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유고우먼 변신!
[유교우먼]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자마자, 군자의 머릿속엔 이미 무대가 떠올랐다.
이제는 탐라국의 풍광을 즐기는 농부가 되었으나, 한때는 그 누구보다 잘 놀았던 풍류객.
여유 넘치는 춤사위와 툭툭 던지는 노랫말은, 지금의 영의정 대감 마님과도 너무나 찰떡같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유교우먼이 아니라 유고우먼이었다니. 점 하나 빠졌다고 노래의 제목이 바뀌어 버리다니.
그러나 실망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새로운 발상이 군자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머니가 세필 붓으로 얼굴에 낙서를 하시던 것이 떠올랐다.
세필 붓으로 눈가의 선을 진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안면에 점을 찍는 것도 가능한 일 아닌가.
“···그러면 점을 찍으면 그만 아닌가.”
“음?”
“영의정 대감 마님이 유고우먼이시라면, 점 하나만 찍으면 유교우먼이 되실 수도 있는 것 아니냔 말이다.”
“군자야, 그게 무슨 뜻이니?”
“대감 마님, 얼굴에 점을 하나 찍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점?”
“예. 이번엔 유교우먼이 되시는 겁니다.”
유고우먼 영의정을 유교우먼으로 만들어 보자는 군자의 아이디어는, 처음엔 병맛 같이 들렸으나 순식간에 모두를 사로잡았다.
“푸하핫, 군자 너 막장드라마 좋아하니?”
“막장드라마?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래? 그것도 모르면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얘 진짜 웃기는 애네.”
“근데 누나, 이거 은근 그럴싸하지 않아여?”
“난 좋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지금 내 삶이 딱 유교우먼이거든. 내가 뭐 불금에 클럽을 가겠니, 남자 연예인이랑 스캔들이 나겠니. 그저 씨나 뿌리고, 멍멍이나 키우고, 남편이랑 넷플이나 보면서···.”
“아하핫, 누나 표정이 섭섭해 보여요~”
턱을 괸 채 잠자코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듣던 서은우 팀장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교우먼, 확실히 7IN과 영의정을 이을 수 있는 적절한 키워드다.
7IN은 ‘선비’에 그 정체성을 두고 있다. 또한 ‘유교우먼’이라는 단어는 유고우먼의 변형으로 말장난의 재미를 줄 수 있으며, 변한 영의정의 삶과도 잘 어울린다.
처음엔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어가려 한 안건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적절해 보였다. 좀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는 리스크가 있지만, 퍼포먼스가 우스꽝스럽지 않으면 그만이다.
“···의정 누님.”
“응, 서 팀장. 왜?”
“이 키워드로 가려면 퍼포먼스가 완벽해야 합니다. 웃기는 제목에 웃기는 퍼포먼스까지 붙으면 학예회 무대처럼 보일 테니까요.”
“흐흐,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아?”
영의정은 씨익 웃으며 서은우 팀장의 어깨를 툭 쳤다. 마치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듯.
“걱정하지 마. 나 오늘부터 서울 머무르면서 매일 연습할 거니까.”
“···진심이십니까?”
“그럼. 모처럼 무대 서는데 대충 할 수 있겠어?”
“그, 남편 분은···.”
“플스5 사 주고 혼자 있으라니까 좋아하던데?”
“아하-.”
플스5와 혼자만의 시간. 서은우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결혼을 한다면 꼭 이런 누나와 하고 싶구나.
그렇게 극비리에 3주 간의 무대 준비가 시작됐다. 갈등이나 반목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만한 과정은 아니었다. 영의정이라면 몰라도, 7IN 멤버들에게 콜라보레이션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였으니까.
7IN 멤버들이 새로운 퍼포먼스를 익히는 데에 시간을 쏟는 동안, 영의정은 녹슬었던 몸의 감각을 되살리는 데에 열중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춤을 추고 살아온 덕분인지, 다행히 몸의 감각은 빠르게 돌아왔다. 심지어 라이브 실력은 오히려 늘어 있었다.
