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저희가 가지고 있습니다
취기가 도는 와중에도 군자의 붓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슥, 스윽-.
얇은 붓이 흰 종이 위를 정신없이 움직였다. 밑그림도 없이 시작된 드로잉 쇼였다.
“우와···.”
그걸 보는 이들은 감탄사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가무, 악기, 서예, 궁술, 기마술에 이어 이번엔 그림이라니.
“아니, 쟤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야?”
“···지, 진짜 조선 시대에서 온 거 아닐까요···.”
“그렇다고 해도 어이없지 않냐? 조선 사람이라고 다 저렇게 잘하진 않았을 거 아냐.”
“···맞아요···.”
“쟤는 분명 조선에서도 천재였을 걸.”
태웅의 추측을 들으며 군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선에서 왔다는 오해 아닌 오해는 종종 받으나, 조선에서도 천재였을 것이라는 말은 또 처음이었다.
뭐, 굳이 돌이켜 보자면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옛 기억을 떠올리며 군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림엔 심산유곡의 풍경이 담겨 있었으나, 주인공은 자연이 아닌 사람이었다. 깊은 계곡에 위치한 정자에서 글월을 읊으며 노는 선비들도 보였고, 계곡 안엔 냉수를 끼얹으며 무예를 단련하는 이들도 보였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산수도(山水圖)가 아니라 풍속도(風俗圖)다.
완성되어 가는 군자의 그림을 보며 태웅이 질문을 던졌다.
“군자야, 근데 이건 풍속도 아니냐?”
“오, 태웅이가 뭘 좀 아는구나.”
“근데 지체 높은 선비들이 풍속도도 그렸나?”
“오, 태웅이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아오, 또 뭔데.”
쒸익쒸익 소리를 내는 태웅을 향해, 군자가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사대부들이 사군자나 산수화를 주로 그린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풍속도를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산수화 잘 그리는 화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겸재 정선도 풍속화의 대가였다. 비록 현대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지만.
물론 그 와중에도 문원 유씨 집안은 좀 예외기는 했다. 숙부 유형원이 풍속도 그리는 것을 심히 경계했으니까.
춤 췄다고 회초리 맞고, 노래 불렀다고 회초리 맞고, 가야금 뜯었다고 맞고, 풍속도 그렸다고 또 맞고···.
생각해 보면 참 불우한 시절이었다. 그에 비하면, 친우들과 함께 이렇게 자유롭게 술을 마시며 붓을 놀릴 수 있는 이 시간은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군자의 그림은 완성됐다. 호쾌한 필치로 그려낸 풍속도엔 일곱 명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와아···.”
“그림은 너무 멋진데.”
“형아, 이제 설명 좀 해 줘여.”
“그래. 이 그림이 신곡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데?”
동료들은 물론, 리온도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호기심의 가운데에 선 군자가, 한 손에 세필 붓을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룹 7IN의 세계관은 ‘일곱 선비들’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조선에서 온 일곱 선비’ 라는 세계관을 연착륙시키기 위해선, 말 그대로 멤버들이 과거로부터 왔다는 내용을 담은 신곡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우리의 기원과 근본을 소개할 만한 신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막연하게 ‘조선에서 왔다’고 해 보아야 사람들에겐 와 닿지 않을 테다.
조선과 대한민국을 잇는 매개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찰나 <명품진품>에서 현재 심사정 선생의 그림을 보게 됐다.
그림을 보는 순간 이거구나 싶었다.
옛 화공들의 그림은 작게 축소해 놓은 조선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힌트를 얻으니 아이디어는 순식간에 진화했다.
그냥 조선에서 온 게 아닌, ‘그림에서 튀어나온 일곱 선비들’이라는 컨셉이라면?
한 장 그림으로 7IN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면?
처음엔 웬 그림인가 싶었던 멤버들도, 군자의 설명이 이어지자 차례로 손뼉을 쳤다.
“그림에서 튀어나온 선비들? 난 좋은데?”
“군자, 너 또 언제 이런 걸 생각해 낸 거야아~”
“하하, <명품진품>에 나가서 그림을 본 것이 결정적이었지.”
“아마 형아 말고 우리가 나갔으면 이런 생각은 절대 못 했을 걸여.”
“당연하지. 게다가 생각은 어떻게 했다 쳐도 이런 그림은 또 어떻게 그리냐?”
