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형님, 춘대래시군요?
쿠웅, 쿠우웅-.
양손으로 잡은 칼을 관자놀이까지 들어올리며 칼끝으로 전방을 겨누는 첫 번째 동작.
이내 떨어지는 큰북 리듬에 맞추어 일곱 개의 환도가 사선의 검로를 그렸다. 일일이 엮은 연필로 선을 그은 듯,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동선이었다.
와아아아아아—.
첫 번째 동작과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아이돌 그룹인지, 아니면 무예 시범단인지. 멤버들의 검술은 이제 웬만한 무술팀이 보아도 혀를 내두를 수준으로 진화해 있었다.
아육시 첫 번째 무대 <월광>, 결승 무대 을 거치며 한국 무술을 무대에 입히는 것에 익숙해진 멤버들이었다.
미니 1집의 컨셉은 ‘풍속도를 찢고 나온 선비들’. 그 컨셉을 전달하기 위해 무대에서 검술을 준비했다.
이번에 준비한 검술은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조선의 무예 중에서도 가장 유려하며 현란한 검법, ‘제독검’.
이 제독검법을 기반으로 한 동작에, 검도 유단자인 유찬이 디테일을 추가하여 만든 안무는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파밧, 파아아앗—.
비록 끝을 뭉뚝하게 만든 무대용 환도였으나 동작은 마치 대기를 가를 듯 예리했다. 민첩한 발의 움직임은 아육시 때보다 더 정돈되어 있었다.
플로어 위에선 호랑이처럼 힘이 넘치면서도, 공중으로 뛰어오를 땐 마치 고양이처럼 사뿐했다. 그렇게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가 수직의 검로를 그리며 영웅처럼 착지하는 모습엔 민강후마저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체중 관리는 열심히 했나 보네···.’
입은 삐죽 나왔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오디션이 끝났음에도 7IN 멤버들은 여전히 ‘무대 모드’를 유지 중이었다.
매일 춤을 추는 사람들은 안다. 체중이 1kg만 늘어도 발이 무거워지고, 2kg이 늘면 춤선이 달라진다. 오디션이 끝난 뒤, 이렇게 해이해진 모습으로 팬들을 실망시켰던 아이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7IN은 달랐다. 짧은 기간 동안 순수창작 무대 4개라는 미친 스케쥴을 소화한 뒤에도 안무 연습, 몸 관리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은 듯 했다.
후우웅-.
치켜든 검신에 조명이 떨어지며 칼날이 푸르게 빛났다. 그 청백의 칼날처럼, 멤버들의 움직임도 완벽하게 제련되어 있었다.
칼끝이 가리키는 방향, 검을 잡은 손 모양, 발을 내딛는 타이밍, 호흡까지 나무랄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지켜보는 동료들 입장에서도 감탄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게 뭔···.”
“저 분들 신인 맞아요?”
“검무는 진짜 독보적인데.”
“미쳤다···.”
관객석의 반응은 다양했다. 서예붓 응원봉을 든 팬들은 열광했으며, 다른 응원봉을 든 타 팀의 팬들은 감탄했다.
“우와아···.”
물론 팬덤 사이에도 은근한 경쟁 의식이 존재한다지만, 그래도 멋진 건 멋진 거다.
입을 벌린 채 감탄사를 흘리는 타 팬들을 보며 7IN의 팬들은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꼈다. 동작이 더해질수록 더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쿠우우우웅—.
피겨스케이팅 같은 공중회전, 이어지는 사선 베기를 끝으로 의 단체 검무가 끝났다.
이어지는 무대는 아육시 결승 무대 곡이었던 . 이번엔 당상관의 상징인 주립(朱笠) 대신 자개로 장식한 검은 갓을 썼다.
찰그락-.
자개 장식 부딪히는 소리, 이어지는 대고(大鼓)의 웅장한 울림과 함께 ‘忠’ 자가 새겨진 깃발이 일제히 자리했고,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높였다.
은 팬들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내용의 노래다. 공연을 하는 일곱 선비를 보며, 팬들은 충성스런 가신이라도 얻은 기분이었다.
“···나, 나도 충성···.”