“누님, 전성기 때보다 노래는 더 나아지신 것 같은데요.”
“하핫, 그런가? 씨 뿌리면서 맨날 노동요 불러서 그런가 봐~”
그렇게 3주를 매일 갈아넣은 결과, 무대의 완성도는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올라갔다. 기획팀 역시 몸을 갈아 가며 무대에 걸맞은 최고의 세트를 준비해 주었고.
덕분에, <유교우먼> 무대는 시작부터 남다른 포스를 자랑했다.
무대용으로 리폼한 아이보리색 삼베 두루마기를 걸치듯 입은 일곱 명의 선비들 가운데엔, 블랙과 골드 컬러를 베이스로 만든 곤룡포를 가볍게 걸친 영의정이 서 있었다.
찢어진 루즈핏 청바지 위에 검은 곤룡포. 힙한 의상에 모든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박영제는 혜진을 불렀는데, 7IN은 과연 누구와 콜라보레이션을 하게 될까. 모두가 궁금해 마지않았으니까.
곧 커다란 핀 조명이 멤버들과 영의정의 머리 위에 떨어지며, 그녀의 정체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어?”
“야, 여, 영의정 아니야?”
“미친, 미쳤어어—!!”
아무리 전성기가 지난 연예인이라지만,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등장한 것만으로도 터져 나오는 미친 환호성. 7IN의 팬들 역시 머리를 감싸쥔 채 서로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영의정이라면 혜진에게 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방송에 복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몇 주 동안은 화제성을 씹어먹을 만한 스타성을 가진 인물 아닌가.
그런 미친 연예인이 7IN의 파트너라니.
“솔라시스템 최고오오오오—.”
방금 전까지 한 마음 한 뜻으로 소속사를 욕하던 팬들이, 이번엔 서로를 부둥켜 안고 그 소속사를 찬양했다. 어쩔 수 없는 태세전환이었다. 방청석에 앉은 그 누구도 이런 콜라보레이션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무대의 퀄리티였다.
나지막하게 시작한 전반부를 지나, 미니멀해진 비트 위에서 영의정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What’s up TV, What’s up VJ.
What’s up Boys & Girls, 오랜만이지.
모처럼 무대 위에 돌아왔네, with Chillin.
철없던 때 보다 무르익었네, this Feeling.
랩의 플로우에 음가를 붙인 싱잉 랩.
스텝과 동작이 가미되었기에, 라이브를 소화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벌스였으나 호흡엔 흔들림이 없었다. 스웨그 넘치는 동작, 조급하지 않은 랩핑은 마치 어제까지 무대 위에 있던 사람 같았다.
이제는 불금보다 중요해진 파종 시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눈가의 Smoky.
하지만 모두 알고 있겠지, 내가 누구인지.
이렇게 움직이다가도 한순간에 Beat Killing-.
관객들과 여유롭게 소통하며 무대 위를 누비다가도, 비트가 바뀌는 순간엔 멤버들과 대형을 이루며 군무의 대열에 합류하는 영의정이었다.
7IN 멤버들 역시 그 그루브에 맞춰 움직였다. 온 몸에 힘을 싣기보다, 포인트 동작에만 힘을 주며 유연함과 선을 살렸다. 펑키한 베이스라인과도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무드였다.
이어서 벌스를 건네받은 것은 7IN의 메인 랩퍼 권태웅.
조금 놀아 본 게 자랑? 난 부럽지가 않어.
오늘 클럽 간 게 자랑? 난 부럽지가 않어.
날 향한 기대와 사랑? 난 무겁지가 않어.
그걸 져버릴 만큼 낯짝이 두껍지가 않어!
단순하지만 익살스런 가사와 돌직구 같이 쭉쭉 뻗는 발성. 권태웅의 벌스는 매번 듣는 이들에게 청각적 쾌감을 선사했다.
콜라보 아티스트 자랑? 난 부럽지가 않어.
의정 누나랑 곡 해 봤냐? 난 부럽지가 않어.