멤버들이 군자의 등짝을 팡팡 두들기는 동안, 프로듀서 현수는 또 한번 영감의 바다에 빠져 있었다.
“음, 으음···.”
“오, 현수 형아도 뭔가 떠오르나 봐여!”
“야, 우리도 같이 좀 알자. 뭔데!”
“···<근본>.”
“어?”
“신곡 제목은 <근본> 어때? 부제는 Origin.”
군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서 튀어나온 선비들’이라는 컨셉을 설명해 주었다.
거기에 현수가 <근본 (Origin)> 이라는 제목을 붙여 주자, 멤버들의 머릿속엔 신곡에 대한 윤곽이 더욱 뚜렷하게 잡혔다.
“오오, 그렇게 하니까 좀 더 확 와닿는데?”
“군자! 이번엔 근본 랩 보여주는 거야?”
“잠깐만, 이럴 게 아니라 아예 곡 스케치를 좀 해 볼까?”
현수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작곡 프로그램을 열려고 하자, 리온이 현수를 제지했다.
“잠깐만, 노트북 꺼내지 마.”
“아아··· 이건 나중에 할까요?”
“무슨 소리야.”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난 리온이, 방음 스튜디오 문을 활짝 열어 젖히며 양 팔을 뻗었다.
그 안엔 최고사양의 작곡용 워크 스테이션,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사운드 시스템, 완벽한 시설을 갖춘 녹음실까지, 작곡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가 우리 작업실인데!”
“!”
“뭔 맥북이냐고!”
“형니이이임—!!”
취기 오른 일곱 멤버들, 그리고 리온은 작업실로 들어가 정신 없이 신곡을 스케치했다. 여덟 명 모두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쇼파에 뻗을 때까지 작업은 계속됐다.
* * *
그리고 다음 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군자와 멤버들은 조용히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들에겐 꽤나 난처한 상황이었다.
“···혹시 리온 형님은 어디 계시는지···.”
“몰라 나도. 먼저 가셨나.”
“우리 어제 겁나 친한 척 하지 않았냐?”
“그랬던 것 같은데.”
“유찬, 현재. 너희는 어제 술 안 마셨지?”
“넵.”
“어제 어땠어?”
“으음, 모르겠는데여.”
그러나 유찬과 현재는 알 수 없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그들은 새벽 1시를 넘기지 못하고 곯아 떨어져 버렸으니까.
그나마 어제 상황을 기억하는 것은 술이 강한 시우 뿐이었다.
“아하핫, 군자랑 태웅이 어제 장난 아니었어~”
“그, 그래? 어땠길래?”
“너희가 가마 만들어서 리온 형 태웠잖아~”
“가, 가마?”
“아하핫, 장원급제 가마~”
“!”
그 순간 군자의 모든 기억이 퍼뜩 돌아왔다. 신곡 스케치 작업, 리온과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 참으로 광기어린 밤이었구나.
“으으, 왜 그랬을까···.”
“몰라, 빨리 치우고 튀자아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형님-!”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리온을 보며, 일곱 소년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젯밤엔 그렇게 텐션 높던 리온도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애매한 표정으로 소년들을 돌아보던 리온은, 손을 흔들며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어어, 그래요···.”
순간 소년들은 깨달았다. 리온 역시 난처한 상황이라는 것을.
‘다시 존댓말을 쓰셨어···.’
‘지금 목례랑 손인사 동시에 한 거 맞지?’
‘이 형님도 우리랑 똑같은 상황이구나.’
태웅이 조심스레 리온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져 보았다.
“형, 형은 다 기억 나세요?”
“···당연하죠. 다 기억 납니다.”
“그럼 장원급제 가마는···.”
“가마?”
순간 멍청해진 리온의 얼굴을 보며 소년들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기억 못 하는구만.’
‘알고 보니 유쾌한 형님이셨어.’
‘빨리 가자···.’
다음에 또 만나서 놀자는 약속을 끝으로, 소년들은 루나틱의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그 리온이 궁지에 빠진 모습을 다 보다니. 소년들은 신기한 기분이었다.
물론 맨정신으로는 서로 가마를 태워 주고, 속 얘기를 하며 질질 짤 순 없겠지만.
어쨌거나 한껏 가까워진 느낌을 받으며, 일곱 선비들은 7IN의 숙소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멤버들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현수의 맥북.
어젯밤, 리온의 작업실에서 만들었던 데모 곡의 스케치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현수, 저장 잘 한 거 맞지?”
