬인 말소리가 난무했다. 그 와중에도 리온은 꿋꿋하게 군자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군자야. 유군자야.”
“예, 예 형니임.”
“여기, 이거 가져가.”
리온은 서랍 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군자에게 내밀었다.
“이건 무슨···.”
봉투 안을 스윽 열어 보니, 5만원권 수백 장이 들어 있었다.
사, 사임당 선생님이 몇 명인가!
봉투 안에 든 수백의 사임당을 보자 술기운이 퍼뜩 달아난 군자였다.
“어, 어찌 이렇게 큰 돈을···.”
떨리는 손으로 리온에게 봉투를 다시 내민 군자였으나 리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손을 밀어냈다.
“계산은 제대로 해야지. 2차 경연 때 내가 <예의없는 것들> 샀잖아.”
“···.”
“정산이 조금 늦었다. 미안.”
“···형님!”
언젠가 TV에서 얼핏 본 적이 있다. 선배의 권위는 지갑에서 나오는 거라고.
그땐 뭔 그런 세속적인 말이 다 있나 싶었는데, 육백 사임당을 손에 쥐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 군자였다.
아니 이 형님, 뭔데 이렇게 멋있지?
동료들에게 <예의없는 것들> 정산금을 보여주자 다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와악, 혀어엉—!!”
“지, 진짜 주시는 거예요—!?”
“형, 혀엉—!!”
“감사합니다—!!”
불그스름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는 멤버들을 바라보며 리온은 흐뭇하게 웃었다. 돈이야 아쉽지 않을 만큼 있었다. 사실 딱히 쓸 곳도 없었고.
그에게 돈보다 훨씬 중요한 건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의없는 것들> 음원 말인데, 어디에 쓸지 정했다.”
“오오-.”
“어떤 팀 주실 거예요?”
“7IN.”
“—!?”
“이거, 깔끔하게 편곡해서 다시 너희 앨범에 수록할 수 있도록 돌려줄까 해.”
“혀, 혀어엉—!!”
술 취한 멤버들은 이제 더 이상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멤버들은 모두 빨개진 얼굴로 리온을 와락 끌어안았다.
“형, 사랑해요—!!”
상상도 하지 못한 선물의 연속에, 멤버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예의없는 것들>은 군자 역시 많은 애착이 가는 곡이었기에, 리온이 곡을 다시 돌려준다는 말이 3천만 원보다 훨씬 기뻤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박애였다. 리온이 대체 어째서 이렇게까지 7IN을 아끼는 것인지.
그런 군자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리온이 먼저 대답했다.
“난 너네가 좋다. 앞으로도 가깝게 지내고 싶어.”
“···.”
“그 이유는, 처음 말했듯이 너희가 내 꿈과 함께할 능력을 갖춘 친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물론 좋은 동생들인 것 같기도 하고.”
“···혀엉···.”
“<예의없는 것들>, 그냥 주는 거 아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넵, 당연하죠!”
멤버들은 한 명도 빠짐 없이 목청 높여 대답했다.
군자 역시 리온과 같은 생각이었다.
지난 3개월 간을 함께하며 이들의 성격과 기질을 파악한 군자였다. 이들 중, 어중간하게 돈이나 벌고 인기나 좀 끌어 보겠다는 마인드로 이 바닥에 들어온 이는 없었다.
아마 모두 리온과 같은 꿈을 꾸고 있을 터.
분위기가 다소 차분해지자, 자리에 앉은 리온이 말을 이었다.
“첫 앨범은 더블 타이틀로 진행한다고 들었는데, 맞아?”
“네. 그렇게 될 것 같아요.”
“타이틀곡 하나는 일 거고. 나머지 하나를 <예의없는 것들>로 할 생각이니?”
“어어,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은···.”
현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리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단정적인 리온의 어투에 멤버들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그러나 군자만큼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자, 너도 그렇게 생각해?”
“예, 형님.”
“어째서?”
“두 곡 모두 오디션에서 보여준 바 있는 곡입니다.”
“···.”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이돌의 의무입니다. 아무리 창작곡이라 해도 이미 오디션에서 공개된 곡을, 그것도 두 개나 타이틀로 선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군자의 말을 듣던 리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군자, 신곡에 대한 아이디어는 있어?”
“예.”
“말해 줄 수 있을까?”
“말 대신 지필묵(紙筆墨)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마침, 작업실엔 최근 리온이 구매한 문방사우가 갖추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리온의 고급 세필붓을 들어올린 군자가, 백지 위로 거침없이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