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횡단보도도 손 들고 건널 놈
상암동에 위치한 MP 플레이센터에선 사전녹화 준비가 한창이었다.
지난주 5위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컴백한 페이버릿도 사전녹화를 앞두고 있었다.
별다른 장치 없는 공용 무대를 쓰는 본방송과 달리, 사전녹화 무대는 다양한 세트 장치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돌이나 대형 가수의 컴백 무대는 사전녹화를 통해 화려하게 꾸며진다. 페이버릿 역시 지난 주 현란한 무대장치와 비싼 세트를 선보인 바 있었다.
그러나 페이버릿의 소속사 컬리뮤직은 컴백 2주차인 이번 주 에도 사전녹화에 힘을 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멤버들의 의지가 강했다. 사비를 불태워서라도 좋은 무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강력한 의지.
말로는 ‘팬들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컬리뮤직의 김은표 실장은 그들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너네 칠린 애들 때문에 그러냐?”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됐어 자식들아. 지원 제대로 할 테니까 무대 똑바로 해.”
“오, 감사함다.”
“하긴, 음원 발리고, 초동 발리고, 쇼케도 발렸는데 무대라도 제대로 해야지. 안 그래?”
“에이, 은표 형. 말을 섭섭하게 하시네. 발리다뇨.”
“무튼 이번엔 제대로 해 보라고. 그래도 너네 짬바가 있는데, 무대에서도 밀리진 않을 거 아냐.”
“당연하죠.”
루삐 사건만 없었어도 이런 기싸움은 안 했을 거다. 아육시 화력 어마무시한 거야 전 국민이 다 알았으니까.
음원 순위는 애초에 패색이 짙은 싸움이었다. 앨범 판매량은 그나마 선방할 줄 알았지만, 그마저도 더블 스코어로 발려 버렸고.
어쩌면 순위에서도 밀려버릴 지도 모른다. 워낙 이 방송 저 방송 다 나오는 놈들이니, 이미 방송점수는 왕창 먹어 놨겠지.
아무튼, 인정하기 싫어도 세기는 센 놈들이라는 거다.
그러나 이미 한번 자존심이 상한 이상, 어떻게든 되갚아 주고 싶은 민강후였다. 이미 동생 강열의 일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멀찍이 지나가는 신인 여자 아이돌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의 퀴즈>에서 봤던 그 친구들이다.
평소 같았다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인사를 하러 달려왔을 텐데, 어쩐지 먼 발치에서 멈칫멈칫 하는 것이 보인다. 입모양이 꼭 ‘루삐’를 말하는 것 같았다.
“시발···.”
절로 욕이 나왔다.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저 귀여운 애들과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고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인성 좋은 신인 아이돌 멤버들은, 쭈뼛쭈뼛 다가와 민강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우리 초면이지?”
“네?”
“그 땐 루삐였고 지금은 강후잖아! 하하핫-.”
“아···.”
회심의 개그를 던져 보았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돌아선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민강후는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아무튼 이게 다 유군자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민강후는 자신이 있었다.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유군자와 7IN을 야무지게 찍어 눌러 줄 자신이.
인기는 실력순이 아니다. 실력 역시 인기순이 아니다.
지금 당장 7IN이 조금 핫할 순 있겠으나, 페이버릿에겐 4년차라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무대 실력으로 7IN에게 밀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마침 7IN 멤버들이 페이버릿 멤버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가왔다. 민강후의 속도 모르는지, 유군자는 그 뺀질뺀질한 얼굴로 티 없이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강후 형님!”
그러나 민강후는 유군자를 보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이제 막 두어 번 봤을 뿐인데, 마치 오래 전부터 악연으로 얽혀 있었던 것마냥 기분 나쁜 놈이었다.
“너 때문에 여자애들이 나 피하더라.”
“음? 여자 아이돌 멤버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새끼야.”
타박할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군자는 오히려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오오, 그것 참 잘 된 일이군요!”
“뭐?”
“현수에게 들었습니다. 아이돌과 아이돌 사이의 열애설은 죄악이라더군요.”
“그, 그거야···.”