“글쎄. 열어 봐야 알 것 같은데···.”
“뭐? 야,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
“후우··· 내 버릇이 저장이니까, 버릇을 믿어 보자.”
“제발, 제발···.”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데모 음원 파일이 열렸다. 아직은 음원이 제대로 저장됐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자, 재생한다?”
현수가 스페이스바를 누르자, 프로젝트 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 * *
바로 다음 날, 솔라시스템 대회의실.
오전부터 시작한 회의는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끝나지 않고 있었다.
서은우 팀장과 양미현 본부장의 대립이 그 원인이었다.
서은우 팀장이 7IN의 세계관 기획과 활동 계획을 담당하는 실무자라면, 양미현 팀장은 그보다 높은 위치에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상급자였다.
지금까지의 아이돌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그룹인 만큼, 기획과 홍보도 차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서은우 팀장의 입장.
그러나 양미현 본부장은 반대로 보수적이었다.
이미 엄청난 관심을 받았기에, 7IN은 철저히 성공의 공식만을 따라야 한다.
현상에 대한 해석은 같지만 접근 방식이 달랐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데뷔앨범의 타이틀곡을 두고 팽팽히 맞선 두 사람이었다.
“타이틀은 이랑 <예의없는 것들>로 하자고. 리온이 <예의없는 것들> 다시 넘기기로 했다며. 그럼 문제없는 거 아냐?”
“저도 처음엔 그게 베스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자기도 나랑 의견 같았잖아. 이미 대중이 반응한 곡이고, 퍼포먼스도 다 짜여져 있는데. 이보다 완벽한 더블 타이틀이 어디 있어?”
“본부장님, 7IN은 새롭게 데뷔하는 팀입니다. 그것도 역대 모든 아이돌 중 가장 신선한 모습으로요. 도전이 어울리는 팀이라는 말입니다. 벌써부터 재탕 곡으로 앨범을 채워 넣는 건, 이 팀의 정체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서 팀장, 진짜 왜 그래. <명품진품> 때도 이랬잖아. 원래 이렇게 도전적인 사람이었나?”
“그 때도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결과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대체 어떤 아이돌이 예능 데뷔를 <명품진품>에서 하냐고.”
“전무후무한 아이돌이니까, 전무후무한 길을 걸어야죠.”
“와, 진짜 한 마디를 안 지네.”
양미현 본부장은 서류를 탁 내려놓으며 서은우 팀장을 노려보았으나, 서은우 팀장은 밀릴 생각 없다는 듯 아래턱에 힘을 꽉 줬다.
“좋아. 그럼 대안은 있어?”
“대안이라면···.”
“타이틀 곡 말야. , <예의없는 것들> 이거 대체할 만한 곡들이 있냐고.”
“···.”
“설마, 대안도 없이 핏대만 세운 거니?”
“결정을 내려 주시면 대안을 찾겠습니다.”
“뭐라고?”
“프로듀서에게 곡비도 지급하지 않고, 대뜸 곡부터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아주 대단한 선비 나셨네!”
대단한 선비 나셨다는 말과 동시에, 회의실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끼익-.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넓은 쟁반을 들고 온 군자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양갱을 하나씩 돌렸다.
“하하, 회의가 과열된 것 같아서 잠시···.”
“뭔데 이게?”
“양갱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인 별미이지요.”
그 모습을 보니 양미현 본부장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회의에 갑자기 난입한 것은 좀 화가 났지만, 아무튼 이 회의도 다 저 애들 잘 키워 보자고 하는 거니까.
양갱을 한 입 베어 물으며, 양미현 본부장이 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근데 지금 회의 중이라, 그건 놓고 가 줄래? 알아서 나눠 먹을게.”
군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쟁반을 내려 놓았지만, 어째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본부장님.”
“응, 왜?”
“죄송하지만, 본의 아니게 회의 내용을 조금 엿듣고 말았습니다.”
“···뭐?”
“아니, 사실 엿들은 게 아니라 그냥 들렸습니다. 본부장님의 발성은 장민혁 트레이너님 못지 않더군요.”
“어?”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순간 이용중 실장은 풉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러나 양미현 본부장의 포커페이스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뭐. 발성 칭찬해 주려고?”
“아니요. 그것 뿐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말씀하신 그 대안, 새로운 타이틀곡이 될 만한 신곡.”
“···?”
“저희가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