7IN이 팬에게 충성을 다짐하듯, 팬들 역시 충성을 다짐했다. 이렇게 본업 잘하고, 얼굴 천재에, 올망졸망 초롱초롱한 아이들이 뿅 하고 나오다니.
팬들은 이미 팬심과 지갑을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마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선비들은 무대 위를 훨훨 날아다니며 사전녹화 현장을 찢어 놓았다.
쿠웅, 쿠우우웅-.
이어지는 의 하이라이트 파트, 갓 방패와 곤봉을 이용한 제식동작 부분에선 곤봉 대신 검을 사용했다.
에선 화려한 제독검을 선보였다면, 이번엔 보다 절제미 넘치는 군용 검술인 본국검(本國劍)이었다.
동그랗게 대형을 만든 멤버들이 자개 끈을 말아 왼손에 쥐었다. 흑립(黑笠)은 방패가 되었으며, 왼쪽 허리춤에서 뽑아든 칼이 다시 한번 새파랗게 빛났다.
파스슷-.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도 원형 대형은 일체 흐트러짐이 없었다. 연습량이 만든 아름다운 동선이 팬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갓으로 만든 방패를 힘차게 내밀 때마다 자개 장식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결승전 영상을 수백 번 돌려 본 팬들의 눈에는 보였다. 수정된 안무 디테일, 더욱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동선, 다양해진 멤버들의 표정까지.
“어떡해, 너무 좋아-.”
비명을 지를 만큼 짜릿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무대를 만들기 위해 고생했을 멤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머리칼이 젖을 만큼 땀을 흩뿌리는 와중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고맙다 못해 갸륵했다.
그런 멤버들을 위해 팬들은 더욱 목청을 높였고.
와아아아아아아—.
천장의 조명을 흔들 듯 울려 퍼지는 환호성은 멤버들에게도 힘이 됐다.
쿠우웅, 쿠웅-!
군자는 이 시간이 참 좋았다.
사실 연습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가무를 좋아하는 군자라지만 그것이 업(業)이 되는 순간부터는 괴로움이 따랐다.
완성될 때까지 같은 동작을 수백, 수천 번 반복하고.
근육통과 관절통에 온 몸이 시큰거릴 때까지 연습실에 머무르곤 했으니까.
그러나 이 마법 같은 순간을 체험한 이상, 그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군자였다.
어디를 보아도 날 좋아하는 사람 뿐이구나. 세상 모든 빛이 내게 쏟아지고 있는 것 같구나.
격한 안무를 소화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니, 표정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감돌았다. 도저히 웃음 짓지 않을 수가 없는 풍경이었다.
멤버들은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유지했다. 혹독한 연습 덕분인지 체력은 오히려 여유롭게 남았다. 태웅과 현수가 각각 한 번씩 실수를 하긴 했지만, 눈을 부릅뜨고 보지 않았다면 인지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실수였다.
쿠우우우웅-.
마지막 리듬에 맞춰, 모든 멤버들이 동시에 오른발을 바닥에 찍으며 엔딩 포즈를 취했다.
원샷 카메라에 시선을 보내는 일도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것 같았다. 현재와 시우는 그 와중에 카메라에 하트까지 쏘며 아이돌로서 열일하고 있었다.
“사랑해요!”
“아하핫, 사랑해~”
그 모습에 열광하는 팬들을 보며 군자도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언젠가··· 언젠가 나도 안면 가죽이 조금 더 두꺼워진다면 꼭 저렇게 교태를 부려야지.
“수고하셨습니다!”
“넵, 감사함다!”
그렇게 사전녹화 무대가 마무리됐다. 태웅과 현수는 무대를 내려오자 마자 실수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7IN의 무대 퀄리티를 따라잡을 팀은 없었다. 페이버릿과 민강후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 새끼들, 잘하긴 하네···.”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엄청난 박력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동양풍 공연이야 수도 없이 본 민강후였지만 7IN의 퍼포먼스는 좀 달랐다.
안무의 퀄리티, 멤버들 간의 합, 보컬들의 라이브까지 모든 것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유군자의 존재감이 빛났다.
어떻게 저렇게 동양풍 무대에 찰떡같이 어울릴 수가 있는 거지?