“이제 그 끔찍한 위험 요소가 알아서 형님을 피하게 됐으니, 참으로 잘 된 일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는 군자는 여전히 해맑아 보였다.
“그래, 너 참 맞는 말 잘 하네.”
“감사합니다 형님.”
“횡단보도도 손 들고 건너겠다 아주.”
“어? 어떻게 아셨는지요?”
주변의 멤버들이 대충 말려서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아마 3분은 더 방글방글 웃으면서 민강후의 속을 뒤집어 놓았을 거다.
아이돌과 아이돌의 열애설은 죄악이라고? 누가 그걸 모르나?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민강후는 무대를 준비했다.
사전녹화장에 온 아이돌 중에는 페이버릿의 연차가 가장 높았다. 보여줄 땐 보여줘야지. 7IN이 어떤 무대를 하든, 적어도 무대 실력 만큼은 페이버릿이 우위일 테다.
그렇게 자기암시를 걸며 민강후는 무대 위에 올랐다.
역대급으로 멘탈 털린 날이었지만 막상 무대에 서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연습했던 대로 몸이 움직였을 뿐.
딴, 따아안—.
“후우, 후우-.”
엔딩 포즈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며, 민강후는 자아도취감에 빠져 있었다.
지렸다. 솔직히 개 지렸다.
원래도 무대는 자신있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합이 잘 맞는 날이었다. 표정도 평소보다 잘 나왔고, 팬들의 환호성 역시 지난 주보다 훨씬 컸다.
성공적인 무대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니, 유군자를 비롯한 7IN 멤버들이 백스테이지에 있었다. 아마 다음 무대가 놈들의 차례인 듯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고생하셨슴다!”
몇몇 놈들의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문득 신인 시절이 떠오른 민강후였다.
그 때도 딱 그랬다. 루나틱이나 벨로체 같이 데뷔 때부터 천상계였던 팀이 앞에서 무대를 해 버리면, 긴장돼서 꼭 실수 하나씩은 해 버리곤 했다.
이 녀석들이 딱 그 꼴이구만.
민강후는 피식 웃으며 유군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놈도 신인이라면 이 상황에선 긴장을···.
“오오, 오오옷, 이것이 응원보옹!?”
···해야 되는데.
신박하게 생긴 서예붓 모양 응원봉을 휘두르며, 군자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형님, 형님! 이것 좀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 응원봉이랍니다!”
“···.”
“붓처럼 생긴 것이, 먹물 대신 빛망울이 나오지요!”
“···.”
“글씨를 못 쓰는 붓이라니. 참으로 무용해 보이나, 제 마음엔 쏙 든답니다!”
“···어쩌라고···.”
희한하게도 군자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기운이 빠지는 민강후였다.
“너, 나랑 진짜 안 맞는다.”
“앗, 하지만 전 방금 형님과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뭔데?”
“저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
“형님, 우리는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하핫-.”
“아오, 진짜—!!”
* * *
민강후는 잔뜩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사실 군자를 비롯한 7IN의 멤버들은 모두 페이버릿의 무대를 보았다.
백스테이지에 설치된 세 개의 무대 모니터엔, 페이버릿의 신곡 사전녹화 무대가 중계되고 있었으니까.
“역시 선배님들이네.”
“···페, 페이버릿 선배님들··· 하, 합이 너무 좋은 것 같아요···.”
“AR 볼륨도 작은데 라이브도 엄청 깔끔해.”
“핸드마이크 진짜 잘 쓰신다.”
솔직히 감탄했다. 페이버릿의 무대는, 군자가 아육시를 하며 봤던 그 어떤 무대보다도 깔끔하고 수준 높았다.
아육시 무대들도 참신하고 힘이 넘치긴 했다. 그렇기에 무대를 보는 도중엔 신이 났지만, 정작 기억에 오래 남는 무대는 몇 개 없었다.
그러나 페이버릿은 달랐다. 힘과 기술은 물론, 표정을 쓰는 방법 하나까지 잘 훈련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또 배우는구나!”
민강후는 군자가 페이버릿의 무대를 보고 좌절하기를 기대했지만, 군자는 도리어 만족했다.