만성 불치 연예인 병? 난 두렵지가 않어.
우린 무대를 찢는 화랑, 난 무섭지가 않어!
중독성 있는 벌스 구성에 팬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시원해!”
“얘는 진짜 가사 10분만에 쓰는 것 같지 않아?”
“은근 천재라니깐.”
“권태우우웅—.”
그렇게 파이팅 넘치는 권태웅의 벌스가 끝나고, 노래는 군자와 현재의 메인 보컬로 이루어진 후렴구에 접어들었다.
어허어, 놀아본 적 있더냐.
저 위에 올라본 적 있더냐.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법.
갈수록 본성을 숨기는 법.
미니멀했던 비트의 전자음이 증폭되고, 사운드가 웅장해짐과 동시에 후렴의 포인트 안무가 시작됐다.
영의정을 중심으로 일자에 가까운 V자 대형을 그린 멤버들이, 부드럽게 바닥에 주저앉아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고급 목재와 은으로 만들어진 길다란 곰방대였다.
별다른 안무가 없었음에도 영의정의 존재감은 폭발했다.
그루브에 맞추어 어깨를 움직이며, 입에 물었던 곰방대를 터는 간단한 동작.
영의정과 멤버들의 눈빛과 안무의 합(合)이 그 포인트 안무를 절묘하게 살려냈다.
어허어, 놀아본 적 있더냐.
저 위에 올라본 적 있더냐.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법.
갈수록 본성을 숨기는 법.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포스 넘치는 포인트 안무 동작에 접어들자 환호성 소리는 더욱 커졌다.
포인트 안무라고 무조건 파워 넘치며 절도 있을 필요가 없다. 영의정이 낸 아이디어에, 기유찬과 하현재, 권태웅이 안무를 짰다.
“아아악, 너무 멋져어—!!”
“현재랑 유찬이는 곰방대 말고 피리 든 거 봐!”
“흐아아악—.”
그 와중에 미성년자는 곰방대 대신 건전한 것을 들게 하는 깨알 센스까지.
퀄리티는 물론이며 소소한 디테일까지 살아 있는 무대에 팬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미 박영제와 혜진의 무대는 팬들의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대기실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다른 아티스트들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와아···.”
“영의정 님, 아직 살아있네요.”
“아니, 어떻게 저 분을 섭외한 거지?”
“이러면 우린 완전 나가린데···.”
감탄사만 오가는 와중, 박영제와 홍현석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영의정이 이 정도로 착실한 무대를 준비해 올 줄은 몰랐으니까.
“···저 누나는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형.”
“어?”
“영의정 라이브 못한다면서요.”
“그, 그러니까. 뭐야 저거? 또 AR 깐 거 아닌가?”
“누가 봐도 라이브잖아요···.”
“허, 진짜 희한하네. 농사 지으면서 하루종일 노동요만 불렀나.”
홍현석이 우스갯소리를 던졌으나 박영제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홍현석 역시 큰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심사위원단의 점수를 받아 경연에서 이겨 볼 생각이었지만, 이건 심사위원단이고 뭐고 아예 승산이 없는 게임 아닌가. 무려 영의정을 데려와서, 이렇게 미친 무대를 해 버리다니.
그러나 7IN과 영의정은 두 사람의 좌절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무대의 절정을 향해 갔다.
‘곰방대 안무’가 들어간 후렴구를 지나, 현재와 유찬의 벌스가 끝난 뒤 비트는 다시 한번 변주됐다.
베이스 리듬 위에 태평소 멜로디가 올라탐과 동시에, 여덟 멤버들은 좌우대칭의 V자 대형을 그렸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대형이 완성된 뒤, 색소폰처럼 펑키하게 흐르는 태평소 멜로디와 큰북 리듬에 맞추어.
파바바바밧-.
“어어—!?”
“여기서 왁킹을 한다고?”
열여섯 개의 팔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완벽한 군무의 왁킹(Wacking, 두 팔을 화려하게 회전시키며 음악을 표현하는 댄스)이 시작됐다.