몸을 쓰는 방법부터 얼굴 선, 표정··· 유군자는 정말 역사책 속에서 튀어나온 선비 같았다. ‘조선에서 온 선비들’이라는 터무니 없는 그룹 세계관이 그냥 납득이 되어 버릴 정도로.
사전녹화에 함께한 다른 아티스트들도 모두 그 모습에 매료된 것 같았다. 아까부터 두 손을 모은 채 7IN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 다른 여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영 눈에 거슬렸다.
“···짜증나네···.”
관심 받고 싶다. 사랑 받고 싶다. 그것도 오로지 나만.
그 지독한 관종 기질이 민강후의 원동력이었다.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한 달 내내 연습실에서 살 수도 있었다.
이렇게 들러리만 서다가 갈 순 없지.
사전녹화가 끝난 뒤엔 바로 본방송이 이어졌다. 사전녹화와는 달리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본방은, 실수나 대참사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신인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첫 음방 생방을 긴장감도 없이 해낸다면 그건 이미 신인이 아니다.
그러나 7IN 멤버들에게는 이미 생방송 경험이 있었다.
그것도 시청률 20%를 상회한 국민 오디션 아육시 결승 무대에서, 연달아 두 곡을 생방으로 공연한 경험이.
출연자 대기실, 일곱 선비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본방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후우우···.”
“유찬아, 긴장되느냐.”
“···기, 긴장 되긴 하는데···.”
“하는데?”
“···혀, 형이 했던 말··· 생각 중이에요···.”
“내가 무슨 말을 했더냐.”
“···그, 그 때 그랬잖아요··· 새, 생방송 말고 사방송도 있냐구···.”
“아하.”
그제야 기억난다는 듯 군자가 손뼉을 쳤다. 생방송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유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어이 없는 소리를 했었구나.”
“···그, 그래도 그 말 들으니까··· 긴장 풀렸어요···.”
“하하, 그랬더냐.”
군자는 웃으며 유찬의 등을 가볍게 팡 두들겼다. 이제 유찬의 상태창에서 저주 같은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저주 없이 자신의 능력을 무대 위에서 모두 뽐낼 수 있게 된 유찬이었다.
“내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구나.”
유찬을 보며, 군자는 다시 한번 아이돌이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가무(歌舞)를 업으로 삼을 수 있어 좋고.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 좋고. 팬들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어 좋고. 소중한 동료들과 마음을 맞출 수 있어서 좋고.
참으로 좋은 일 뿐인 직업 아닌가.
“칠린 분들 무대 대기하실게요.”
“넵.”
어느새 선비들의 차례가 다가왔다.
컨셉에 맞는 의상으로 갈아입고, 헤어 세팅과 메이크업을 다시 한 멤버들이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방금 무대를 끝낸 페이버릿 멤버들이 무대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형님! 강후 형님!”
“···.”
“고생 많으셨습니다.”
“···.”
“생방송 무대는 어떠셨는지요?”
군자가 넉살 좋게 물어보았으나 민강후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망해라.”
“예?”
망해(茫海)라.
이 무대 위는 망망대해와 같이 아득하다는 말씀이시구나.
“좆망해라.”
“!”
존망해(尊茫海)라.
이 아득하게 넓은 무대를, 존중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씀이시다.
“예 형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길을 알 것 같습니다!”
“??”
군자는 민강후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 뭐야 임마!”
“하하, 부끄러워 마십시오.”
‘컨셉충’ 아이디어를 주신 주하성 형님이나, 따뜻한 조언을 해 주시는 민강후 형님이나. 겉으로는 재수 없지만 속은 참 따뜻하고 좋은 형님들 아닌가.
“형님도 ‘춘대래(春大來)’ 시군요?”
“뭐?”
“춘대래, 큰 봄이 온다는 뜻이지요. 겉으로는 겨울처럼 차가워도 마음 속은 봄처럼 따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랍니다.”
“뭔 헛소리를···.”
마지막으로 갈비뼈가 부서지도록 민강후를 꼬옥 안은 뒤, 군자는 무대 위로 총총 올라섰다. 무대 위는 민강후의 말처럼 아득하게 넓었으나, 충고 덕분인지 이상하게 마음이 떨리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