다양한 기성 아이돌의 무대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전녹화 현장은 거대한 배움의 장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무대 아래엔 서예붓 응원봉을 들고 7IN을 기다리는 팬들이 있지 않은가.
먼 발치에서 봐도 참으로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팬들 앞에서 무대를 선보이고 싶었다. 마음이 그러하니 긴장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다음 무대, 칠린 스탠바이 하겠습니다.”
“넵.”
어느새 무대 장치 설치가 끝나고, 7IN이 오를 차례가 됐다.
“와씨, 진짜 엠플래닛 무대야.”
“···미쳤다 미쳤어.”
“아하하핫, 음방 나온다~”
“···자, 자, 잘 할 수 있을까요···.”
“유찬이는 어째 평소보다 더 더듬는 것 같은데.”
“기차.”
“에? 갑자기 기차는 왜요 형.”
“기차 만들자.”
인혁의 제안에 따라, 멤버들은 일렬로 선 채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맨 앞 태웅이 맨 뒤 인혁의 어깨에 손을 얹자, 기차는 꼬리를 문 듯 원 모양이 됐다.
“잘 해 보자.”
“연습 많이 했잖아!”
그렇게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 주니, 긴장했던 멤버들도 조금은 편해진 모습이었다.
딱히 긴장은 하지 않고 있던 군자였지만 뭉친 어깨가 풀리자 몸도 함께 유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참 좋구나.
“반대로.”
인혁의 신호에 따라 멤버들이 몸을 180도 휙 돌렸다. 이제는 주무르는 쪽과 안마를 받는 쪽의 입장이 반대가 됐다.
“와아, 선비 형아 어깨 넓은 것 좀 봐여. 억울하넹.”
“뭐가 억울해?”
“너무 넓어서 주무를 게 넘 많자나여.”
“푸하핫, 현재가 자리 운이 안 좋네.”
그렇게 안마를 하고 있으니 스태프가 다시 수신호를 보냈다. 이제 무대 위에 올라가라는 신호다.
“좋아, 가자.”
원형의 열차가 다시 직선이 됐다. 선두에 선 군자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 기차는 해체되어 무대 모드에 돌입했다. 흑색과 자주색으로 꾸며진 무대 복장을 입은 멤버들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오늘 에서 공연할 곡은 총 세 개. 연주곡과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 더블 타이틀곡인 과 <근본 (Origin)>이다.
사전녹화가 진행되는 곡은 그 중 와 , 두 곡.
연주곡으로 이루어진 인트로 무대는 아이돌들의 컴백 무대에서도 자주 보이는 형식으로, 팀의 퍼포먼스 기량을 최대로 선보일 수 있는 현란한 무대를 준비한다.
컴백과 동시에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성큼성큼 무대에 오른 군자가 허리춤에 찬 환도(環刀)를 뽑았다. 무대 중앙에 설치된 것은 검붉은 비단의 장막. 그 위엔 검은 안료로 그린 산수화, 풍속화가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선비가 튀어나올 듯한 풍경의 장막.
그 거대하며 팽팽한 장막 뒤에서 군자가 환도를 뽑아 들었다. 한없이 날카로워진 집중력이 검 끝에 모여 검기(劍氣)를 이루었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한 발자국 내딛은 뒤.
쯔팟, 파앗—.
순식간에 뻗은 두 번의 참격.
칼날이 아닌 검의 기운이 원단을 할퀸 듯, 장막의 정중앙에 십(十)자 모양의 상흔이 만들어졌다.
보기 좋게 갈라진 장막, 그 사이로 일곱 선비들이 튀어나와 대형을 이루었다.
둥, 둥, 두웅-.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타악기 소리, 멤버들의 움직임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 리듬을 따랐다.
마침내 완벽한 대형을 만든 뒤엔 일제히 발검(發劍).
관객들을 향해 예를 갖추듯, 천천히 몸의 정중앙에 검을 가져다 댄 뒤.
쿠웅, 쿠우웅—!!
시나브로 증폭된 타악기 소리에 따라 멤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무예도보통지> 제 3권, 제독검법(提督劍法)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